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더 마인호프〉 &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
C18. 뜨거운 저항과 차가운 저항 - 울리 에델, 〈바더 마인호프〉(2008) & 수오 마사유키,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2007)
어처구니가 없을 만큼 너무나 대조적인 두 개의 법정 풍경입니다. 법정이 이렇게나 서로 다를 수도 있는 것이라면, 도대체 법정에서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누구라도 막을 길이 없지 않을까요.
뜨거운 법정
한쪽에 나란히 포진한 법관들이 법복 차림을 하고 있지 않았다면, 그곳을 법정으로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기나 할까, 싶습니다.
그들은 피고인으로서 변호사와 검사, 그리고 판사한테서 질문을 받거나 추궁을 당하지 않습니다. 아니, 그것이 설사 정말 질문이고 추궁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받는다’거나 ‘당한다’는 느낌과는 아무래도 거리가 멉니다. 그들은 흡사 무슨 학술 세미나를 벌이고 있는 것처럼 보일 지경입니다.
그들은 법관들과 거의 차이가 없는 동등한 높이의 자리에(그 둘 사이의 거리도 물리적으로 충분히 멉니다) 나란히 앉아 두툼한 자료집을 각기 제 앞에 가져다 놓고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합니다. 판사의 제지에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판사를 대놓고 조롱하기까지 합니다.
아무도 그들을 막지 못합니다. 아니, 어쩌면, 막지 않습니다.
말의 잔치―. 그야말로 들끓는 법정, 뜨거운 법정입니다.
보고 있노라니, 저런 법정에서라면 한 번쯤 피고인으로 서보고 싶기까지 합니다.
차가운 법정
맨 꼭대기, 그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검은 법복 차림의 단 한 사람의 판사는 몹시도 아득해 보입니다. 흡사 만인지상의 절대자처럼 앉아 있네요.
하지만 그도 엄연히 신이 아니고 인간일진대, 도대체 그의 어디를 보고 그가 내리는 판결을 신뢰해야 한다는 것인지, 도대체가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한데,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 한마디에 가장 낮은 곳에 서 있는 한 왜소한 청년의 인생이 송두리째 뒤바뀔 운명입니다.
이 청년은 지금 바닥 모를 파멸의 깊은 수렁 속으로 걷잡을 수 없이 곤두박질치고 있는 참입니다. 그 스스로조차도 그렇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그것이 청년의 얼굴에 고스란히 다 드러나 있습니다.
관객은 판결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벌써 그의 딱한 운명이 내뿜는 가없는 몰락의 냄새를, 킁킁, 즉물적으로 맡을 수 있을 지경입니다.
피고인의 무죄 주장을 사람 좋아 보이는 웃는 얼굴로 조목조목 논박해 나가는 판사의 나지막하고 친절한 목소리는 소름이 끼칠 만큼 차디찬 기운으로 시퍼렇게 날이 서 있습니다.
그러는 판사 앞에서 한없이 졸아드는 피고인의 마음을 눈빛 하나로 온전히 다 드러내어 보이는 카세 료의 연기는, 참 역설적인 표현이지만, 그래서 더욱 눈부십니다.
사람이 초라하게 보일수록 눈부실 수 있다는 것은 아마도 영화에서나 목격할 수 있는 일이겠지요. 그 눈부심이 안 그래도 차갑디차가운 법정의 실내 온도를 갑절로 더더욱 차갑게 식혀줍니다.
뜨거운 저항
그들이 범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관객도 다 압니다.
심지어 그들은 자신의 소행을 조금도 숨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소행을 알아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그들이 누구이며, 그들이 어떤 일을 저질렀으며, 그들이 왜 그런 일을 저지르려 했는지를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알아주지 않으면 그들의 소행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소행으로 세상을 향해 무언가 발언을 하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받는 재판에서 진실의 규명이나 형량을 정하는 판결 따위는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들이 저지른 일을 부인하지도 않습니다. 좀 더 많은 사람이 그들이 그들의 소행으로 전하려는 메시지를 알아차리고 받아들이기를 바랄 뿐입니다. 따라서 이 경우 법정은 너무나 무력한 곳입니다.
도둑을 잡으면 그의 도둑질이 중단되고, 사기꾼을 잡으면 그의 사기가 중단되고, 연쇄살인범을 잡으면 그의 연쇄살인이 중단됩니다.
하지만 그들을 잡는다고 그들이 저지른 테러가 중단되지는 않습니다. 참 기묘한 딜레마입니다. 그들을 체포하지 않을 수도 없고, 체포한다고 그들의 테러를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들이 피고인으로 서 있는 법정이 한결같이 소란스러운 것은 이 딜레마 때문입니다.
이 딜레마 위에서 그들은 마음껏 하고 싶은 말들을 쏟아놓습니다.
상대가 느끼는 딜레마가 나의 저항을 돕는 형국이라고 하면 될까요.
그들에게 법정은 또 다른 저항의 장소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퍽이나 뜨거운 저항입니다.
차가운 저항
법정이 진실을 규명하고, 억울한 사람의 누명을 벗겨주는 곳이라는 우리네 평범한 사람들의 생각은 참 순진무구한 것인가 봅니다.
억울한 사람의 딱한 사정 따위에 법정은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그곳은 법관들에게 하나의 일터, 직장일 뿐입니다. 출세가 목표이며, 그러자면 어떻게 일을 해야 하는가가 중요할 따름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그곳의 주인입니다.
어쩌면 세상의 모든 일터, 직장이 흔히 그렇듯, 거기에서도 최후까지 살아남아 높은 자리에 오르는 사람은 아마도 능력은 있을지언정 어쩌면 가장 인정머리 없고, 약삭빠르며, 고약한 위인인지도 모릅니다.
그런 곳에서 이 가냘픈 청년이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것은 참으로 막막한 일로 보입니다. 아니, 그렇게 보일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그렇습니다.
그에게는 힘도 없고, 정의도 없고, 진실도 없습니다. 있다면 오로지 그 자신의 믿음뿐입니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
하지만 그 믿음은 참으로 위태로운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간에 떠도는 저 ‘혼자만 알고 있는 진실은 진실이 아니다’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진실을 알고 있지만, 그 진실이 그의 무죄 증명을 위해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그가 서 있는 법정은 권위로 피고인을 억압하기에 아주 좋은, 편리한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 곳에서 그는 자신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서, 또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하지만 그것은 한없이 초라한 저항이 될 뿐입니다. 그야말로 차갑디차가운 법정입니다. 그의 저항이 뜨거워지는 것을 그 냉정하기 짝이 없는 법정은, 당연히, 좀처럼 허락하려 들지 않습니다.
떳떳한 범죄
그들은 사람을 죽였습니다. 가차 없이 죽였습니다. 그것도 한두 사람이 아닙니다. 분명히 범죄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들의 범죄를 숨기지 않습니다. 그들은 떳떳합니다. 그것은 범죄가 아니라 저항이요, 저항의 표시였기 때문입니다. 그 저항이 정당하며 마땅한 것이라고 그들은 굳게 믿고 있는 것입니다.
법정에서도 그들은 당당합니다. 자신들을 심판할 권한을 가지고 있는 법관들 앞에서 그들은 결코 주눅 들지 않습니다. 그토록 떳떳한 그들의 저항이 어찌 뜨겁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떳떳한 범죄에 뜨거운 저항―.
한데, 정작 놀라운 것은 그 저항 자체가 아니라, 그 저항을 어떻게든 허락하고 있는 법정입니다.
그곳은 벌써 하나의 광장입니다. 뜨거운 햇볕으로 한껏 달구어진,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를 떠오르게 하는, 바야흐로 자유롭게 말의 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광장―.
떳떳하지 않은 범죄
세상에 떳떳한 범죄가 따로 있고, 떳떳하지 않은 범죄가 따로 있을 턱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의 범죄, 정확히 말하면 ‘그가 저지른 것으로 되어 있는’ 범죄는 ‘떳떳하지 않은’ 범죄입니다. 정말로 저질렀다면 무슨 수를 쓰든 감추려고 들었을 법한 범죄입니다. 부끄러우니까요.
그래서 실제로 대개는 그렇게 처리합니다.
변호사조차도 재판 과정이 지난(至難)하다는 이유로 피해자와 드러나지 않게 합의하기를 권할 정도입니다.
형량은 낮지만, 떳떳하지 않기에 대개는 숨기려 들게 마련인 범죄―. 바로 ‘지하철 성추행’입니다.
말만으로도 수치스러움을 느끼게 되는, 혹은 느끼게 하는 범죄입니다.
아마 그런 ‘떳떳하지 않은’ 범죄가 아니었다면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한 그의 저항도 차갑지 않고 뜨거웠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떳떳하지 않기에 결백을 주장하는 일조차 뜨거울 수 없는 곤혹스러운 처지―.
그러나 그래도 그는 저항을 포기하지는 않습니다. 도저히 그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뜨거울 수 없는’ 처지라 할지라도 자신이 짓지도 않은 죄를 지었다고 거짓 자백을 하고서 전과자가 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사람은 어떤 가혹한 역경도 다 견뎌낼 수 있지만, 억울한 일을 당하고서는 살 수 없는 법입니다.
물론 법정은 그의 차가운 저항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법정은 그의 저항보다도 훨씬 더 차갑습니다. 그곳은 하나의 밀폐 공간, 숨결조차 얼어붙을 것만 같은 차디찬 냉동고입니다.
심판의 주체
이제 심판의 주체라는 문제가 남습니다.
법정 안으로 들어온 사건이므로 심판의 주체는 당연히 법관이라는 생각은 유감스럽게도 순진한 것입니다.
떳떳한 범죄를 저지른 그들도, 떳떳하지 않은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몰려 있는 그도 법관의 심판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아니, 받아들이 수 없습니다.
그들도, 그도 자신에 대한 심판의 주체는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닌 그 누구도 나를 심판할 수 없다―.
이것이 그들의, 또 그의 생각이요 신념입니다.
그들은 너무나 떳떳하기에 그렇게 생각하고, 그는 너무나 억울하기에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런 국면에서 법이란, 또 법정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솟는 것을 어찌 막을 수 있겠습니까.
떳떳한 범죄에 대한 심판도, 억울한 사람에 대한 헤아림도 법은, 또 법정은 할 수 없습니다.
이렇듯 뚜렷한 기능과 구실의 한계를 지닌 것이 법이요 법정이라면, 인간은 아직도 한참 미개한 족속이요 종족인 셈입니다.
담배와 오니기리
〈바더 마인호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담배입니다. 흡연입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흡연합니다. 그 자체가 저항의 한 표시로 보일 지경입니다.
흡연이 저항의 한 표시이자 상징일 수 있었던 시대라고 하면 될까요.
하지만 지금 담배와 흡연은 자꾸 범죄에 가까운 이미지로 바뀌고 있는 듯합니다. 담배를 피우는 것은 이제 조금도 떳떳한 행위가 아닙니다. 흡연이 자유로운 공간은 계속 줄어들고 있습니다.
설사 흡연이 공식적으로 허용된 공간에서라고 할지라도 흡연자는 어딘가 모르게 주뼛거리게 됩니다. 하여 여기저기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레 꺼내어 들고 남모르게 불을 붙여야 하는 담배―.
흡연이 인체에 미치는 해독에 대해서라면 이제 더는 추가할 내용이 없을 지경으로 낱낱이 밝혀져 있는 상태입니다. 그 해독을 빌미 삼아 흡연은 이제 못된 짓, 떳떳하지 않은 짓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무런 저항의 의지가 없더라도 그저 흡연하는 것만으로도 그것이 어느 만큼은 절로 저항이 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본인의 적극적인 의지로 하는 저항이 아니기에, 이 저항은 참으로 초라한 저항이요, 무의미한 저항입니다. 세상이 이만큼 바뀐 것입니다.
아니, 바뀐 것은 세상이 아니라, 저항의 의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에서 문득 눈에 띄는 것은 오니기리입니다.
4개월 만에 세상으로 나온 카세 료는 참으로 오랜만에 들어간 식당에서 뜬금없이 주먹밥, 오니기리를 주문합니다.
어쩌다 동석한, 예전에 그의 애인이었던 여자만은 그의 그런 심정을 이해합니다. 집을 떠나서 오래 지내다가 돌아오면 우선 좋은 쌀로 지은 밥부터 먹고 싶은 법이라면서요.
바야흐로 자기 삶의 운명을 걸고 어렵디어려운 싸움을 시작해야 하는 이 애처로운 소시민 청년의 소망은 그렇듯 소박한 것입니다.
오니기리는 이 순간 참으로 애틋한 저항의 출발점이 됩니다.
겨우 오니기리에 기댈 수밖에 없는 이 평범한 청년 카세 료의 눈빛이 그 순간 어찌나 딱한지 콧날이 시큰해집니다.
그런 사람을 처벌하려는 의지를 버리지 않는 법과 법정과 법관의 냉혹함 앞에서 저는 그만 아득해지고 말았습니다.
이 아득한 기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습니다.
어쩌면 굳이 알고 싶지 않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벌써 가슴이 먹먹해져 오기 때문입니다.
천신만고 끝에, 그가 죄를 짓지 않았다고 증언해 줄 증인까지 나섰지만, 끝내는 바꿀 수 없었던 판결―.
도대체 그를 도와줄 힘과 방도가 우리네 소시민들한테는 없는 것일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