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밤 그리고 도시〉 & 〈밤 그리고 도시〉
C15. 수다쟁이와 찌질이의 매혹적인 몰락 - 줄스 다신, 〈밤 그리고 도시〉(1950) & 어윈 윙클러, 〈밤 그리고 도시〉(1992)
많은 대사
로버트 드 니로가 출연한 영화들 가운데서 어윈 윙클러 감독의 〈밤 그리고 도시〉를 저는 꽤나 좋아합니다. 제가 이 영화를 특별히 좋아하는 데는 까닭이 있습니다. 바로 로버트 드 니로의 대사(臺辭) 읊는 솜씨 때문입니다.
일종의 ‘배우론’ 또는 ‘연기론’이라고 할 수도 있을까요.
아주 구체적으로 저는 로버트 드 니로의 입에서 나오는 ‘말’ 자체를 좋아합니다. 말 그대로 ‘말’입니다. 어떤 내용의 말이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단지 그가 입을 벌려 쏟아내는 ‘말소리’ 자체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의 목소리, 그의 억양, 심지어 말할 때의 그 입 모양까지―.
어떤 배우는 말할 때보다는 입을 다물고 있을 때 더 매력적이지만, 저는 침묵하는 로버트 드 니로보다는 대사 읊는 로버트 드 니로를 더 좋아합니다. 이따금 저는 로버트 드 니로가 나오는 영화를 눈으로 보지 않고 귀로 듣기만 합니다. 예전에 한번은 그걸 녹음해서 들은 적도 있지요. 그의 목소리, 그의 말소리를 ‘즐기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배우를 통틀어 입에서 나오는 말소리로 저를 매혹시키는 배우는 오직 로버트 드 니로뿐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만큼 저는 그의 대사 듣는 것을 좋아합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 이것만은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로버트 드 니로의 대사를 듣고 있노라면 문자 그대로 ‘귀 호강’이라는 말이 실감 나거든요.
그러니까 제가 어윈 윙클러의 〈밤 그리고 도시〉를 좋아하는 것은 바로 이 영화에 로버트 드 니로의 대사가 다른 어느 영화들에서보다도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입니다.
물론, 러닝 타임이나, 그가 얼마나 화면에 많이 등장하느냐의 차이도 있으니까 정확하게 그렇다고 장담하기는 섣부른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화면 속에 로버트 드 니로가 있을 때 〈밤 그리고 도시〉에서보다 그의 대사가 더 많이 들려오는 영화를 저는 본 기억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이 영화는 로버트 드 니로의 대사로 가득 차 있는 참 드문 영화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빠른 대사
게다가 이 영화에서 로버트 드 니로의 대사는 그저 대사이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주 빠른’ 대사입니다. 그야말로 속사포 같지요.
물론 그저 등장인물들이 쉴 새 없이 떠들어대는 모습을 원한다면 우디 앨런의 영화를 보면 되겠지요.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로버트 드 니로는 우디 앨런 영화에 나온 적이 없습니다. 적어도 제 기억에는 그렇습니다.
역시 시끄럽고 수다스럽게 줄곧 떠들어대는 등장인물들로 특징적인 감독 쿠엔틴 타란티노의 〈재키 브라운〉(1997)에는 나온 적이 있지만요.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재키 브라운〉에서 로버트 드 니로는 조금 ‘모자란’ 캐릭터로 나옵니다. 그래서 ‘속사포 같은’ 대사 읊는 솜씨를 제대로 맛보기는 아무래도 어렵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시점에서 로버트 드 니로의 맹렬한 대사 읊는 솜씨를 맛보고 싶다면 어쨌거나 어윈 윙클러의 〈밤 그리고 도시〉를 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어째서 IMDB를 포함하여 각종 매체에서 이 영화를, 혹은 이 영화의 주인공인 로버트 드 니로를, 그리고 그가 맡은 해리 파비안이라는 인물을 소개하는 문구로 ‘fast-talking’이라는 말을 빠트리지 않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버전의 〈밤 그리고 도시〉
어윈 윙클러의 〈밤 그리고 도시〉를 처음 보았을 때 로버트 드 니로를 빼고 가장 제 관심을 끌었던 것은 감독 어윈 윙클러도, 상대 배우 제시카 랭도, 원작자 제랄드 커쉬도 아니었습니다. 바로 줄스 다신 감독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프레디 머큐리가 그 특유의 ‘장쾌한’ 창법을 마음껏 과시하여 부른 노래인 ‘The Great Pretender’를 배경으로 떠오르는 이 영화 엔딩 자막 제일 첫머리에 ‘dedicated to Jules Dassin’이라는 헌사(獻辭)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알고 보니, 똑같은 소설을 원작으로 줄스 다신 감독이 1950년에 만든 또 하나의 〈밤 그리고 도시〉가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저는 당연히 어윈 윙클러의 〈밤 그리고 도시〉가 줄스 다신의 〈밤 그리고 도시〉의 리메이크라고 생각했지요.
한데, 나중에 줄스 다신의 〈밤 그리고 도시〉를 보고 나서 저는 리메이크라는 생각을 버렸습니다. 아니, 버릴 수밖에 없었지요. 줄스 다신의 〈밤 그리고 도시〉와 어윈 윙클러의 〈밤 그리고 도시〉는 서로 너무나 다른 영화였기 때문입니다.
우선은 몇 가지 기본적인 사항들이 죄다 다릅니다.
다신의 영화는 그 배경이 영국이고, 윙클러의 영화는 그 배경이 미국입니다.
다신의 영화는 흑백이고, 윙클러의 영화는 컬러입니다.
윙클러의 영화에는 나오지 않는 인물이 다신의 영화에는 나옵니다. 그래서 극 전개상 중요한 구실을 하지요.
다신의 영화에서 부자(父子) 관계였던 두 인물이 윙클러의 영화에서는 형제(兄弟) 관계로 나옵니다. 그래서 이야기의 정조(情操)가 서로 매우 다릅니다.
또, 다신의 영화에서는 레슬링이고, 윙클러의 영화에서는 권투입니다. 레슬링과 권투의 차이가 고스란히 정서의 차이로 드러납니다.
다신의 영화는 결말이 명백한 비극이고, 윙클러의 영화는 비극을 가까스로 면합니다.
다신 영화의 주인공인 리처드 위드마크는 윙클러 영화의 주인공인 로버트 드 니로만큼 수다쟁이가 아닙니다. 대신 ‘찌질이’입니다. 아니면, ‘찐따’라고 해야 할까요?
그러니, 리메이크 운운할 여지가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둘은 명백히 ‘서로 다른’ 영화입니다.
참 재미있는 것은 이게 끝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원작과의 거리
처음에 저는 다신의 영화와 윙클러의 영화가 서로 이토록이나 다른 까닭이 줄스 다신이 어윈 윙클러보다 더 예술적이고, 더 작가주의적인 감독인 탓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다신의 영화를 보고 나면 정말 그런 생각이 듭니다.
대단하다고 속으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다신의 영화는 굉장한 드라마의 힘, 화면의 힘으로 보는 사람을 휘어잡습니다. 역시 필름 누아르의 걸작 〈리피피〉(1955)의 감독답다 싶습니다.
하지만 다신의 〈밤 그리고 도시〉 DVD에 수록된 부가 영상에서 이 영화에 대한 그의 코멘트를 확인하고 저는 역시 제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습니다.
거기서 줄스 다신 감독은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은 이 영화의 원작을 읽어보지도 않았다고요. 그야말로 시나리오만 가지고 ‘제 멋대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원작자의 심기가 매우 불편했다는 후문이 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다신의 영화와 윙클러의 영화를 모두 보고 나면 원작자가 그럴 만도 했겠다 싶은 생각이 듭니다. 너무도 다르니까요.
이 점에서는 윙클러의 영화가 제랄드 커쉬의 원작에 더 충실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제랄드 커쉬가 그렸던 해리 파비안이라는 인물은 리처드 위드마크보다는 로버트 드 니로에 더 가깝다는 뜻입니다.
위태로운 남자들
두 영화에서 리처드 위드마크와 로버트 드 니로는 모두 어딘가 좀 위태로워 보이는 남자들입니다. 하지만 그 위태로움의 성격은 사뭇 다릅니다.
그래도 그저 꿈이라고만 하고 말기에는 아무래도 현실적인 느낌이 강한 어떤 목표를 향해 동분서주한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성격 자체가 서로 상당히 다른 인물들입니다.
리처드 위드마크는 욕심도 많지만, 또 그만큼 정(情)도 많은, 그래서 어딘가 모르게 연약하고 철없는 외아들 이미지라서 어떤 일을 해도 내내 무모하다는 느낌이 앞섭니다.
반면, 로버트 드 니로는 제법 산전수전을 다 겪어 나름의 수완을 갖추고 있는 자수성가형 인물의 느낌이 나서 내내 위태로우면서도 어쩐지 결국에는 목표를 달성해낼 것만 같은, 그래도 어지간히 믿음이 가는 인물입니다.
이런 점을 근거로 저는 리처드 위드마크는 ‘찌질이’라고, 로버트 드 니로는 ‘수다쟁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아니, 규정하는 것이지요. 찌질이나 수다쟁이나 미덥지 못하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지만, 그 내용은 아무래도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찌질이와 수다쟁이
찌질이의 특징은 무슨 일을 하든 우선 남에게 매달리고 본다는 점입니다. 스스로 이것저것 자꾸 일을 벌이기는 하지만, 기어이 남의 힘에 기대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점에서 찌질이인 것이지요.
아닌 게 아니라, 리처드 위드마크는 다신의 영화에서 정말 딱하리만큼 애처롭게 이 사람 저 사람한테 구걸하듯 매달립니다. 이런 위인한테서 목표 달성의 기미를 읽어낼 사람은 아마 드물지 않을까요. 오히려 믿을 수 없다는 생각에 의심과 경계심만 더 굳어지겠지요.
결국 리처드 위드마크는 그가 매달리는 사람들한테서 신뢰를 얻어내는 데 실패합니다. 당연히도 이는 그 자신의 몰락으로 이어지지요.
물론 로버트 드 니로도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며, 그 누군가에게 손을 내민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일종의 투자 유치의 성격이 강합니다. 그는 현실성 있는 계획으로 상대방을 설득하는 자세를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지나쳐 상대방을 속이고 기만하는 단계까지 나아가는 것은 유감이지만, 그것은 그가 수다쟁이라는 점과 관련이 있습니다.
수다쟁이는 한마디로 ‘말이 많은’ 사람 아닙니까.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옛말도 있듯이, 세 치 혀를 놀려 얼마든지 상대방을 설득하고, 나아가 속이거나 기만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아무리 현실에서 실현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좋은 계획을 품고 있어도 말로 상대방을 감화시키고 설득해 내지 못한다면 그 뜻을 이루기 어렵다는 점을 감안하면 찌질이보다는 역시 수다쟁이 쪽이 낫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수다쟁이의 단점과 장점
문제가 되는 것은, 수다쟁이는 말이 지나쳐서 스스로조차 그 말의 힘에 현혹당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스스로 자기 말에 도취되어 자칫 멈추어야 할 지점을 지나쳐서 너무 많이 나아가버리고 만다는 것이지요.
로버트 드 니로는 바로 이 때문에 실패의 멍에를 뒤집어쓰게 됩니다. 이것이 대책 없는 수다쟁이의 운명이라고 하면 될까요.
로버트 드 니로의 쉴 새 없는 지껄임은 처음에는 그의 수완을 증명하는 근거의 구실을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오히려 그에 대한 신뢰를 반감시키는 작용을 하게 됩니다.
정말로 믿음직하다면 말은 어느 지점에서 멈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다음은 말이 필요 없는 지점, 확실한 결과를 보여주어야 하는 단계입니다. 말은 출발의 임무를 맡는 것으로 충분하니까요.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로버트 드 니로는 말을 멈추지 못합니다. 마치 한 번 신으면 끝없이 춤을 추어야 하는 안데르센의 ‘빨간 구두’와 비슷하다고 하면 될까요. 그는 말(言)이라는 빨간 구두를 신고 있는 셈입니다. 영화로 보기를 들면, 에머릭 프레스버거의 〈분홍신〉(1948)에서 모리아 시어러가 신었던 그 ‘분홍신’이겠지요.
하지만 수다쟁이는 찌질이보다 낫습니다. 어떤 점에서냐 하면, 찌질이는 한 번 외면당하면 그것으로 끝이지만, 수다쟁이는 말 고유의 힘으로 스스로 마지막 파멸을 면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말은 무기가 될 수 있지만, 찌질함은 무기가 될 수 없으니까요.
아닌 게 아니라, 그 위험천만한 마지막 순간 로버트 드 니로는 자신의 말 덕분에 목숨을 건집니다. 리처드 위드마크한테는 바로 이 말이, 말의 힘이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리처드 위드마크는 결정적으로 몰락하고, 로버트 드 니로는 가까스로 구원받습니다.
그러니까 윙클러의 〈밤 그리고 도시〉는 ‘말의 힘’에 관한 영화이기도 합니다.
걸작과 좋아하는 영화의 다름
여기서도 역시 걸작과 좋아하는 영화의 차이는 어김없이 드러납니다.
누가 저한테 다신의 영화와 윙클러의 영화 가운데서 어느 쪽이 걸작이냐고 묻는다면 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다신의 영화라고 답할 것입니다.
또, 누가 저한테 다신의 영화와 윙클러의 영화 가운데서 어느 쪽을 더 좋아하느냐고 묻는다면 이번에도 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윙클어의 영화라고 답할 것입니다.
물론 다신의 영화라고 답한 까닭은 줄스 다신 때문이고, 윙클러의 영화라고 답한 까닭은 로버트 드 니로 때문입니다.
로버트 드 니로의 입에서 줄기차게 쏟아져 나오는 수다의 매력을 만끽할 수 있는 영화가 바로 어윈 윙클러의 〈밤 그리고 도시〉이고, 리처드 위드마크의 안타까운 최후가 내뿜는 비장미를 만끽할 수 있는 영화가 바로 줄스 다신의 〈밤 그리고 도시〉입니다.
그렇습니다. 두 영화는 ‘서로 다른’ 영화입니다. 저는 이 ‘다름’이 참 소중합니다.
신기한 것은, 이 다름이 소중할 뿐만 아니라, 참 매력적이기도 하다는 사실입니다. 로버트 드 니로의 수다스러움이 매력적인 만큼 리처드 위드마크의 찌질함도 ‘어쨌거나’ 분명히 매력적이라는 뜻입니다. 적어도 저한테는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