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슬기, 〈다섯은 너무 많아〉
C16. 가족, 그 행복한 모둠 살이 - 안슬기, 〈다섯은 너무 많아〉(2005)
감상 포인트, 대안 가족
장편 극영화 한 편의 주제를 단 한마디로 요약하거나 규정하는 것은 어쩌면 어리석은 일인지도 모릅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수많은 층위의 주제들을 탐사하는 즐거움을 빼앗는 일이 되기 십상일 터이니까요.
하지만 가장 주의를 기울여 따져보지 않을 수 없는 유난히 두드러진 주제는 있게 마련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 영화는 실패작이거나, 실패한 시나리오가 아닐까요.
〈다섯은 너무 많아〉는 이 점에서 실패하지 않았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무엇보다도 ‘대안 가족’ 이야기임이 너무도 명백하기 때문입니다. 굳이 샛길로 빠져볼 필요성을 느낄 수 없을 만큼 철저하게 그러합니다. 강점이지요.
이런 경우 주제는 가장 중요한 감상 포인트가 되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이 영화가 그려 보여주는 대안 가족이 어떤 성격의 것인가를 파악하는 일이 이 영화 감상의 핵심 과녁이 아닐까, 싶습니다.
가족 신화의 위험 또는 허위
지금은 21세기입니다.
가족을 그저 강조하기만 하는 것은 이제 더는 의미가 없습니다.
조금 과장하면 위험하기까지 합니다.
그 가족이 가족 구성원 모두에게 행복한 보금자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고, 누구도 그렇다고 강변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가족은 지금껏 언제나 찬양의 대상이었고, 지금도 어지간히 그렇습니다. 마치 가족이라는 틀을 유지하는 것이 곧 행복의 비결이라도 된다는 듯이, 혹은 천형처럼 땅을 짊어지고 있다는 저 그리스 신화의 아틀라스처럼, 가족이 온 세상을 망하지 않게 지탱해 주는 유일한 버팀목이라도 된다는 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이 어쩌면 거대한 허위일 수도 있다는 것을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아니면, 적어도 가족의 신화를 맹신하지는 않는 듯합니다. 행복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가족이라는 겉모양을 무작정 유지하는 것은 이제 무의미하다는 점에 대체로 동의하는 기류인 것 같습니다.
이는 불행의 근원이 되는 부부관계를 미련하게 지속하는 일이 무의미한 것과 전혀 다르지 않은 사태입니다.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이혼이나 가족의 해체를 조장하려는 목적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행복이 지상(至上)의 과제는 아닐 테지만, 적어도 불행한 관계는 그것이 어떤 관계든 먼저 그 자체의 존재 의미나 가치부터 진지하게 재고해 볼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가족이라는 틀을 유지하는 데에 흔히 어머니로 대표되는 가족 구성원 누군가의 일방적인 헌신과 희생이 결정적인 이바지를 해 온 것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임을 감안하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이 역시 오해해서는 곤란합니다. 희생이라는 미덕의 가치를 폄훼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행불행과 무관하게 가족이라는 겉모양만을 유지하기 위하여 누군가가 스스로를 희생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는 신분제 사회의 종언과 더불어 시효가 끝난 지 벌써 오래가 아닌가, 하는 점을 지적하려는 것입니다.
전통적인 의미의 가족이라는 철옹성이 튼튼하게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 결국은 누군가의 희생을 바탕으로 해서였음을, 혹은 온 가족 구성원 나름 나름의 크고 작은 자기희생이 가족이라는 외형의 틀을 유지해 온 숨은 비결이었음을 그 누가 감히 부정할 수 있을까요.
행복한가, 행복하지 않은가
하지만 이렇게만 말해놓으면 가족을 혈연공동체라는 좁은 의미의 외형적 틀 안에 가두는 격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무어니 무어니 해도 역시 행복의 여부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시대는 바뀌었어도 여전히 행복의 근원으로서 ‘가족’을 제일 먼저 떠올리게 되는 것은 아무래도 속절없는 일입니다.
여기서 가족이라는 말의 개념을 확장할 필요가 생깁니다.
그러니까 ‘혈연과 혼인 관계 따위로 한집안을 이룬 사람들의 집단’이라는 삭막한 사전의 풀이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벌써 예전에 한창 인구에 회자되는 과정을 거쳐서 이제는 너무도 익숙한 말 또는 개념이 되어 있는 ‘대안 가족’이 힌트입니다.
이는 ‘대안’ 가족이라도 만들어야 할 만큼 인간이란 본원적으로 가족을 필요로 하는 존재임을 일깨우는 참 도저한 명칭 아니겠습니까.
가족으로 말미암아 불행한 사람은 있어도 가족이 없는데도 행복한 사람은 드문 것이 현실임을 고려하면, 가족은 어쩌면 부정하기 힘든 인간의 조건이라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따라서 문제는 어떻게 행복한 가족을 꾸릴 것인가, 곧, 어떤 구성원들로 어떻게 그 ‘가족’이라는 것을 꾸려야 하겠는가입니다.
그 한 흥미로운 ‘대안적’ 사례를 우리는 이 영화 〈다섯은 너무 많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가족이 이루어지는 과정
영화는 바야흐로 가출 중인 고2 남학생 동규(유형근)가 꾸는 자기 가족에 대한 의미심장한 악몽으로 시작합니다.
이 느닷없는 꿈 장면은 동규에게 가족이 어떤 의미인가를, 그것도 먹는 행위와 관련하여, 끔찍한 괴물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통해서 알려줍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어둡고, 궁핍하고, 더럽고, 그래서 견딜 수 없을 만큼 짜증이 나는 이미지입니다. 한 마디로, 동규에게 가족은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어디 한 군데 정 붙일 곳 없는, 말 그대로 숨 막히게 고약한 증오의 소굴인 셈입니다.
이야기는 이 동규가 보이는 일련의 행적들을 기둥 삼아 생면부지의 사람들 넷이 차례로 얽혀드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모이는 장소는 동규의 집이 아니라, 혼자 사는 도시락 가게 여점원 시내(조시내)의 비좁은 단칸 셋방입니다. 동규로부터 시작한 이야기가 시내의 집을 중심 공간으로 펼쳐지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제일 먼저 동규가 시내의 집에서 더부살이를 하기 시작하고, 여기에 라면집에 불법취업을 하여 종업원으로 일하다 쫓겨난 조선족 여인 영희(최가현)가 합세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문제의 라면집 주인이자 이 영희를 사모하다 라면집이 망해 하루아침에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된 사내 만수(김도균)가 얹혀살러 들어옵니다.
이로써 넷입니다.
이들은 말 그대로 함께 모여서 ‘삽니다’. 이 과정의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러닝 타임의 대부분을 채웁니다.
우스꽝스럽고 아기자기합니다. 그리고 따뜻합니다.
이 얽힘의 과정에서 이야기 구조상의 논리적 필연성을 찾고자 애쓰는 것은 부질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들 각자의 면면, 특히 공통점입니다.
의미 없는 가족을 떠나온 이들의 모임
시내는 가족한테서 떨어져 나와 살고 있으며, 현재 자기 어머니와 심각한 불화 상태라는 점에서 동규와 같은 처지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시내의 어머니는 딸을 자기 인생의 짐이자, 기껏해야 살림 밑천 정도로 밖에는 여길 줄 모르는, 그야말로 전근대적인 의식에 깊이 젖어 있는 구제 불능의 위인입니다. 그 구제 불능의 느낌이 어느 정도냐 하면, 객지에 나와 경제활동을 하는 딸로서 자기 시골집에 다달이 일정액의 돈을 부치는 시내의 그 갸륵하고 눈물겨운 성실함조차 위선으로 느껴질 만큼입니다.
조선족 여인 영희 또한 가족들과 떨어져 ‘타국’인 대한민국에서 홀로 지내며 불법취업자라는 위태로운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만수는 어떨까요? 보잘것없으나마 나름대로 최소한의 삶의 방편이 되어주던 허름한 라면집을 하루아침에 잃고 길바닥에 나앉은 노총각 신세니, 역시 나머지 셋과 동병상련의 처지에서 더도 덜도 아닙니다.
한마디로, 이들 넷에게 가족이라는 혈연공동체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어쩌다’ 한데 모여 ‘가족으로’ 함께 사는 것입니다.
암담한 조합이지요.
하지만 영화는 더불어 사는 이들의 모습을 암담한 이미지로 그리지 않습니다.
‘너무 많아’ 보이지 않는 가족의 행복
이들을 바라보는 영화의 시각이나 태도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이들은 처음으로 행복을 맛보는 중입니다. 그것도 가족으로 말미암은 행복이요, 명실상부, 가족 구성원으로서만 느낄 수 있는 행복입니다. 모름지기 가족이란 이런 것이어야만 한다는 의미의 가족이라고 하면 될까요.
이 느닷없는 모둠 살이에는 일반적인 성역할을 뛰어넘어, 아버지도 어머니도 누나도 남동생도 언니도 여동생도 오빠도 다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새로 생긴 어린 조카까지 끼어들어 마침내 다섯을 이룹니다. 사랑의 결실이지요.
이로써 가족이라는 이미지, 그 특유의 모양새가 훌륭하게 완성된 셈입니다.
숫자에 꼭 무슨 의미를 두고 싶지는 않지만, 돌이켜 보면, 부모와 1녀 2남으로 이루어진 5인 가족, 부모와 1녀 1남으로 이루어진 4인 가족, 딸 아들 구별 없이 부모와 1자녀로 이루어진 3인 가족이 각기 시대별로 이상적인 가족 구성원이라 여겨지던 과정을 거쳐서 오늘에 이른 느낌이 분명하게 있지 않습니까.
어쩌면 ‘이상적인’ 가족 구성원의 수라는 개념이 더는 무의미한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인데, 여러분은 어떠신지요?
아무튼, 그들 가족 다섯은 이제야 비로소 정말 행복해 보입니다.
현실적으로 따지면 암담하기 그지없는 인물들의 조합이지만, 그것이 결코 암담하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이 행복은 보는 이에게서 시샘에 가까운 부러움조차 불러일으킵니다.
제목의 ‘너무 많아’는, 이 영화의 태도를 그대로 따른다면, 적어도 결코 고통스러운 절규가 아닙니다. 오히려 즐거운 비명이자, 동시에 귀여운 투정에 가깝습니다. 이 점이 영화의 마지막 대목에서 비로소 명확해집니다.
여기서 ‘그래도 혹시나?’ 하는 심술궂은 노파심을 굳이 발동시킬 필요가 있을까요. 그들이 지금 행복하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 아니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