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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수 Jul 18. 2024

C17. 외아들을 유괴당한 여인들의 이야기

  - 〈체인질링〉 & 〈밀양〉

C17. 외아들을 유괴당한 여인들의 이야기 - 클린트 이스트우드, 〈체인질링〉(2008) & 이창동, 〈밀양〉(2007)

표기법의 난맥상

   ‘체인지링’도 ‘체인절링’도 ‘체인즐링’도 아닌 ‘체인질링’이 제목입니다. 일본의 두 번째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 《체인지링》과 한글 표기만 다르지 실은 똑같은 제목입니다.

   예전에 한동안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을 표기할 때 ‘조던’, ‘조단’, ‘조든’이 혼재되어 쓰였던 적이 있었지요. 지금은 ‘조던’으로 정리된 느낌이지만요. 예나 지금이나 외래어에 대한 우리말 표기법 정리는 아무래도 발 빠른 느낌은 아닙니다.


외아들을 유괴당한 여인들

   이 영화 〈체인질링〉은 저한테 또 다른 한 편의 영화를 머릿속에 자꾸만 떠올려줍니다. 바로 이창동 감독의 〈밀양〉(2007)입니다. 또는, 영화 〈밀양〉의 원작인 이청준 선생의 단편소설 〈벌레 이야기〉를 떠올려준다고 해야 할까요.

   아니, 어쩌면 다음과 같이 말하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체인질링〉을 보면서 〈밀양〉을 떠올리지 않기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적어도 저는 그랬습니다.

   〈체인질링〉을 그저 어린이 유괴 소재의 영화라고만 규정하면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2002)이나 〈친절한 금자씨〉(2005)는 물론이고, 박진표 감독의 〈그놈 목소리〉(2007)까지 싸잡아 언급해야 할 것입니다. 곽경택 감독의 〈극비수사〉(2015)는 이 영화들하고는 그 성격이 조금 다른 느낌이긴 하지만, 어쨌든 유괴 소재라는 점에서는 같지요.

   하지만 〈체인질링〉을 ‘자기 어린 외아들을 유괴당한 한 여인의 이야기’라고 규정하면 이와 견주어볼 영화는 단연 〈밀양〉입니다.

   그렇습니다. 〈체인질링〉은 〈밀양〉이 그렇듯이 자기 외아들을 유괴당한 한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게다가 〈체인질링〉의 안젤리나 졸리나 〈밀양〉의 전도연은 둘 다 약속이나 한 듯 남편 없이 홀로 된 여인들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같은 일을 겪는 여인들

   〈복수는 나의 것〉이 외동딸을 유괴당한 한 남자(송강호)의 이야기이고, 〈친절한 금자씨〉가 유괴에 일조했던 자신에 대한 죄책감과 유괴범(최민식)에 대한 복수심에 시달리는 한 여인(이영애)의 이야기이며, 〈그놈 목소리〉가 외아들을 유괴당한 부모(설경구와 김남주)의 이야기인 것과 견주어보면 〈체인질링〉은 그 기본 설정이 분명 〈밀양〉 쪽에 훨씬 더 가깝습니다.

   〈체인질링〉과 〈밀양〉 사이의 비슷한 점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아들을 유괴당한 그 두 여인의 삶의 궤적이나 형편은 그야말로 차이점이라기보다는 공통점이라고 하는 편이 더 어울릴 만한 것들 일색입니다.

   안젤리나 졸리는 아들을 유괴당하고 난 다음 〈밀양〉의 전도연처럼 기독교 쪽의 부름을 받습니다. 한 목사(존 말코비치)가 나타나 도움의 손길을 건네오는 것입니다.

   안젤리나 졸리는 어쨌거나 〈밀양〉의 전도연이 그랬던 것처럼 그 손길의 도움을 받습니다. 그 도움이 없었더라면 자칫 위험한 상황에 내몰릴 뻔하기도 하지요.

   목사 역의 배우가 하필이면 지금까지 그가 주로 맡았던 역할들―예컨대, 이 영화의 감독인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공연했던 〈사선에서〉(1993, 볼프강 페터센)의 대통령 암살범 역―로 미루어 선한 이미지와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이는 존 말코비치라서 이 사람이 과연 정의롭기만 한 인물인가, 정말 순수한 선의에서 안젤리나 졸리를 도우려는 것인가, 하고 자꾸 의심하게는 되지만, 어쨌거나 영화에서 그는 목사로서 안젤리나 졸리를 분명히 도와주는 구실을 합니다.

   게다가 〈밀양〉에서는 전도연을 ‘연모’―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유하 감독의 〈쌍화점〉(2008)에서 조인성이 대사 속에 ‘연모’라는 말을 인상적으로 쓴 바 있어서 기억에 남는 단어입니다―하는 남자가 있었듯이, 〈체인질링〉에서도 안젤리나 졸리를 ‘연모’하는 남자가 있습니다. 그것도 일편단심 줄기차게 이어지는 연모지요. 그리고 결국은, 아마도(!), 그 연모는 열매를 맺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공통점이 움직일 수 없는 무슨 증거처럼 여겨지는 것은 결국 단 하나의 압도적인 장면 때문입니다.     


영향 관계, 또는 데칼코마니

   안젤리나 졸리가 〈밀양〉의 전도연처럼 유괴범을 감옥으로 찾아가 면회하는 장면이 바로 그것입니다. 어쩌면 이토록이나 똑같을 수 있을까요. 유괴범이 내뱉는 말조차 그렇습니다.

   나는 회개하고 구원을 받았다!

   이 가공할 만한 뻔뻔스러움!

   잘 알려져 있다시피 〈밀양〉은 실화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인 이청준 선생의 단편소설 〈벌레 이야기〉가 원작입니다. 따라서 역시 실화를 다룬 〈체인질링〉과 마찬가지로 실화 기반이라 할 수 있겠지요. 그러니, 두 영화가 데칼코마니의 좌우 무늬처럼 절묘한 대칭을 이루는 것도 그리 이상한 현상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2008년 작인 〈체인질링〉과 2007년 작인 〈밀양〉이 서로 비슷한 영화라고 규정하는 것은 다소 섣부른 견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슨 리메이크나 표절을 한 것도 아닐 터인데, 싸잡아 ‘비슷하다’라고 평가하는 것은 온당치 않은 처사일 수도 있을 테니까요.

   그래도 제작 연도를 기준으로 따져볼 때, 〈체인질링〉보다 한 해 앞서 나온 〈밀양〉의 전도연 배우가 그해 칸 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함으로써 작품의 인지도가 세계 영화계에서 큰 폭으로 올라간 점으로 미루어 보면 얼마간 ‘참조’가 있었을 수도 있겠다는 ‘뇌피셜’ 류의 추측은 해봄 직하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이 공통점을 굳이 공통점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 또한 억지라는 생각도 제 마음속 한구석에 분명히 자리 잡고 있음을 부정할 길은 없습니다.

   어쩌면 이런 식의 견주어보기야말로 관객으로서 영화를 보는 숱한 즐거움들 가운데서도 가장 뿌리치기 힘든 즐거움의 하나가 아닐까요.

   하지만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은 이 가공할 만한 만남, 유괴범과 그 유괴범한테 외아들을 유괴당한 어머니 사이의 이 무시무시한 만남을 기점으로 마침내 〈밀양〉과는 확실히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합니다.

   바로 여기에 〈체인질링〉의 주제가 걸려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희망, 그리고 배려와 위로

   한마디로, 안젤리나 졸리가 찾는 것은 ‘희망’입니다. 그것은 아들이 아직 살아 있으리라는 믿음이지요.

   안젤리나 졸리는 1928년 당시의 여성으로서는 썩 이성적이고, 생활력도 있고, 의지도 있는 인물입니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아들이 정말로 살아 있다고 믿기는 아무래도 어렵다는 사실을 자신의 지성으로 판단하지 못할 턱이 없습니다.

   그러나 안젤리나 졸리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아들이 어디엔가 반드시 살아있으리라는 믿음을 끝까지 버리지 않는 것이지요. 이것을 단순히 맹목적인 모성애의 발로로만 치부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애써 지나치게 종교적인 결말을 끌어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 또한 〈밀양〉과는 다른 점입니다.

   안젤리나 졸리가 찾고 있었던 것이 ‘아들’이라기보다는 ‘희망’이라는 사실은 이 대목에서 비로소 의미를 얻습니다. 희망이 있는 한 인간은, 어쨌거나,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요.

   〈밀양〉도 마지막 순간 한없이 가늘디가늘지만, ‘매우 시각적으로’ 분명한 희망의 빛을 보여줍니다. 물론 그 희망은 얼마간, 아니, 상당한 농도의 종교적인 빛깔이 섞인 희망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체인질링〉의 즉물적인 희망과는 결이 조금, 아니, 사뭇 다르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면서도 두 영화 모두 세상에 그보다 더할 수는 없는 참담한 일을 겪고 깊디깊은 절망에 빠진 두 여인에게 모두 새로운 사랑이라는 희망의 끈 하나를 살며시 묶어두는 ‘비슷한’ 배려, 또는 위로를 해준다는 점에서 절묘하게 한데 얽힙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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