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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수 Jul 11. 2024

C14. 아버지는 딸을 만나지 말아야 하는가?

  - 〈더 레슬러〉 & 〈미드나이트 런〉

C14. 아버지는 딸을 만나지 말아야 하는가? - 대런 애로노프스키, 〈더 레슬러〉(2008) & 마틴 브레스트, 〈미드나이트 런〉(1988)

미키 루크와 로버트 드 니로

   미키 루크가 자기 온 존재를 불사르는 명연을 선보인 대런 애로노프스키의 〈더 레슬러〉에서 가장 깊이 제 가슴을 쳤던 장면은 레슬링 관련 장면들이 아니라, 그가 오래도록 떨어져 지내던 자기 딸과 재회하는 장면이었습니다.

   그 장면에서 저는 문득 마틴 브래스트의 〈미드나이트 런〉(1988)에서 로버트 드 니로가 아홉 해 동안이나 떨어져 지내던 자기 딸을 드디어 찾아가 해후(邂逅)하던 장면을 떠올렸습니다.

   물론 이 두 배우는 이미 알란 파커의 〈엔젤 하트〉(1987)에서 함께 연기 호흡을 맞춘 바가 있지만, 서로 너무나 다른 아우라를 지닌 배우들 아닙니까.

   그토록 ‘다른’ 두 배우를 저는 〈더 레슬러〉의 이 장면에서 슬며시 겹쳐 떠올리면서 묘한 감흥에 사로잡혔습니다. 둘이 ‘매우 비슷하다’라는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

   여기서 비슷하다는 것은 ‘아버지로서’ 비슷하다는 뜻입니다. 아버지인 미키 루크와 아버지인 로버트 드 니로―. 그것도 외동딸의 아버지지요.

   이어 문득 이런 의문이 솟구쳤습니다.

   ‘왜 아버지는 딸을 만나러 가는가?’

   이때 아버지는 누가 봐도 거의 구제 불능의 못된 불량 아버지요, 딸은 어려운 여건에서도 착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외동딸입니다. 도대체 왜 이런 설정이 필요한 것일까요?     


내가 좋아하는 로버트 드 니로의 몇몇 영화들

   로버트 드 니로 하면, 〈택시 드라이버〉(1976)나 〈분노의 주먹(성난 황소)〉(1980)이나 〈좋은 친구들〉(1990)을 필두로 한 일련의 마틴 스콜세지 영화들과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1984, 셀지오 레오네)나 〈디어 헌터〉(1978, 마이클 치미노), 또는 〈대부2〉(1974,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나 <1900>(1976,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같은 심각한 걸작, 또는 명작 영화들이 먼저 떠오르는 것은 속절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저는 여기에 끼이지 않은, 그러니까 조금은 덜 심각한 그의 영화들을 참 좋아한다고 고백해야겠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숀 펜과 공연했던 〈천사탈주〉(1989, 닐 조던)나 빌 머레이와 공연했던 〈형사 매드독〉(1993, 존 맥노튼), 그리고 제시카 랭과 공연했던 〈밤 그리고 도시〉(1992, 어위 윙클러) 같은 작품들을 저는 꽤나 좋아합니다. 당연히 메릴 스트립과 공연했던 〈폴링 인 러브〉(1984, 울루 그로스바드)나 제인 폰다와 공연했던 〈스탠리와 아이리스〉(1990, 마틴 리트) 같은 로맨스 영화도 제가 좋아하는 작품 목록에 당당히 들어가지요.

   하지만 이 모든 작품 가운데서도 제가 첫손가락에 꼽는 작품은 단연 찰스 그로딘과 공연했던 마틴 브래스트 감독(알 파치노에게 마침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안겨준 영화 〈여인의 향기〉(1992)의 바로 그 감독 말입니다)의 〈미드나이트 런〉(1988)입니다.

   바로 이 영화에 문제의 부녀(父女) 상봉의 장면이 나옵니다.     


현상범 사냥꾼인 전직 형사 로버트 드 니로

   이 영화에서 로버트 드 니로는 전직 형사로, 일종의 현상범 사냥꾼입니다.

   ‘전직’이라는 말에서 벌써 어지간히 몰락의 징후가 엿보이지요?

   그렇습니다. 그는 인생이 마음먹은 대로 풀리지 않아서 본인의 애초 뜻과는 맞지 않는 엉뚱한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처지입니다.

   일종의 고집스러운 정의파 형사였던 그는 현역 시절 검은돈의 유혹을 뿌리친 탓에 그 마수에 걸려 억울하게 옷을 벗어야 했습니다. 말하자면 그 검은돈의 배후 세력으로부터 복수를 당한 셈입니다. 있을 법한 사정이지요.

   한데, 그 과정에서 아내는 그렇지 않아도 현실 감각 결핍에 그저 밖으로만 나도는 남편을 불만스러워하던 차였는데, 어쩌다 그만 경찰서장과 연인 사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이혼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된 셈입니다.

   그 아내는 어린 딸을 데리고 미련 없이 경찰서장한테로 가버렸지요.

   덕분에 지금 로버트 드 니로는 홀로 구질구질하게 현상범이나 잡아다 바치며 그 현상금으로 근근이 먹고사는 형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꿈이 있다면 거물급 현상범 하나 잡아서 크게 한몫 쥐는 것입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자그마한 커피숍을 열어 평범한 생활인으로 얌전히 살아갈 작정을 하고 있습니다. 그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슬슬 지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마침내 기회가 옵니다. 무려 10만 달러의 보수를 받을 수 있는 초거물급 현상범을 추적하게 된 것입니다. 이 현상범이 바로 찰스 그로딘이지요.

   ‘합창 교향곡’의 악성 베토벤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영화인, 브라이언 레반트의 〈베토벤〉(1992) 시리즈에서 그 후덕한 아저씨로 나왔던 배우 말입니다.

   이 영화 〈미드나이트 런〉에서 그가 로버트 드 니로와 벌이는 연기 앙상블은 아무리 다시 봐도 질리지 않을 만큼 발군입니다. 그는 비록 현상범으로 쫓기는 몸이지만, 로버트 드 니로와 통하는, 또는 결이 비슷한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피아에 빌붙어서 개인의 영달을 꾀하지 않고, 그 정체를 알고 나서 그들의 부정한 돈을 빼돌린 죄목이니까요.

   공교롭게도 그 마피아가 과거 로버트 드 니로를 물 먹였던 바로 그 악질 마피아라는 점이 나중에 밝혀집니다. 그래서 두 사람 사이에는 자연스럽게 차츰 묘한 연대감이 생깁니다.

   어쨌든 로버트 드 니로가 워낙 기술적으로 능란한 솜씨를 지닌 전직 형사다 보니, 이 어찌 보면 샌님 같은 ‘굼뜬’ 찰스 그로딘을 잡는 것은 거의 식은 죽 먹기입니다.

   그야말로 드 니로는 영화 초반부에서 일찌감치 찰스 그로딘을 붙잡는 데 성공합니다. 이쯤에서 멍청한 FBI 간부 요원이 등장하여, 일종의 ‘신 스틸러’로서 이야기를 한결 더 아기자기하게 만들어 주는 구실을 하지요.

   이제 어지간히 드러났지만, 이 영화는 그 흔한 폴리스 무비나 갱스터 무비와는 달리 현상범을 잡기까지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잡고 나서 본론이 시작되니까요.

   그러니까 붙잡은 현상범을 호송하는 과정이 이야기의 몸통입니다. 여기서부터 이 영화는 일종의 로드 무비가 됩니다.

   로버트 드 니로가 이혼한 뒤 아홉 해 만에 처음으로 자기 딸을 만나게 되는 것이 바로 이 호송의 과정에서입니다.     


딸과 해후하는 아버지 로버트 드 니로

   로버트 드 니로가 전처의 집을 찾아간 것은 딸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주머니에는 돈 한 푼 없고, 신용카드도 못 쓰게 된 탓에 하는 수 없이 돈을 빌리러 간 것이지요.

   그 넓은 땅 미국에서 차로 현상범을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까지 호송하려니, 적지 않은 비용과 시간이 드는 것은 당연합니다.

   실은 그 현상범이 자신은 고소공포증이 있어서 비행기를 못 탄다고 몸소 ‘메소드 연기’까지 감행해 가며 필사적으로 둘러댄 탓에 하는 수 없이 차로 가게 된 것이지만요.

   게다가 드 니로는 이제 경찰 신분이 아니라서 공금을 쓸 수도 없는 처지입니다. 결국 누구한테서든 돈을 빌릴 도리밖에는 없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수완 좋은 그라고 할지라도 돈을 훔칠 수는 없는 노릇이고, 객지에서 아는 사람이라고는 전처뿐이니, 어쩌겠습니다.

   결국 그는 마침 지나던 곳에 살고 있는 전처를 찾아가기로 마음먹습니다.

   참 체면 안 서는 일이지만, 자기 코가 석 자나 빠진 신세라 속절없는 노릇입니다.

   여기서 찰스 그로딘과 함께 전처의 집을 향해 걸어가다가 그가 탄식하듯 자조적으로 내뱉는 한마디가 매우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서글프게 관객의 가슴을 울립니다.

   “9년 만에 처음 보는 전처한테 돈 좀 빌려달라고 해야 하다니!”

   여기서 전처에 대한 로버트 드 니로의 마음을 헤아릴 만한 단서들을 영화는 앞서 이미 보여주었지요. 오래전에 아내가 자기한테 선물로 준 손목시계를 그가 여태까지 차고 있는 것도 그 한 예입니다. 그도 충분히 아내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한 남편으로서 죄책감을 안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런 순간 남자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요? 사정이야 어떻든,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어 있는 자기 여자를 아홉 해 만에 다시 보는 심정 말입니다.

   안쓰러움도 있겠지만, 역시 우선은 야속한 마음이 앞서는 것이 인지상정일까요.

   아니나 다를까, 두 사람은 기다렸다는 듯 또다시 말다툼에 휩싸입니다.

   전남편은 전처를 비아냥거리고, 전처는 전남편을 비난합니다.

   어느덧 돈을 빌리겠다는 애초의 목적은 허공으로 붕 떠버립니다. 그때 두 사람을 얼어붙게 만드는 순간이 덜컥 찾아옵니다.

   느닷없이, 그들이 만난 자리에 마침 집에 있던 그들의 딸이 나타난 것입니다. 집 안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지니까 궁금해서 자기 방 밖으로 나와본 것이겠지요.

   아직은 어리다고 해야 할 가녀린 체구의 딸이, 서로 아홉 해 만에 처음 만난 자리에서 또 그 옛날처럼 다투고 있는 엄마 아빠의 딱한 모습을 목격한 것입니다.

   침묵.

   이 얼마나 부끄럽고, 난처하고, 쓰라린 침묵이겠습니까.

   그리고 밀려오는, 또다시 딸에게 못 볼 꼴을 보여주고 말았다는 참담한 자각―.

   전처가 먼저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그에게 차 열쇠를 건네줍니다. 줄 돈은 없으니, 차라도 타고 가라는 것이지요. 실은 딸 앞에서 얼른 이 곤란한 상황을 모면하려는 마음이 앞선 것입니다.

   어쨌든 이 순간 로버트 드 니로는 뜻하지 않게 딸과 가슴 아픈 아홉 해 만의 상봉을 한 것입니다. 이때 딸 앞에서 또 추태를 보이고 만 아버지로서 그의 심정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요?

   그는 딸과 잠깐 어색하게 몇 마디 인사말을 나누고는 그대로 돌아섭니다. 다시 이별입니다. 보는 이의 가슴을 치는 장면은 바로 그다음입니다.

   찰스 그로딘을 데리고 전처의 집 밖으로 나온 로버트 드 니로를 딸이 허겁지겁 뒤따라옵니다. 그리고 무엇을 내밀지요. 돈입니다. 자기가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이니 가져가라면서요.

   세상에, 얼마나 배려심 깊은 착하고 기특한 딸입니까. 아버지를 여전히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딸의 마음이 절절히 느껴지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더더욱 가슴이 아픕니다. 아무리 당장의 형편이 곤란하다고 해도 아버지가 그러는 딸한테서 무슨 염치로 돈을 받겠습니까.

   로버트 드 니로는 그럴 수 없다고 사양하고 표표히 그냥 떠납니다. 차를 운전하며 멀어져가는 아버지를 딸은 애틋한 눈으로 하염없이 좇습니다.

   어찌 보면 코미디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이 기묘한 작품의 한가운데 놓여 있는 이 가슴 저미는 한 장면을 저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딸과 재회하는 아버지 미키 루크

   한데, 전직 형사도 아닌 천하의 현역 레슬러 미키 루크도 딸을 만나러 가는군요.

   좌우간 오랜만에 딸을 만나러 가는 아버지들은 왜 다들 이렇듯 죄인이기만 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미키 루크는 그동안 한 번도 제대로 돌봐주지 못한 딸에게 한없이 미안한 모양입니다. 그 마음이 미키 루크의 눈빛에서, 아니, 온몸에서 그저 철철 넘쳐흐릅니다. 그는 이 순간 레슬러가 아니라, 그저 죄 많고 못난, 함량 미달의 불량 아빠일 뿐입니다.

   이 딸은 앞서 〈미드나이트 런〉에 나오는 로버트 드 니로의 미성년자 딸보다 나이가 많습니다. 어엿한 성인이지요. 자기 삶 정도는 혼자 힘으로 꾸려나갈 수 있을 만큼 성장했습니다. 그래서 이 딸은 자신을 방기한 아버지한테 당당히 책임을 물을 줄도 압니다.

   딸은 오랜만에 나타난 아버지 앞에서 절규합니다. 아니, 그것은 거의 꾸짖음입니다. 넉넉히 이해가 갑니다. 어쩌면 추하게 늙어가고 있는 아버지에 대한 안쓰러움을 그런 식으로 과격하게 표현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까요.

   변함없는 사실은, 아버지로서 미키 루크 또한, 아버지로서 로버트 드 니로가 그랬던 것처럼, 딸 앞에서 할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있을 턱이 없지요. 딸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제대로 돌보지 못할 양이면 피에르 모렐의 〈테이큰〉(2008)에서 리엄 니슨이 그랬듯이 위험에 빠진 딸을 목숨 걸고 구해낼 줄이라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도 저도 아닌 아버지는 아무 짝에 쓸모없는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유감스럽지만 어쩔 수 없는 사실입니다.

   게다가 이 아버지 미키 루크는 딸과 했던 귀한 약속마저 잊어버립니다. 술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치매 초기 증상 비슷하게도 보이고, 역시 타고난 구제 불능이기 때문인 듯도 합니다.

   딸은 다시 한번 상처받습니다. 세상에 하나뿐인 딸한테서조차 속절없이 외면당하는 처지에 몰려버린 아버지―. 한없이 한심하고, 한없이 서글프고, 한없이 딱한 아버지의 초상입니다.

   아마도 이 대목에서 그는 진정한―그런 것이 정말로 있다면―레슬러로 거듭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아버지이기조차 그만둘 수밖에 없을 때, 그래서 비로소 자기 전 존재를 레슬링에 들이밀 수밖에 없게 되었을 때, 그는 마침내 진짜 레슬러가 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이 과정, 딸한테 결정적으로 외면당하는 이 대목이 없었다면 마지막 순간 그러지 말라고 간절히 만류하는 연인 마리사 토메이를 뿌리치고 링으로 ‘떠나는’ 미키 루크가 그토록 처절하면서도 장엄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 마지막 순간 그는 그야말로 ‘오로지’ 레슬러일 뿐입니다. 존재 자체가 온통 레슬러인 사내, 레슬러 말고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

   이제는 남편도 아니요, 애인도 아니요, 아버지도 아닌, 오로지 레슬러이기만 한 사내 미키 루크입니다.

   오로지 레슬러이기만 한 존재가 있을 곳이 링 말고 따로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것이 죽음으로 이어져 있는 길이라 할지라도 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죽음의 위험을 기꺼이 무릅쓰고 링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러니 어쩌면 애초 딸을 만나려 했던 것이 잘못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기묘한 차이가 눈에 띕니다.


딸의 아버지로 살아간다는 것

   〈미드나이트 런〉의 로버트 드 니로는 딸을 만났지만, 딸한테서 떠납니다.

   〈더 레슬러〉의 미키 루크는 딸을 만났지만, 딸한테서 떠나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 차이 탓일까요. 로버트 드 니로는 가까스로 몰락의 길에서 벗어났고, 미키 루크는 돌이킬 수 없이 몰락합니다.

   영화는 그런 각자의 결말을 향해 치달아 갑니다.

   그렇다면 결론은 불량 아버지는 딸을 만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일까요? 참 해괴하면서도 가슴을 치는 결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긴 오즈 야스지로의 〈만춘〉(1949)에서 그 자상한 아버지 류 치슈조차도 결국은 사랑하는 딸 하라 세츠코를 눈물을 머금고 떠나보내야만 했지요.

   그러니 아버지는 딸을 만나려 하지 말고 떠나보내야 한다고 말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것이 아버지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일까요? 최소한 결정적인 파국이라도 피하여 돌이킬 수 없이 신세를 망치지 않기 위해서는 그래야만 하는 것일까요?

   어쨌거나 딸의 아버지로 살아간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세상인 것만은 분명한 사실인 듯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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