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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랑시에르 Nov 11. 2024

다들 월동 준비하고 있나요.

입동 지났다고 날짜가 알려줍디다.

저녁 일을 마쳤다.


얼마 전 다시 등록한 요가 센터에서 아내를 만났다.

마트에서 마요네즈만 사서 들어가자고 했다. 마트에 장 보러 나오는 일이 손에 꼽는다. 우리는 생활공간은 같아도 시공간은 달랐다. 연애할 때도 그랬다. 늦은 밤 편지를 쓰면, 주인공인 아내는 무대에 없었다. 묘연하게 같은 밤, 어딘가 다른 밤에서 눈을 감고 있었다. 내가 문장 속 설렘을 담아내려 하면, 깨우지 말라는 듯 손사래 치는 나뭇가지가 보였다. 우리는 같은 밤, 같은 공간에서도 그랬다. 말하고 듣고, 대답하고 잠들고 그랬다. 그녀의 일상은 늘 바지런했다. 햇볕을 들이고, 바람을 불어넣으며, 정돈된 한 장면 속에 묘사될 법한 사람이었다. 그 공간에는 내겐 없는 수많은 질문과 수다가 담겨 있었다. 오늘은 모처럼 볕이 드는 날이었다. 평온함이 느껴졌다. 아내는 그 햇볕 속에 고요히 자라고 있었다. 수사(修辭)하려 들면 흩어져 버릴 것만 같은, 한순간의 찰나처럼. 지금 이 순간, 여기의 추억 같은 모습으로 말이다.


내가 아는 그녀의 사생활은 밥벌이의 출퇴근과 그 일을 대신하는 휴일의 다행(多幸)이었다. 어떤 생각을 하고 무엇을 기대하며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 어디를 여행하고 무엇을 먹고 싶은지 등을 알지 못한다. 주변에서 가늠하고 어떤 말들로 추측하고 예상할 뿐이었다. 그러나 아내의 세계에는 추측과 예상이라는 낱말이 없다. 작은 알림이라도 알려줘야 했으니까. 그래서 장 보러 나가는 일은 우리 둘의 세상을 함께 만드는 일이었다. 손을 잡고 걷는 것도 작은 축제 같았으니, 그녀의 세계는 비를 기다리는 대지의 꿈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서로 다른 언어와 문장 구조 속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내의 타고난 추리력과 나의 미진한 분석력 때문이라 생각했다. 대부분의 싸움은 실마리를 찾지 못해 일어나지만, 매번 감정을 추스르고 마음을 아우르는 것은 아내의 몫이었다. 내일이면 일상을 단장하고 야무지게 엮어나갔다. 또 우리 집 낱말 대백과사전에도.



마트에는 형형색색으로 쌓인 빼빼로만큼 배추나 무 등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입동, 이라 말하고는 어릴 적 월동 준비란 말을 떠올랐다. 마트에는 그 준비 때문에 왔다.  아홉 살까지 겨울이면 고구마와 김치로 겨울을 난 기억이 있다. 항아리를 닦고 무를 땅에 파묻기도 했었다. 엄마는 김장 김치를 이틀에 걸쳐 담갔다. 옆집 작은 이모의 도움으로 월동 준비를 마치고는 며칠씩 앓아누웠다. 그렇게 무며 배추며 갖가지 양념들도 아득히 먼 겨울을 준비하려고 뻘겋고 벌겋게 앓아 누어갔다. 내가 맛을 배우고 맛을 내는 법을 익힐 즈음 알게 되었다. 세상 모든 엄마가 얼마나 위대한지를. 엄마라는 이름은 여자에게서 발화되는 빛나는 지위라 여겼다.


무럭무럭 자라 엄마를 번쩍 들어 올릴 때가 되자 물었다.

그 작은 배에서 나 같은 놈이 태어나다니, 인생 참 신기해. 엄마가 내 엄마라는 게.

“왜, 엄마가 너를 낳지 않았을까 봐?”
“아니, 내가 너무 커서 이제 그 집에 못 들어가잖아. 내 집인데도 못 들어가잖아. 그리고 엄마가 없으면 내가 가졌던 집도 사라져 버리잖아.”
“엄마, 그래서 그랬나 봐.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집 다오.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집 다오라고.”
엄마는 졸음을 삼키며 물었다. “왜? 두꺼비는 왜 그런 거야?”
“엄마 왜라니, 나처럼 떡두꺼비 같은 아들이 나왔으니까.”

누나의 집도, 형의 집도, 그리고 나의 집도 언젠간 사라지겠지. 이제 다 헌 집이 됐으니까. 엄마 머리맡에 앉아 흰머리를 찾으며 소곤거렸다. 그 작은 머리카락 사이로 하얗고 얇은 것들이 잘도 숨어 있었다. 엄마는 나이 드는 것도 싫고 시간이 너무 빠른 것 같아 아쉽다고 말했다. 어쩌면 자기 자식이 너무 빨리 찾아내는 것이 더 두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엄마의 흰머리는 하얀 배추 밑동처럼 그렇게 월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마요네즈만 사지 않았다.

상품 가치가 없다는 이유로 저렴하게 팔리고 있는 새파란 총각무와, 셋이 나란히 누워 떠나온 고향 생각에 잠긴 낙지들, 여기가 어딘지 모르는 눈치의 모시조개를 집어 들었다. 인터넷 마트로 주문한 배추와 무, 쪽파가 집에 있었다. 생강과 마늘도 잔뜩 준비했다. 액젓과 젓갈도 마련됐으니 이른 월동 준비가 된 셈이다. 휴일이면 아내 입에 들어갈 만족스러운 것도 준비했다. 오랫동안 남의 입에 들어갈 것을 만들어왔고 나름 잘해왔다. 그 남들 중 한 여자가 아내였다. 나를 소유한 그녀는 전용 요리사를 얻은 셈이다. 그러니 맛있는 음식을 평생 먹게 된 셈이었다. 누군가의 셈을 풀어주려고 요리사가 되었고, 그새 얼굴도 팔아먹었다. 스무 해를 족히 넘겼으니 누군가의 일부를 만드는 일에 나름 일조한 셈이다. 아침마다 체중계 숫자놀음에 이어지는 한숨에도 일조하고 있으니, 나를 소유한 탓에 그 나름 셈을 풀고 있는 것이다. 



그 셈은 유일하게 맛이 없던 엄마의 김치였다.

엄마의 김치는 참 맛이 없었다. 얼마 전에도 담갔다며 먹어보라 했었다.

“맛있지?” 

“아니, 맛없어. 엄마 김치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참 맛없어.” 

“에이, 왜 그래? 괜찮잖아. 다시 먹어봐.” 

“아니, 엄마, 별로야.” 

누나가 맛보더니 거들었다. “야, 이 정도면 괜찮지 않냐?”

“응, 맞아. 괜찮아. 근데 맛은 없지.” 

내 투정에 어디선가 툭하니 두꺼비 집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 집에 가져가지 마.”


한 통 가득 담았던 모양이었다.

엄마의 손맛은 다른 데 있었다. 일찍 시집와서 김치를 배울 시간이 없었다고 한다. 사실 엄마는 월동 준비할 때 아빠를 만나버렸었다. 1970년대, 농사가 끝난 시골에는 놀음판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지루한 겨울을 나는 데에는 이만한 것도 없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았다. 오죽하면 나는 일곱 살 이후 민화투에서 고스톱으로 전과하고 있었다. 어쩌면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민화투와의 결별 같은, 그런 진심 어린 낭만이었다. 마침 새 이빨도 자라고 있었으니, 그저 어린것들이라 하기에 화투장이 손에 착착 감겼다. 설밭을 해치고 만나서는 아랫목에 담요를 깔고 힘껏 내리쳤다. 눈 덮인 마당과 익어가는 아랫목 사이를 오가는 짜-악 하는 소리가 사람을 흥분시켰다. 눈에 뭐가 씌었는지 메칸더브이가 그려진 동그란 종이 딱지를 내걸기도 했었다. 어른들은 무엇이든 걸어서 새 농사를 짓는 일도 많았다. 그게 얼마나 진지했던지, 아, 염병할 딸도 내다 팔았다. 집문서, 땅문서 오고 가고 그랬다. 몇 번 본 적도 있었다. 그 윗집 아재네 집안도 풍비박산 났었다. 시나브로 엄동설한 길거리에 나앉게 생겼다는 이야기. 화(花) 투는 더 이상 화(畵) 투가 아니었다. 그야말로 화(禍) 투였다.


그런 소문이 예수쟁이 청년들을 일주일씩이나 하는 사경회에 모여들게 했다. 월동 준비하느라 바쁜 시절, 엄마는 해남-진도 연합으로 모이는 월동 예배에 나간 것이다. 지루한 겨울과 놀음판에 빠져드는 그 숫자들보다는, 손바닥이 불이 나도록 손뼉 치며 부르던 주님께 영혼을 맡긴 셈이다. 내 배 아파 낳은 자식이라도 예수 안 믿으면 엄동설한에 내다 버릴 만큼 그분을 사랑하셨다. 아빠도 만나게 하시고 월동 준비도 안 하고 돌아다녔으니, 김치 맛없다고 투정하는 아들을 둔 것은 어쩌면 누군가의 샘이었는지 모르겠다. 


아홉 살이 되던 해 겨울 동치미와 고구마가 마지막이었다. 놀음이라고는 치를  떨던 엄마는 우리 전부 데리고 서울로 이사하기로 했다. 보통은 목포에서 광주로 이사하는 것이 전통방식이었다. 그러나 엄마가 벌리는 판은 정말 컸다. 대도시 서울로 직행이었다. 아버지는 울었고 누나는 사춘기였다. 바나나 우유와 과자 몇 개로 형과 나는 봉고차에 몸을 맡겼다. 나는 친구들에게 인사도 안 했다. 형은 서울 갔다가 다시 오는 줄 알고는 친구들에게 실컷 자랑했다고 한다. 당장 전학이 어려운 열다섯의 누나는 시골에 남았다. 인지능력과 감수성이 뛰어난 누나가 가장 힘들어했다. 그때 다 울었는지 누난 잘 울지 않는다. 가끔 많이 운다. 화나서, 열불 나서, 형이 캐나다 간다고 해서. 한편 엄마의 묻고 따블로 간 서울에서 아버지는 몇 달 전에 광을 팔고 은퇴하셨다. 더 이상 준비할 월동도 없다고 하였다. 하지만 우리집 월동은 이제 시작이었다. 일주일 피로로 인해 낮잠의 동면을 취한 사이 월동 준비를 모두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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