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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수 Sep 01. 2024

C24. 한없이 불안한 스크루지의 앞날

  - 로버트 저메키스, 〈크리스마스 캐롤〉

C24. 한없이 불안한 스크루지의 앞날 – 로버트 저메키스, 〈크리스마스 캐롤〉(2009)

이야기의 재해석

   어린 시절에는 순진하게 가감 없이 받아들이고 감동받았던 동화나 우화가 나이 들어 어른의 시각으로 재해석했을 때 본모습을 잃는 경우가 제법 있습니다. 저도 이런 재해석에 충격을 받은 경험이 몇 차례 있지요.

   《신데렐라》도 그 한 가지 보기입니다.

   신데렐라가 무도회에 유리구두를 신고 간 까닭이 나중에 그 구두가 자기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쉽기 때문이라는 해석 말입니다.

   보통의 구두라면 발이 조금 커도 억지로 우겨서 넣으면 어지간히 신을 수는 있을 테니까요. 그러면 다른 여자가 그 구두의 임자로 결정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유리구두는 정말 딱 맞는 발이 아니면 신을 수 없지 않겠습니까. 신데렐라의 용의주도함이 빛을 발하는 대목입니다. 착하고 순박한 신데렐라 신화가 깨지는 순간이지요.

   《토끼와 거북이》는 또 어떻습니까.

   ‘느리지만 부지런한’ 거북이가 ‘빠르지만 게으른’ 토끼를 마침내 경주에서 이기는 이야기 말입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거북이를 칭찬하는 쪽이지만, 다르게 해석하면 방심하다 잠이 든 토끼를 빤히 보면서도 그냥 지나쳐서 제 갈 길만 열심히 가버린 거북이의 ‘비겁하고 이기주의적인’ 태도가 문제입니다.

   어쩌면 거북이는 잠이 든 토끼를 보면서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지도 모르지요.

   이 경우 거북이는 부지런하고 성실하다기보다는 아무래도 의뭉스럽다는 느낌에 더 가깝습니다. 공동체 생활에서는 문제가 되는 태도입니다. 이런 인물과 가까이 지내면 언젠가는 뒤통수 맞기 십상이지요.

   《개미와 베짱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추운 겨울을 대비하여 더운 여름에 열심히 일해서 식량을 비축하는 개미를 칭찬함과 더불어, 앞날을 생각하지 않고 그저 노는 데만 열중한 베짱이를 질타하는 이야기지만, 달리는 부지런히 노래를 불러 여름에 열심히 일하는 자기들을 즐겁고 기운 나게 해 주었던 베짱이를 외면하는 개미들의 냉정함을, 또는 그들의 배은망덕을 비판하는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엔터테이너나 예술가에 대한 편향된 시각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네요.

   이런 시각에서라면 《개미와 베짱이》는 삶을 사는 다양한 태도나 방식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는 이야기인 셈입니다.     


놀부냐, 흥부냐

   우리의 전래동화 《흥부와 놀부》도 다르지 않습니다.

   가난하고 착한 동생 흥부와 부자인 못된 형 놀부―.

   물론 이 이야기가 지지하는 인물은 흥부지만, 언젠가부터 놀부에 대한 우호적인 해석이 힘을 얻고 있는 듯합니다. 이 험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흥부와 같은 태도나 마음가짐으로는 그야말로 가족을 부양하기도 힘들다는 것이지요.

   이런 점에서 흥부는 사회부적응자의 면모에 가깝습니다. 이 경우 아무리 봐줘도 흥부는 국가의 인구시책에 부응하는 정도 말고는 취할 점이 별로 없는 인물입니다. 무슨 선행을 하는 것 같지도 않고, 일을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습니다.

   제 생각에는 아마도 이 놀부가 〈크리스마스 캐롤〉의 스크루지를 가장 많이 닮은 인물이 아닌가 싶습니다.

   혈육도 돌보지 않고 그저 제 잇속만 챙기기에 바쁜 인물―.

   물론 스크루지는 결혼을 하지 않았으니, 기혼자인 놀부와는 그 처지가 조금 다르기는 하지요.

   하지만 이 경우는 서양과 우리나라의 차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놀부의 시대에는 부모가 강제로 배필을 정해서 자식들을 결혼시켰으니까요. 스크루지의 경우는 스스로 약혼자를 차버린 셈이고요.

   놀부에게도 스크루지처럼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면, 글쎄요, 과연 결혼했을까, 싶기는 합니다. 물론 놀부 내외는 서로 죽이 잘 맞으니까 놀부 처지에서는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놀부냐, 스크루지냐

   여기서 개념상의 편차가 드러납니다.

   놀부와 스크루지는 주변을 돌볼 줄 모르는 지독한 구두쇠라는 점에서 별반 다를 게 없는 인물들입니다. 부자라는 점에서도 마찬가지지요.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놀부는 지주라고 해야 하고, 스크루지는 자본가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지주와 자본가는 다릅니다. 놀부가 그저 부자라면, 스크루지는 사업가입니다.

   놀부는 흥부한테 자린고비로 야박하게 구는 것과 달리, 스스로는 조금 흥청망청하는 것도 같습니다.

   이 지점에서 놀부와 스크루지의 정체성은 결정적으로 갈립니다. 세상일을 대하는 태도가 다를 수밖에 없을 터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스크루지라면 결코 하지 않았을 행동을 놀부가 버젓이 하는 것으로 미루어보아도 알 수 있는 문제입니다.

   놀부는 흥부가 초현실적인 현상―슬근슬근 톱질하세!―으로 부자가 된 것을 그대로 믿고 자기한테도 그런 일이 벌어지리라는 기대에 사로잡혀 섣불리 덤벼들었다가 낭패를 봅니다.

   하지만 사업가인 스크루지가 그런 허황된 일 따위에 현혹될 까닭이 없습니다.

   따라서 놀부가 그런 일을 겪고 나서 뉘우치는 것은 그런 세계관을 지니고 있는 인물한테는 충분히 있을 법한 일입니다.

   하지만 스크루지라면 다를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크리스마스 캐롤〉의 결말이 새삼 미심쩍습니다. 단 하룻밤의 악몽 같은 경험으로 일평생 올곧게 지켜왔던 인생관을 송두리째 바꾸어버리는 일―.

   글쎄요, 그게 정말 개연성이 있는 일일까요.

   물론 어릴 때 처음 이 이야기를 접했을 때 저는 그것이 있을 법한 일인 듯싶었습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래야만 한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어른이 된 지금은, 곧, 사람이 바뀌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경험으로 알고 있는 지금은 스크루지의 그 변화가 영 믿기지 않습니다.

   단순한 격세지감을 넘어서서 마음이 아플 정도로 말입니다.

   물론 찰스 디킨스가 〈크리스마스 캐롤〉을 쓰던 당시인 19세의 영국 사회와 지금 제가 살아가고 있는 21세기 대한민국의 상황은 서로 사뭇 다를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시대 상황의 차이를 세심하게 고려하는 것이 공정한 처사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공정해야 한다는 생각과 제가 느끼는 감흥은 별개입니다. 생각은 생각이고 느낌은 느낌입니다.

   그야말로 훈훈한 가슴을 안고 ‘그래, 세상은 살 만해!’ 하고 중얼거릴 수 있다면 좋겠지만, 어딘가 개운치 않은 느낌이 분명한 앙금으로 남는 것을 어쩌지 못하겠으니까요.     


스크루지의 미래

   이쯤에서 궁금해지는 것은 스크루지의 미래입니다.

   물론 그는 이미 늙었으니, 그에게 미래라고 할 만한 것이 충분히 남아 있다고 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는 지금껏 자기 관리를 철저하게 해온 것으로 보입니다.

   지독한 수전노로 살았다는 것은 좋게 말하면 검소하게 살았다는 뜻이기도 할 테니까요. 스크루지는 과식을 하지도 않고, 술 담배와도 거리를 두는, 꽤나 금욕적인 삶을 살아온 것 같습니다. 게다가 그의 생활은 틀에 박힌 듯 아주 규칙적입니다. 특별히 지금 앓는 병이 있는 것 같지도 않고요.

   이대로 계속 산다면 아마도 장수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원래 이런 사람이 오래 사는 법 아니겠습니까. 한 마디로 무병장수 형 인물이지요. 그런 그에게 느닷없는 변화의 계기가 주어진 것입니다.

   이 변화를 진짜 변화로 친다면, 그래서 그가 그 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된다고 가정한다면, 그의 남은 생은 어떤 것이 될까요? 다소 짓궂지만, 냉정하게 한번 따져보고 싶은 문제입니다.

   단서가 있습니다.

   스크루지는 하룻밤 악몽 같은 체험을 하고 난 뒤 너그럽고 인심 좋고 후덕한 사람으로 변한 것만은 틀림이 없습니다. 어쨌거나 이야기 속에서 그렇게 그려지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개과천선한 크리스마스 이튿날 아침 예정 시각보다 16분 늦게 출근한 직원 밥을 유머러스하게 놀리는―물론 선의로―것으로 미루어 그의 사업가적인 명민함이랄까, 수완은 그대로 지니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니 어쩌면 앞으로 사업은 더욱 번창 일로를 걸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굳이 표현한다면 ‘착한 자본가’가 된 셈이라고 하면 될까요.

   장차 이 변화의 혜택을 입을 수많은 사람의 기쁨이나 행운을 생각하면 이 변화가 사실이면 참 좋겠다 싶습니다.     


이제 스크루지는 어떻게 사업을 할 것인가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더 솟아오릅니다. 바로 이 변화 자체에 대한 것입니다.

   이 변화가 문자 그대로 참된 것이려면, 사업의 재능은 그대로라고 할지라도 그 재능을 발휘하는 과정은 그 전과 달라야 하지 않을까요.

   변하기 전의 스크루지는 악덕 고리대금업자의 이미지가 강합니다. 사업을 해도 합법적이고 정직하게만 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랬다면 부자가 될 수 없었으리라고 하는 편이 옳지 않을까 싶습니다.

   탈세도 하지 않고, 사람을 괴롭히지도 않고, 직원들한테 월급도 두둑이 주고, 자선단체에 기부금도 듬뿍듬뿍 내면서 인심 좋게 사업을 하지는 않은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사업가로 우뚝 서지 못했을 것입니다. 글쎄요, 정말 전형적인 수전노로서 그저 아끼기만 하는 태도로도 사업이라는 것을 할 수 있을까요?

   그런 그가 변했다면, 그리고 그 변화가 진짜 변화라면 직종을 바꾸지 않는 한 그는 그때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사업을 해야 맞습니다.

   정직하고, 합법적이고, 부당하지도, 야박하지도 않게 말입니다. 이중장부도 쓰지 않고, 세금도 꼬박꼬박 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돈이 드는 선행을 계속해서 베풀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사업도 해야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런 식으로 사업을 해서야 돈을 많이 벌 수 있을 턱이 없습니다. 돈이 없으면 남을 충분히 도울 수도 없습니다. 어린 팀의 병원비를 대기도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저 인심 좋은 노인이기만 해서는 많은 사람들한테서 ‘칭송받을 만한’ 삶을 살기는 아무래도 어렵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이건 뭔가 모순입니다.

   만일 정말로 변해서 이제부터 선하게 살아간다면 스크루지는 머지않아 망해야 합니다. 망하지 않고 계속 많은 선행을 할 수 있으려면 그는 어마어마한 재벌급 부자여야 합니다. 가만히 있어도 돈이 돈을 벌어다 주는 정도인 굴지의 부자 말입니다.

   하지만 스크루지는 그 정도로 어마어마한 부자 같지는 않습니다. 데리고 있는 직원도 한 명뿐인, 그야말로 소규모 사업입니다. 과연 이걸 사업이라고 불러도 될까 싶은 정도지요.

   그러니, 변화된 스크루지의 미래는 실은 상당히 불안한 것입니다. 스크루지를 제외한 세상 모든 사람이 착하고 정직하고 인정이 많다면 별문제겠지만, 사업의 세계는 냉정합니다. 인정 따위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틈을 보이면 금세 당하거나 도태되고 말 것입니다. 그런 냉정한 사람들만이 부자가 되는 세상입니다. 아니, 그래도 될까 말까, 한 것이 사업의 세계입니다.

   스크루지의 밝은 미래는 그를 제외한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착하다는 전제에서만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싫지만 이런 결론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도 세상에는 착한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보다 더 많고, 정직하게 돈을 번 부자들, 그러니까 청부(淸富)―사전에는 없는 말이지만, 청빈(淸貧)의 반대말로 곧잘 쓰이지요―들도 많다고 말하는 것은 어쩐지 뜬구름 잡는 소리로 들립니다. 아무 소용이 없는 자기 위안이라고나 할까요.

   성경 복음서에는 부자가 천국에 가기는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말씀이 있긴 하지만, 이는 부자도 어렵지만 천국에 갈 수는 있다는 말이 아니라, 실은 못 간다는 뜻 아닙니까.

   게다가 주지하다시피, 스크루지가 살아가던 19세기의 영국은 찰스 램의 《엘리아 수필집》에도 나오듯 키 작고 깡마르고 연약한 어린이한테 목숨을 걸어야 하는 굴뚝 청소를 서슴없이 시키던 가혹한 시대였지 않습니까.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마다하지 않던, 인간이 인간한테 못 할 짓이 없던, 그야말로 야만의 시대였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은요? 글쎄요.     


스크루지가 부자가 아니었다면?

   저는 스크루지의 앞날이 불안합니다. 딱하게도 이런 생각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개과천선한 스크루지의 모습을 보면서 아무 거리낌 없이 행복한 웃음을 지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이제는 그게 잘되지 않는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몹시도 씁쓸합니다.

   이 생각을 어린 세대에게 전해줄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우리 다음 세대, 다음다음 세대가 이 이야기에서 무엇을 느끼는지 선뜻 물어보지도 못하겠고요. 함께 이야기해 볼 마음의 여유가 생기지 않습니다.

   게다가 스크루지가 부자가 아니었다면 그런 일을 겪고 개과천선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변해도 부자가 변해야 뭔가 세상이 행복해진다는 것, 돈이 있고 힘이 있는 사람이 착해져야 세상이 밝아진다는 것, 과연 이것이 〈크리스마스 캐롤〉의 교훈일까요. 이렇게 새겨도 괜찮을까요.

   그렇다면 이 작품은 참 예리하게 정곡을 찌르고 있는 셈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정말 이것이 이 이야기의 교훈이라면 이 교훈은 잘못 도착한 교훈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나 같은 서민한테 이런 이야기가 도대체 무슨 소용일까?’ 싶기 때문입니다. 부자가 착해지기만을 손꼽아 기다려야 한다면 그런 인생은 도대체 무엇이냐, 하고 누구한테라 할 것 없이 되묻고 싶어집니다.

   크리스마스에 눈이 오시는 것보다 백만 배는 더 어려워 보이는 이 기적을 정말 소망해야 할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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