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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으로서의 기자가 읽은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를 향한 팬심을 더해

by 박기자

얼마 만에 읽은 하루키 책인지. <여자 없는 남자들> 이후니 1년 정도 된 듯하다. 하루키는 항상 나를 고등학생 시절로 돌아가게 한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세계를 찾아서>에서 마카롱 향이 과거를 떠올리는 기제가 되듯이. 고등학생 시절 내 독서력 대부분은 하루키였다. 아니 실제 독서력이란 말을 쓸 수 있는 것도 하루키 덕분이다. 그 당시 한국에 번역된 하루키의 책을 난 다 읽었다. 정말 모조리 읽었다. 비평적 시각은커녕 제대로 이해조차 못했지만. 단지 그에게 끌렸다. 그가 좋아하는 작가, 음식, 취미 등 그의 모든 걸 사랑했다. 아이돌에 빠진 팬들과 같았다.


하루키와 거리가 멀어진 건 대학에 와서부터다. 사실 책과 멀어졌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다. 책의 자리는 술이 채웠다. -나이를 조금이나마 먹고 보니 양립하는 이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군대에서 회복한 책과의 거리에서 하루키의 공간은 무척이나 줄어들었다. 그를 향한 팬심이 줄었을지언정 사그라지지는 않았다. 군대에서 <1Q84>를 예약 구매해서 부모님께 부탁해 단숨에 싸지방(이름조차 오그라드는)에서 읽었던 기억에 선명하다. 제대 후 처음 읽었던 책은 <잡문집>이었다. 점점 하락한 그를 향한 팬심은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에서 바닥을 친 듯하다. 그 이후 바닥의 팬심이 지속하던 중 선물이란 이름으로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접했다.


글의 절반이 내가 얼마나 하루키를 사랑하는지로 가득 찼다. 글의 제목도 거창하게 달았다. 고작 2년 차 햇병아리 기자와 30년이 넘은 대작가(‘위대한’이란 수식어는 못 붙이지만, ‘대’라고까진 붙여줄 위치라고 생각한다.) 병렬적 구조로 놓았다. 어쨌든 병렬 구조의 제목이지만, 현실은 책 앞에 납작 엎드렸다. 책은 최근 겪는 슬럼프의 조그마한 탈출구-에서 흘러나오는 어렴풋한 불빛 정도-가 돼주었다. 언젠가 소설을 쓰고 싶은 나에게 많은 생각을 주었다. 또 다른 하루키 덕후인 김연수의 <소설가의 일> 역시 좋았지만, 개인적 취향에서는 하루키 쪽이다. 아마 내가 그의 작품을 모두 섭렵하고 있기에, 더 나아가 그의 글을 통해 생활 패턴까지 꿰고 있어서일 것이다.


기자와 소설가는 글을 쓴다는 점 이외에는 모조리 다르다. 하지만 하루키는 왠지 그의 섬세한 묘사와 다르게 기자에게 동질감을 느끼게 한다. 하루키는 대중이 손쉽게 떠오르는 소설가의 일상과 전혀 다른 일상을 산다. 그를 통해 나는 과거의 병약하고 예민한 예술가, 대문호의 틀에서 빠져나와 오늘을 사는 작가들을 접한다. 그의 삶의 태도는 관념 속 예술가보다는 현실 속 기자와 더 유사해 보인다. 한 사물을 관찰하고 본인이 판단한다. 깊이 파고들면 좋지만, 그보다 더 다양하게 주변을 살핀다. 이를 자신의 시점으로 다룬다. 편집자(데스크)에 의해 본인 생각, 관점이 잘려나가는 경우도 흔하다. 그리고 그쪽이 좋은 경우도 꽤 있다. 참으로 유사하다. 기자로서의 이상이라고 표현해도 될 정도로. 대가의 반열에 올랐기에 느껴지는 아우라인가 싶기도 하지만 말이다.


유사점을 열심히 열거했지만 역시 기자와 소설가는 다르다. 여담으로 이에 일반적 작가들보다 김훈을 더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팩트로 이루어진 그의 촘촘한 글들이 주는 숨 막힘에 힘겨워하면서도 그를 좋아한다. 물론 하루키가 말했듯 좀 느슨하게 풀어주는 부분도 있었으면 하는 생각도 있지만. 책을 완독하고 나니 뭐라도 글을 쓰고 싶어졌다. 그리고 매해 미루던 소설을 쓰는 계획을 어떻게 해서든, 언제든 이뤄내고 싶다는 다짐이 더 굳건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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