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와세 나오미, 〈수자쿠〉
C23. 참 고마운, 죽음과 이별의 산 혹은 숲 – 가와세 나오미, 〈수자쿠〉(1997)
내가 좋아하는 산 혹은 숲
가와세 나오미의 산 혹은 숲은 그저 한 폭의 아름답기만 한 풍경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무슨 신비스러운 기운이 감도는 영산(靈山)의 이미지나 분위기도 아니고요.
〈프레데터〉(1987, 존 맥티어넌)의 숲이나, 〈블레어 위치〉(1999, 다니엘 미릭·에두아르도 산체스)의 숲처럼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 음침하고 공포스러운 곳은 더더욱 아니지요.
물론, 가와세 나오미의 또 다른 영화인 〈너를 보내는 숲(모가리의 숲)〉(2008)의 숲 혹은 산은 그 성격이 조금 다르지만, 저는 기본적으로 가와세 나오미의 산 혹은 숲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수자쿠〉의 산 혹은 숲을요.
어째서인지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라면 머뭇거릴 수밖에 없습니다. 설명을 할 수 없어서라기보다는 굳이 설명하고 싶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말이 필요 없는 풍경―. 이것이 제 생각입니다.
또는, 그저 느끼기만 하면 그것으로 충분한 풍경이라고 하면 될까요.
조금씩 보이는 그 무엇
〈수자쿠〉에서 카메라가 원경(遠景)으로 담아내는 산을 보고 있으면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편안하게 가라앉습니다. 거기에는 어떤 까닭 모를 해방감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해방감은 들뜬 해방감과는 다릅니다.
단지 숲 혹은 산이라면 어디에서나 보통 느낄 수 있는 감흥은 분명 아니지요.
거기에 ‘무엇인가가 있다’라는 느낌은 들지만, 그것이 어딘가 모르게 개운치 않은 비밀이라는 느낌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입니다.
무엇인가가 있지만, 그것은 무슨 불순한 의도에서 고의적으로 애써 숨기는 비밀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다만 우리가 그 무엇을 차분하게 가만히 들여다보기를 요청하는, 아니, 부탁하는 무엇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지요.
그러면 정말로 조금씩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보이는’이 아니라 ‘조금씩’입니다.
그러니까 이 ‘조금씩’ 보이는 현상을 참을성 있게 견디기 힘든, 또는 기꺼이 견딜 생각이 없는 사람은 〈수자쿠〉를 보기가, 아니, 보아내기가 다소 어렵지 않을까, 싶은 것이지요.
알맞은 가득 참
가와세 나오미의 극영화를 보고 있으면 ‘그래, 저것이 삶이다!’ 하고 저도 모르게 속으로 중얼거리게 됩니다. 이는 거의 감탄에 가까운 중얼거림입니다.
역시 그가 다큐멘터리에서 일가(一家)를 이룬 감독이어서일까요. 그가 만든 극영화들은 삶의 어떤 기운, 이것이야말로 진짜배기라고 할 수 있을 듯한 ‘살아 있는’ 기운으로 가득 차 있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가득 차’ 있되 그것은 그릇 자체, 틀 자체를 깨뜨릴 것만 같은 도전적이고 도발적인 성질의 가득 참은 아닙니다.
물이 그릇 바깥으로 금세라도 흘러넘칠 듯 가득 차 있는 느낌이라고 하면 될까요.
기어이 넘치고 말 것 같으면 그릇을 건드리지 말고 가만히 두면 됩니다.
정 불안하면 그릇을 슬쩍 기울이거나 손으로 수면을 살짝 건드려서 물을 조금만 쏟아내면 그뿐이지요.
그것은 분명히 ‘가득 차’ 있지만, 그릇을 혹은 틀을, 아니면 그 그릇을 바라보는 사람을 거북하게 만들지 않는, ‘알맞은 가득 참’입니다.
진짜배기 삶의 기운
‘진짜배기’라는 말에 대해서도 짚고 넘어가야겠네요.
제가 가와세 나오미의 일면 ‘다큐멘터리를 닮은’ 극영화를 보면서 진짜배기 삶의 기운을 느끼는 것은, 무엇보다도 제가 다큐멘터리를 유난히 좋아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다큐멘터리와는 상관없이 제 나름의 어떤 취향이 스며들어 있다고 고백해야겠습니다.
저는 영화 속에서 배우들이 자기감정을 강렬하게 드러내는, 혹은 폭발시키는 장면들에 별로 믿음이 가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관객을 짐짓 정도 이상으로 자극하고 격동시키려는 의도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불순한 의도라고까지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받아들이기에 껄끄러운 것만은 사실입니다. 실제 삶에서 사람은 그렇게 자기감정을 거칠게 드러내는 경우가 흔치 않습니다. 적어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제가 겪은 바에 근거하면 그렇습니다.
기껏해야 스포츠 경기를 보면서 소리를 지르는 정도나, 정치적인 이슈로 시위를 하거나, 아니면 선거운동을 하는 것과 같은 경우를 제외한다면, 사람은 평소 그렇게 다른 사람을 향해서 노골적으로 자기감정을 폭발시키는 경우가 드뭅니다. 적어도 많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술에 잔뜩 취한 상태처럼 이성으로 감정을 통제하기가 매우 힘든 경우라면 또 모르지만요.
물론 이 역시 저만의 편견일 수 있습니다.
어쨌거나 저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요지인 셈이지요.
〈수자쿠〉는 이런 저만의 편견 혹은 취향에 딱 들어맞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연음의 고요함
이걸 가리켜 ‘침묵’이라고 해도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수자쿠〉는 자연음(自然音)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말하자면 ‘숲의 소리’지요.
하늘의 소리, 구름의 소리, 태양의 소리,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 새들 지저귀는 소리, 물이 골짜기를 흘러 내려가는 소리, 터널 속 공기가 진동하는 소리, 빗소리, 바람 소리, 벌레 소리, 숨소리…….
하지만 정작 사람의 소리, 무엇보다도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소리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저 대사가 적다는 식으로 말할 수만은 없는 어떤 고요함이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 사이에 시종일관 흐릅니다.
이것은 ‘없거나 비어 있는’ 고요함이 아니라, ‘흐르는’ 고요함입니다.
그렇지요. 흐름은 움직임입니다. 그러니까 이 고요함은 그저 고요함이기만 한 것은 아닌 고요함입니다.
그래서 무엇인가가 이 고요함 가운데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리기 힘듭니다.
이 생각으로 저는 영화를 보는 내내 화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보여주는 침묵
하지만 이 ‘무엇인가’는 결코 비밀이 아닙니다. 고의로 숨기는 그 무엇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무엇인가를 알아보려는 데 필요한 것은 탐색이라는 행위나 탐색하려는 의지가 아닐 수밖에 없습니다.
그저 가만히 들여다보고만 있으면 조금씩 이 무엇인가가 눈에 보이기 시작하니까요.
이것이 저한테는 참 신기한 현상이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영화가 또 있을까 싶습니다.
가와세 나오미의 영화가 저를 유혹하는 까닭입니다.
이 은근함의 매력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침묵입니다.
가와세 나오미의 인물들은 말이 많지 않습니다. 〈수자쿠〉의 인물들은 말을 많이 하지 않습니다. 할 말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말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들도 필요한 말은 하고 삽니다. 할머니도, 아버지도, 어머니도, 딸도, 조카도요.
하지만 그것은 최소한의 말입니다. 그들은 무슨 말이든 하려고 짐짓 애쓰지 않습니다. 그들은 말이 없거나 적은 상태를 불편해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보입니다.
그리고 그 말이 없는 공간을 채우고 드는 것은 소리입니다.
산의 소리, 숲의 소리, 그 모든 자연의 소리, 소리, 소리…….
아니면, 음식 만드는 소리, 발소리, 문 여닫는 소리, 물 끓는 소리, 거기에 이따금 자동차 소리, 오토바이 소리, 트럭 소리, 버스 소리, 그 버스를 타고 학교에 다니는 소녀들의 소리, 하여튼 삶의 소리, 소리…….
가족을 보여주는 고요한 방식
가와세 나오미의 영화에는 가족이 있습니다. 〈수자쿠〉에도 가족이 있습니다.
이 가족은 다큐멘터리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아니면 비슷한 방식으로 가와세 나오미의 가족사를 거울에 비추듯이 보여주는 가족입니다.
거기에는 떠나간 아버지와 홀로 남은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딸이 있습니다. 혹은 떠나간 어머니와 홀로 남은 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어쩐지 이것을 가리켜 ‘온전하지 않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그것대로 훌륭한 하나의 가족, 엄연한 하나의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구성원 하나가 사라지고 없다고 해서 온전하지 않다는 식으로 표현하고 싶지 않은 것은 어쩌면 그 가족이 그 상태 그대로, 그 모양 그대로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제 안에 엄연히 도사리고 있는 탓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마땅히 있어야 할 가족 구성원이 빠져서 허전한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허전함이 그 가족을 가리켜 온전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라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가족은 그렇게, 그런 모양새로도 행복할 수 있다고 저는 믿고 싶기 때문입니다.
가족은 탄생하는 것이지만, 또 죽기도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떠나가고, 누군가는 사라지고, 누군가는 죽습니다. 그것이 가족입니다. 아니, 그래야 가족입니다. 진짜 가족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영원하다면 그것은 가짜거나 거짓입니다.
〈수자쿠〉의 가족은 가짜가 아닙니다. 거짓도 아닙니다. 거기에는 탄생도 있고, 이별도 있고, 죽음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수자쿠〉는 숨기지도 않고, 포장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떠들썩하지도, 요란하지도 않은 방식으로 보여줍니다.
그렇듯 고요하게 보여주기에 우리는 차분히 거기에 있는 무엇인가를 들여다볼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마침내 살며시 우리 마음의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참 신기합니다.
이것이 〈수자쿠〉만의 어떤 ‘비결’입니다. 저는 이 비결을 참 좋아합니다.
눈물 없이 보여주는 슬픔
죽음과 이별이 있기에 가족은 슬픔이기도 합니다.
가족이 기쁨의 근원이라는 말을 저는 절반 정도밖에 믿지 않습니다.
가족이 없는데도 행복한 사람이 드물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가족이 있어서 불행한 사람들이 숱하도록 많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수자쿠〉는 이 슬픔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 슬픔은 눈물범벅의 슬픔이 아닙니다. 당연하지요. 가와세 나오미는 눈물을 통해서 슬픔을 보여주는 감독이 아닙니다.
위로는 홀시어머니와 아래로는 외동딸과 조카를 건사해야 하는 여인이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여인은 어느 날 느닷없이 남편을 잃습니다. 사방이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이 시골 마을에서 여인은 이제 계속 살아갈 자신이 없습니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인의 얼굴에 떠올라와 있는 것은 얼른 그 정체를 읽어내기 힘든 표정입니다.
아무런 표정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도 엄연히 하나의 표정입니다. 그런 표정으로 가와세 나오미는 슬픔을 표현합니다. 이 표정이 저는 참 마음에 듭니다.
시어머니는 떠나려는 며느리를 붙잡지 않습니다. 시어머니는 그 며느리의 마음을 깊이 헤아립니다.
시어머니가 먼저 문을 엽니다. 일본 다다미방의 그 외짝 여닫이문 말입니다.
먼저 한 짝을 열고, 이어 또 한 짝을 엽니다. 마저 여는 것이지요.
이제 문이 다 열렸습니다.
그제야 시어머니는 그 며느리에게 묻습니다.
“친정으로 가고 싶으냐? 그래 여기서는 견디기 힘들겠지.”
이별은 그렇게 결정됩니다. 이 결정의 과정이 심금을 울립니다. 가슴이 아픕니다.
사촌오빠와 엄마, 그리고 질투
〈수자쿠〉가 이 어린 소녀의 사랑 이야기를 피하지 않은 것이 참 귀합니다.
소녀는 사촌오빠를 좋아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오빠여서 자연스레 품게 되는 정을 뛰어넘는 남다른 감정입니다.
이것을 ‘솜씨’라는 말로 표현해도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이 소녀는 어느 날 오빠의 오토바이를 얻어 타고 학교에 갔다 오는 기쁨을 엄마한테 빼앗깁니다. 그 순간 소녀의 질투를 표현하는 가와세 나오미의 솜씨가 눈부십니다.
아니, 이것은 솜씨가 아니라 마음이라고 표현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 정도입니다.
소녀는 엄마와 오빠 사이에서 갈등을 겪습니다. 이것은 질투이기도 하고, 안타까움이기도 하고, 속상함이기도 하고, 슬픔이기도 합니다.
이들한테 찾아오는 이별이 이 갈등의 끄트머리에서라는 점이 놀랍습니다.
이 갈등의 끝에, 혹은 와중에 찾아온 이별이기에 이 이별의 아픔과 슬픔은 한층 더 깊고 진합니다.
비가 쏟아지고, 여인은 그 빗속을 뛰어가고, 조카는 그 숙모를 쫓아갑니다.
소녀가 본 것은 그렇게 비에 젖은 몰골로 집에 돌아온 두 사람입니다.
이 순간 소녀가 어떤 마음인지를 우리는 냉큼 뒤돌아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소녀의 몸짓으로 미루어 헤아릴 수 있습니다.
아니, 쿵쾅거리면서 멀어지는 소녀의 발소리만이 우리 귀에 무슨 길고 긴 여운처럼 남습니다.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이 두 장면뿐입니다. 이 방식이 또 참 마음에 듭니다.
가족, 그 이별의 공동체
이 아버지의 죽음은 아무래도 수수께끼입니다.
자살 같기도 하고, 사고사 같기도 합니다.
이 죽음에 관해서 영화는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뭔가 알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입니다.
가족에게 찾아오는 이별이란 본디 그런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가족이기에 남들이 모르는 무엇인가를 안다고 하는 생각은 일부의 진실일 뿐입니다.
가족이기에 오히려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사실 앞에 우리는 겸손히 머리 숙여야 하지 않을까요.
가족이니까 다 안다는 생각으로 우리가 가족을 얼마나 함부로 대하고 있는지를 우리는 반성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신기한 것은 이 아버지가 8밀리 비디오카메라로 찍은 영상을 남겨놓았다는 점입니다.
이 아버지가 이런 취미(이것을 취미라고 말할 수 있다면요)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합니다.
이별이 결정되고 나서 이 이별 직전의 가족은 한자리에 모여 이 아버지가, 이 남편이, 이 아들이, 이 숙부가 남긴 필름을 봅니다.
거기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그들이 살고 있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이 사람 저 사람, 이 남자 저 남자의 웃는 얼굴, 그리고 가족의 모습, 또 마을의 모습이 차례로 찍혀 있습니다.
이 필름을 한자리에 모여서 함께 보는 것으로 이 가족은 바야흐로 이별을 맞이합니다. 그 순간 그들은 이별의 공동체가 됩니다.
이 기묘하고 느닷없는 이별의 의식이 예사롭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죽음 혹은 사라짐
이 기록이 어쩐지 가슴 한 귀퉁이를 아프게 저미고 드는 것은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이 아픔은 이 마을이 지금 처해 있는 상황에서 오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마을을 지나가기로 예정되어 있던 철도 건설이 취소되었기 때문입니다.
마을은 이제 희망이 없습니다.
젊은이들, 학생들이 희망을 품고 이 마을에서 자라나기를 더는 바랄 수 없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마을은 사람들이 눌러앉아 삶을 꾸려나갈 수 있을 만한 터전이 이제 더는 못 되는 형편에 내몰리고 말았습니다.
그 마을에 대한, 그 마을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기에 아버지가 남긴 8밀리 영상은 더욱더 보는 사람의 가슴을 아프게 저밉니다.
어쩌면 머지않은 뒷날에 이 마을은 지상에서, 또는 지도상에서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수많은 시골 마을이 그렇게 사라져 갔듯이 말입니다.
아버지의 죽음 혹은 사라짐은 바로 이에 대한 무슨 상징인 것처럼만 여겨집니다.
꼭 그렇게 도식적으로 해석하고 싶지는 않은데도 우선은 그렇게 새기고 싶어지는 것을 저도 어쩌지 못하겠습니다.
다시 산 혹은 숲, 그 위안과 고마움
영화는 다시 산 혹은 숲을 보여줍니다.
신기하게도 또다시 그 장면을 보는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마을도 사라지고, 가족도 이별하지만, 그래도 산만은, 숲만은 남는구나! 하늘은, 구름은, 바람은 여전히 남는구나!’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지만, 그래도 이런 자각이 위안이 되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아마도 이런 위안을 주고 싶었던 것이 감독의 속 깊은 뜻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이제야 가까스로, 듭니다.
이 생각이 참 소중합니다.
이 위안이 참 고맙습니다.
그래서 〈수자쿠〉의 산과 숲이 저는 참 좋습니다. 이렇게 스스로 제 마음을 가만히 추슬러 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