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정수 Jul 23. 2024

C19. 영웅이 먹다!

  - 이인항, 〈삼국지:용의 부활〉

C19. 영웅이 먹다! - 이인항, 〈삼국지:용의 부활〉(2008)

《삼국지》 독서 편력

   지금까지 저는 《삼국지》(정확히는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를 네 번 읽었습니다. 완역본만 따졌을 때 그렇습니다. 이런저런 모양새의 축약본이나 만화책까지 포함하면 족히 열 번쯤은 읽었지 않나 싶네요.

   학생 시절에 처음 읽었던 《삼국지》는 역자가 누구인지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본문이 세로줄 쓰기로 되어 있었고, 그나마도 상하(上下) 2단으로 나뉘어 편집된 깨알 같은 글씨의 판본이었지요.

   지금은 어떤 출판사에서도 그렇게 편집하지 않는, 거의 고서(古書)에 가까운 옛날 책 말입니다. 그래도 총 다섯 권짜리의 제법 묵직한 세트였지요. 제본에 사용된 종이도 이제는 아예 생산도 하지 않는 두꺼운 갱지 타입의 거친 종이였고요.

   물론, 나중에 이문열의 《평역 삼국지》와 황석영의 《삼국지》도 당연히 읽었습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삼국지》에는 그야말로 얼른 헤아리기 힘들 만큼 수많은 인물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그 하나하나가 다 예외 없이 나름 나름으로 개성적인 인물들이라, 이름만 대면 어떤 사람인지 그 이미지가 머릿속에 또렷이 그려질 만큼 크게 헷갈리지를 않습니다.

   그만큼 저자인 나관중의 인물 형상화 솜씨가 발군이라는 뜻이겠지요.

   따라서 독자 처지에서는 읽는 동안, 또 다 읽고 났을 때 분명히 더 마음이 가는 인물과 그렇지 않은 인물의 구분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곧, 두 번째 읽을 때부터는 그렇게 마음이 가는 인물을 중심으로 《삼국지》를 읽게 된다는 이야기를 저는 지금 하려는 것입니다.     


《삼국지》 다시 읽기

   한데, 언제인가부터 조조를 중심으로 《삼국지》를 다시 읽으려는 움직임이 생겼습니다. 이는 조조라는 인물에 대한 재평가의 움직임과 관련이 있는 현상이지요.

   요컨대, 진수의 정사(正史) 《삼국지》와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는 서로 분명히 다르고, 또 그 본디 성격상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것은 일종의 역사소설인 《삼국지연의》가 독자들한테 그만큼 매우 큰 영향력을 지닌 작품이기에 벌어지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한 마디로 너무너무 흥미롭고 재미있기 때문이지요.

   정사의 차원에서 《삼국지》를 재조명하려는 움직임이 의미 있는 작업이 되는 것도 결국은 이 탓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삼국지연의》가 재미없어서 독자들한테 외면받았다면 오늘날 이런 작업을 굳이 해야 할 필요도, 이유도, 가치도 없을 테니까요.

   하지만 어느 쪽이 사실이고, 어느 쪽이 왜곡된 것인가를 가리는 비판적인 시각의 역사학자로서가 아니라, 단순히 재미있는 소설을 읽고 싶어 하는 일반 독자로서는 《삼국지》의 전통적인 주안점, 그러니까 ‘촉한 정통론’에 입각하여 현덕 유비 3형제, 그리고 무엇보다도 공명 제갈량을 중심으로 《삼국지》를 읽을 때 가장 가슴이 뛴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습니다.     


매력적인 장수 조자룡

   하지만 누구를 중심으로 읽을 것이냐, 하는 것과 누가 가장 매력적인가, 하는 것은 그 성격이 서로 조금 다른 문제입니다.

   이 경우 《삼국지》 전체를 통틀어 그 차지하는 비중이라든가, 극적 역할이라든가, 심지어는 정사에 기초한 해석이라든가 하는 점에서 그리 무게가 많이 나가지 않는 인물인데도 가장 스마트하고 심플하며, 같은 남자들한테도 무지무지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인물은 뭐니 뭐니 해도 역시 조자룡입니다.

   ‘조자룡이 헌 창 쓰듯 한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창술의 달인이고, 전략적으로 후퇴를 하는 경우를 제외한다면 단 한 번도 전투에 패한 적이 없는 명장이며, 무엇보다도 유비의 아들 유선(아두)을 품에 안고 조조가 이끄는 백만 대군의 한가운데를 홀로 종횡무진 누비며 끝내 그 아기를 살려내고야 말았던 명장―.

   물론, 이 영화 〈삼국지:용의 부활〉에서는 조자룡이 아두 아기를 등에 업는 것으로 처리했지만, 실제 《삼국지》에서는 가슴에 안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이는 조자룡 역을 맡은 배우 유덕화의 실제 체격(174cm) 탓이 아닌가 싶습니다. 당시(중국의 삼국시대, 3세기 무렵) 사람들의 평균 신장이 그리 크지는 않았을 테니, 이 점을 고려하면 유덕화의 체격도 결코 작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아기를 가슴에 안고 백만 대군을 상대로 몸을 다이내믹하게 움직일 수 있으려면 실제 유덕화보다는 체격이 훨씬 더 커야 하지 않았을까 싶기는 합니다.

   그러니까 씨름으로 치면 백두장사, 권투로 치면 헤비급, 농구로 치면 센터까지는 아니어도 파워 포워드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하여튼, 그렇게 매력적인 캐릭터인 조자룡을 주인공으로 삼는 것은 《삼국지》를 영화로 만들 때 충분히 할 법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캐스팅도 마음에 듭니다. 물론 조자룡 역을 맡은 유덕화도 괜찮은 캐스팅이지만, 관우 역을 적룡에게 맡겼다는 것도 이인항 감독의 안목에 믿음이 가게 하는 선택입니다.

   조조도 그런대로 무난하고요.

   다만 장비의 경우는 조금 무게감이 떨어지지 않나 싶은 것이 제 느낌입니다. 분장도 장비 본연의 이미지와는 조금 동떨어져 보입니다. 무엇보다도 귀여운 맛이 많이 모자라서 아쉽습니다.

   특이한 것은 제갈량입니다.


제갈량이 먹는다!

   제갈량의 전통적인 이미지라면 어느 정도는 세상을 초탈한 신선의 풍모가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 나오는 제갈량은 분명 뛰어난 전략가이기는 하지만, 어딘가 다소 노회한 야심가에 가까운 이미지로 그려져 있다는 점이 좀 불만스럽습니다. 물론 동시에 이는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높이 평가하는 요소와 직결되는 특장이기도 합니다.

   이 글을 통해서 저는 바로 이 이야기를 하려는 것입니다.

   〈삼국지:용의 부활〉에서 제 눈길을 가장 강렬하게 사로잡은 것은 두 장면이었습니다. 하나는 초반부 조조 군과의 전투를 앞둔 유비 군에 전술 지시를 하러 파견되어 온 제갈량의 모습입니다.

   그는 먹고(!)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게걸스럽게요.

   세상에, 이것이 이 영화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제갈량의 모습이라니요?

   저로서는 감히 제갈량을 이런 꼴로 처음 등장시킬 발상을 했다는 자체가 놀라웠습니다.

   한데, 저는 이 장면이 너무너무 마음에 듭니다. 심지어 감동적이었다고까지 말하고 싶은 정도입니다.

   그는 먹습니다. 아니, 그도(!) 먹습니다. 그것도 걸신들린 듯 아귀아귀 ‘처먹지요’.

   구경꾼처럼 모여든 병사들이 빙 둘러서서 그를 대놓고 쏘아보는데도 제갈량은 작전계획을 하달하러 온 군사(軍師)다운 위엄과 체면 따위는 안중에 없는 모습입니다. 그저 한쪽 손으로는 그릇을 단단히 받쳐 들고, 다른 쪽 손으로는 젓가락을 열심히 놀려대며 그야말로 허겁지겁 밥을 자기 입에 연신 밀어 넣고 있을 따름입니다.

   아마도 우리 고전소설 《춘향전》에서 한밤중에 암행어사 신분을 속인 채로 춘향모인 월매를 찾아온 이몽룡이 ‘밥아, 너 본 지 참 오랜만이구나!’ 하며 사흘 굶은 거지처럼 밥을 ‘처먹을’ 때의 모습이 이렇지 않았을까 싶을 만큼, 제갈량은 지금 분명히 한눈팔지 않고 열심히 먹고 있습니다. 아니, 먹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장면에서 이 영화의 방향은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제갈량의 또 다른 실체

   제갈량은 이 영화에서 더는 촉나라에 충성을 다하는 위대한 정치가나, 적벽대전을 승리로 이끈 천하제일의 전략가나, 학창의(鶴氅衣) 차림에 사륜거(四輪車)를 타고 백우선(白羽扇)을 슬슬 부쳐대며 여유로운 신선의 풍모를 뽐내는 그 거룩하고 고매한 일국의 승상(丞相)이 아닙니다.

   그는 오로지 전투를 승리로 이끌 온갖 전략 전술을 짜내는 명민(明敏)한 책사(策士)나 모사(謀事)꾼에 지나지 않습니다.

   물론 이것도 분명히 ‘영화스럽게 어루만진’, 곧 얼마간 왜곡된 이미지라고 해야겠지만, 어쩌면 바로 이것이 오히려 역사적인 실체에는 더 가까운 진실한 일면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생각해 보면, 정말로 그렇지, 아니, 그러해야 하지 않았을까요.

   단 한 번의 실수로도 목숨을 잃는 것은 물론이고, 숫제 나라가 망할 수도 있는 그 절체절명의 살벌한 전시(戰時) 상황에서 이 영화가 그려내는 것과 같은 거칠고 강인하고 실용적인 아우라가 넘치는 모습의 제갈량이 아니라면, 과연 어떻게 전략전술가로서 그 엄청난 심리적 압박을 감당해 낼 수 있었겠는가, 하고 고개가 끄덕여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제갈량을 글공부나 하는 조선시대의 이상주의적인 유약한 선비, 샌님의 이미지로 이해하는 것은 정말 무지의 소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전쟁에서는 무조건 이겨놓고 봐야 합니다. 따라서 온갖 교활한 속임수와 치졸한 술수도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라면 조금도 마다하지 않을 줄 알아야 진정한 전략전술가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바로 이 점에서는 이 영화에서 그리고 있는 제갈량의 모습, 또는 이미지는 참 그럴싸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창술의 달인 조자룡

   물론 동시에 똑같은 이유에서 아쉽기도 하지만, 이것은 이 영화의 주인공이 제갈량이 아니라 조자룡이라는 점에서 어느 만큼은 속절없는 설정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제갈량을 중심으로 《삼국지》를 읽는 것과 조자룡을 중심으로 《삼국지》를 읽는 것은 서로 매우 다른 체험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은 전쟁의 전체 판세를 가늠하며 치밀한 전략 전술을 짜내야 하는 최고위 지도자이고, 또 한 사람은 그 전략 전술에 입각하여 최선봉에서 적군을 무찔러야 하는 장수이기 때문입니다.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바로 여기에 제가 이 영화에서 제 눈길을 끈 또 하나의 장면을 꼽는 이유가 놓여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박진감 넘치는 싸움의 장면은 조자룡이 조조 군과 벌이는 전투가 아닙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제 심장을 가장 높은 박동수로 뛰게 하는 조자룡의 싸움 장면은, 다시 말하면, 그가 눈부신 창 솜씨를 과시하는 장면은 바로 유비와 제갈량이 지켜보는 앞에서 홀로 장비와 관우에 맞서 대련(對鍊)하는 장면입니다.

   여기서 천하의 맹장이자 명장인 관우와 장비는 둘이 합세해서도 결코 조자룡을 이기지 못합니다.

   관우의 청룡언월도와 장비의 장팔사모는, 마치 예전에 여포와 유비 3형제가 1대 3의 대결을 벌였을 때 유비 3형제가 여포 한 사람을 이기지 못했던 것처럼, 조자룡 한 사람을 당해내지 못합니다.

   문제는 다음 장면입니다.     


조자룡이 먹는다!

   유비는 이 싸움을 얼마간 지켜보다가 그들 셋 가운데 누구 하나가 다치기 전에 적절한 타이밍으로 나서서 말립니다. 그리고 조자룡에게 친히 자신의 갑옷을 내어주며 아들 유선(아두)을 구해오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이제 조자룡은 마침내 조조의 백만 대군 속으로 홀로 뛰어들려는 즈음입니다.

   한데, 출정을 준비하며 유비가 하사한 갑옷을 갖추어 입는 장면에서 조자룡은, 마치 앞서 제갈량이 아귀아귀 밥을 처먹었듯이, 역시 먹을 것을 제 입에 두 볼이 터질 듯 욱여넣기부터 합니다.

   역시 제 마음을 깊이 울리는 장면입니다.

   유덕화의 두 볼이 먹을 것을 마구 처넣은 바람에 한주먹만큼씩이나 보란 듯이 튀어나와 있는 이 장면은 그 어떤 영화에서도 본 적이 없는 명장면이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왕가위의 〈아비정전〉(1990)에서 유덕화가 한밤중에 순찰을 돌다가 장만옥이 지켜보는 앞에서 오렌지를 만두처럼 한 조각씩 차례차례 입속에 집어넣고 씹어먹던 그 ‘아름다운’ 장면 이래, 먹는 행위 또는 먹는 연기로 제 마음을 이만큼 깊이 울린 장면이 또 있었나, 싶기까지 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전쟁이란 결국 ‘먹는 일의 연장’이라는 것입니다.

   제갈량이 유비군 진영에 그냥 불쑥 나타나 고고한 자세로 멋지게 전술 지시를 했더라면, 또 조자룡이 유비의 명을 받자마자 다짜고짜 멋지게 창을 집어 들고 말에 올라타 조조 군을 향해 득달같이 달려 나갔더라면, 아마 이 영화는 제 기억 속에 그리 오래 남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갈량과 조자룡이 전투를 앞두고 무엇보다 먼저 먹었다는 사실, 그것도 체면 불고(不顧)하고 아귀아귀 처먹었다는, 이 엄연하고 정연한 사실을 보여준 이 두 장면만으로도 저는 이 영화를,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듯이, 앞으로도 두고두고 오래도록 기억할 것 같습니다.     


멋지게 '처먹는' 제갈량과 조자룡

   최근의 전쟁 영화들이 전투 상황의 사실성을 극대화할 요량으로 온갖 끔찍한 살상 장면들을 마구잡이로 보여주는 경향으로 흐르고 있는 것은 과거의 낭만적인(!) 전쟁 영화들에 견주어 분명 나름의 장점과 진정성을 확보할 수 있는 효과적인 전략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어떤 전쟁 영화들에서도 이 영화의 제갈량과 조자룡처럼 전쟁터에서 먹는 문제의 절절함을 이토록 도저하면서도 감동적인 방식으로 보여준 영화는 없었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이 감흥은 그 먹는 행위의 주체가 하필이면 《삼국지》 전체를 통틀어 가장 스마트하고 쿨한 캐릭터라고 할 수 있는 두 인물 제갈량과 조자룡이라는 사실에 기인한 것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바로 이 점이 이 영화 〈삼국지:용의 부활〉의 가장 남다르고 유니크한 점이라는 데 이의가 없습니다.

   제갈량과 조자룡이 먹는다! 그것도 게걸스럽게 아귀아귀 처먹는다!

   저는 이 설정, 이 통찰이 참 마음에 듭니다.  *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