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도는 무언가 널리 알고 싶어 했다.
영조조 38년 해였다.
긴 장마가 그쳤다. 경복궁 담장 기와에 일렁이는 아지랑이는 사도세자의 분노와 슬픔을 머금고 있었다. 뜨거운 눈물과 절규는 뒤주 안에서 이어졌다. 울분과 괴성이 궁궐 밖으로 사그라질 때즈음, 쌉작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임오화변(壬午禍變)으로 사도세자가 사망했다. 1762년 음력 7월 4일의 일이다.
그때 단원(檀園) 김홍도의 나이는 열여덟 살이었다.
김홍도는 그날 도화원각에서 어진 작업에 필요한 붉은색 수정을 구하기 위해 들렀다. 아무도 없을 것이라 생각한 그곳에서 뜻밖의 장면을 마주했다. 형형색색의 깃발과 화려한 한복을 입은 강신무가 영조 앞에서 의식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 장면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가 죽지 아니하면 왕이 살을 맞게 됩니다. 이미 겁살에 상문이 끼어 있는 형국입니다. 더욱이 아주 강력한 타살귀가 있어서 더는 살려둬서는 안 됩니다."
강신무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영조는 고개를 숙인 채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김홍도는 몸을 숨기며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 강신무가 손에 쥔 붉은 천 조각이 찢기는 순간, 호롱불이 일렁이며 그녀의 한복이 비현실적으로 빛났다. 비단의 선명한 색과 강렬한 향이 어우러져 신비로운 분위기를 더했다. 그 순간, 김홍도는 자신이 지금 보고 있는 장면이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어떤 운명의 갈림길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날 밤, 김홍도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강신무의 의식에서 영감을 받아 처음으로 강렬한 색채를 사용한 그림을 그렸다. 그 그림은 단순한 예술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목격담을 암시적으로 담아낸 작품이었다. 그러나 그 누구에게도 이 이야기를 말할 수는 없었다. 이 사건이 그의 그림 속에서 어떻게 변주될지는 아직 아무도 알 수 없었다.
1494년, 연산군이 즉위하면서 역사의 흐름은 급격히 휘몰아쳤다. 성종실록 편찬 과정에서 김종직의 '조의제문(弔意帝文)'이 문제가 되었다. 조의제문은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빗대어 비판한 글로, 연산군에게는 자신의 왕권을 위협하는 불경으로 읽혔다. 김일손은 이 글을 사초에 담았다. 그것은 그의 신념과 학문의 윤리가 반영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극돈과 훈구파의 관료들은 이를 빌미로 김일손을 고발했고, 조선 역사에서 가장 잔혹한 사건 중 하나인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게 되었다. 1498년, 김일손은 연산군의 명에 의해 참수형에 처해졌다. 그의 나이 겨우 서른다섯이었다. 그의 죽음은 단순히 한 개인의 비극이 아니었다. 이는 사림파가 꿈꾸었던 정의와 도덕적 이상이 권력의 탐욕 앞에서 짓밟힌 상징이었다.
중앙도서관에서 어렵게 김해 김 씨 삼현파의 외서판을 구했다.
예상대로였다. 김일손의 죽음을 둘러싼 일들이 자세히 적혀 있었다. 왜 이걸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삼현파에서 김홍도가 빠지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어째서 하급 무과에 머물게 되었을까. 김양기는 탁월한 솜씨에도 불구하고 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김일손 17세손이었다. 그러니까 김관 중조로부터 내가 47세손이었으니 분명 김홍도는 삼현파에 있어야 했다. 사대문 안에 세 명의 현인을 배출한 집안이라 하여 삼현파라고 했다. 가락종친회에서도 꽤 덕망이 높아 판도판서공을 대대로 기리는 대표적인 명문가였다. 불교를 밀어내고 성리학적 가치를 조선에 펼친 김관. 그러나 김홍도는 성리학에 이골이 난 지 오래였다. 그가 도화서에 들어오기 전 화려한 색감을 이용한 그림을 자주 그렸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건 고려 불화가 아니었다. 황해도 만신들이 가지고 다니는 탱화였다. 신령이나 조상의 모습을 인물화로 그려 넣은 아주 화려한 색이었다. 임금에게만 사용하는 색인 붉은색과 황금 색을 잘 다루었다. 그게 화근이었다. 안산 상록의 현감이었던 길선덕은 강세황에게 알렸다.
"여기 색을 아주 잘 쓰는 아이가 있네. 자네가 와서 좀 보았으면 하는데. 황해도 무당들이 사용하는 그림일세. 굿판이 열리면 이 그림을 걸어놓는다더군. 어디서 이걸 알고 배웠는지, 또 색은 어디서 가져와서 그렸는지. 내 한양에 압송하기 전 자네에게 먼저 일러주는 걸세. 이 탱화들이 정말 명화라네."
무더운 여름이었다.
지난밤 꿈이 선명했다. 장소와 사람 얼굴까지 정확하게 기억이 났다. 무의식의 질감을 오감으로 느끼고 있었다. 본가에서 족보도 가져오고 중앙 도서관을 뒤지기도 했다. 그즈음이었다. 유명하다는 무당들을 찾기 시작했다. 유튜브나 방송에 나온 무당들에게 연락을 해보았다. 예약이 밀려 있었다. 신병을 앓고 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도와주겠다는 연락이 있었다. 그 정도는 아니었다. 개인의 앞날이 궁금한 것은 순전히 불안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꿈의 의미와 족보를 둘러싼 그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모르긴 몰라도 어딘가 이끌리는 것만 같았다. 내가 사는 동네 수많은 점집들이 있었고 그 점집들을 선별해 주는 블로그도 있었다. 가입절차가 까다롭기는 해도 오히려 그게 믿음을 주었다. 천안에서 유명하다고 하는 집들이 몇 군데 있었다. 하지만 유명한 점집들은 전부 만원이었다. 점을 보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수요가 많았는지 몰랐을 것이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오랫동안 교회를 다녔고 열심히 활동했었다. 그러나 서른이 되자 회의가 밀려왔고 내가 저주하던 그들처럼 나 역시 신앙을 버리고 말았다. 신앙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지만 기독교의 이면에 염증을 느꼈다. 마르크스주의에 빠져 살았다. 유물론적 사고로 오랫동안 지배당하며 살았다. 그러다 불교 철학을 공부하면 귀의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살아온 환경을 생각하면 점집을 찾아다닐 만한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오랫동안 전국 사찰을 돌며 탱화를 연구하고 취재하고 있었다.
인도에서 불교가 시작되어 성행하여 사라진 배경부터 중국으로 넘어가 당나라 때 꽃을 피우게 된 일들, 삼국시대 우리나라로 들어와 민의들 가운데 퍼지게 된 그 배경 또한 조사하고 있었다. 더욱이 탱화에는 아주 비밀스러운 이야기부터 진실한 사건들이 얽히고설킨 것들로 가득했다. [다빈치 코드]가 기독교 전체를 흔들 만큼 비밀이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것처럼 탱화에도 그러한 비밀이 있었다. 그러던 찰나에 나의 족보를 둘러싼 이야기에 내가 달려든 것이다. 종교는 나에게 역사와 철학 이전보다 더 피부에 가까이에 있었다. 기독교 교리와 역사에 대해서 많은 양의 책을 보았다. 서양 철학 또한 깊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 역량에 불교 철학이나 사상에도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무교 또한 경전을 연구하며 지역적 특징에 대해서 대충 알고는 있었다. 물론 점을 보기 전, 아니 선생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