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정수 Sep 08. 2024

C25. 개념의 오류 위에 세운 복합 스토리텔링의 파탄

  - 조근현, 〈흥부〉

C25. 개념의 오류 위에 세운 복합 스토리텔링의 파탄 – 조근현, 〈흥부〉(2007)

개념의 오류 하나 – 거듭남 또는 변신

   영화 〈흥부〉는 그 스토리가 처음부터 몇 가지 심각한 개념의 오류에 기반하여 출발한 탓인지, 전체적으로 극적 개연성이 떨어지는 사태를 면치 못한 느낌입니다.

   첫째 오류는, 음란소설의 작가인 흥부(정우)에 대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탁월한 재주가 있는 자’라는 규정입니다. 여기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것은 당연히 흥부가 쓴 소설이 독자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뜻일 것입니다.

   물론, 흥부가 썼다는 음란소설이 구체적으로 어떤 문장, 어떤 묘사, 어떤 표현으로 된 어떤 내용의 소설인지를 극 속에서는 확인할 길이 없으므로 정확한 판정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음란소설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표현에는 얼마간 형용모순의 느낌이 있습니다. 우리는 음란소설에 대해서 그것이 사람의 말초신경을 자극한다는 식으로는 말해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고는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이 양보해서, 흥부가 쓴 음란소설은 매우 특이하게도 말초신경을 자극하기보다는 마음을 움직인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진술은 아무래도 억지스러운 느낌입니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자기를 찾아온 김삿갓(정상훈)에게 흥부는 분명히 자기가 풍기 문란한 소설을 썼다는 이유로 벌금 백 냥에 곤장 몇 대 처맞고 왔다며 자조적으로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흥부는 아주 당당하게 덧붙입니다.

   “남녀가 몸 섞다가 여자 뒤지는 소리가 뭐가 풍기문란이오?

   김삿갓도 거듭니다.

   “자네가 왜 온갖 멸시를 받으며 흥행작만 써온 글쟁이가 되었나? 바로 자네 이름 석 자를 조선팔도에 알려서 놀부 형이 찾아올 수 있게 함이지.

   글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작가가 칭송을 받지는 못할망정 어째서 ‘온갖 멸시’를 받았을까요.

   그러니까 흥부의 글재주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재주’라는 등식은 처음부터 성립하지 않는 전제로서 명백한 오류입니다.

   이어지는 이 영화의 스토리도 흥부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재주’를 갖고 있다는 전제 위에서 펼쳐지기 때문에 개별 설정들 사이의 인과관계가 매우 부실해졌다는 혐의를 지울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재주가 어째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재주일 수 있는지도 의심스러운 마당에, 그런 재주가 혁명가의 각성으로까지 이어진다는 설정이 어떻게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까요.

   음란소설과 《흥부전》 사이의 거리보다 음란소설 작가와 혁명가 사이가 훨씬 더 멀게 느껴집니다. 그러니까, 음란소설을 쓰던 작가가 《흥부전》을 쓸 수는 있을 것 같지만, 《흥부전》을 밤새워 집필하던 작가가 하루아침에 혁명가로 거듭난다는 설정은 아무래도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달리 말하면, 책상머리에서 글만 쓰던 사람, 곧 책상물림이 어느새 혁명가로 변신하는 과정을 영화가 충분히 개연성 있게 묘사하지 않았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따라서 영화 〈흥부〉는 그 부분을 채워 넣어서 러닝 타임을 좀 더 늘렸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개념의 오류 둘 – 과거형 또는 완성형

   영화 〈흥부〉의 부제는 ‘글로 세상을 바꾼 자’입니다.

   왜 ‘바꾸려는’이나 ‘바꾸려던’이라고 하지 않고 ‘바꾼’이라고 했을까요.

   ‘바꾸려는’이나 ‘바꾸려던’은 의지의 표현이면서 동시에 실패를 암시하는 표현이라서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지만, ‘바꾼’은 명백한 과거형이라서 세상이 실제로 바뀌었다는 뜻을 품고 있는 표현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부제대로라면, 흥부가 정말 글로 세상을 바꾸었다는, 또는 바꾸는 데 정말로 성공했다는 뜻이 되고 맙니다.

   게다가 이 영화는 오프닝에서 ‘1848년 헌종 즉위 14년’이라고, 시간적 배경을 명확히 특정해 놓고 시작합니다.

   따라서 관객은 이 영화의 부제를 그 시기에 흥부는 글로써 세상을 바꾸었다는, 곧 혁명에 성공했다는 뜻으로 새길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조선이 그 시기에 적절히 필요한 만큼 바뀌지 못해서 머지않아 결국 망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닙니까.

   그것도 역성혁명이 성공하여 왕조가 교체되거나, 혁명이 일어나 왕조 국가가 민주공화국이 되는 체제 변혁 식의 바뀜이 아니라, 외세의 침탈에 맥없이 무릎을 꿇은 굴욕적인 국권 상실이었습니다.

   그것은 이미 왕의 나라도, 백성의 나라도 아니었으니, 그야말로 최악의 결과였던 셈입니다. 따라서 ‘바꾼’이라는 완성형 표현은 명백히 오류로, 거짓 진술에 해당한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흥부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흥부가 글로 세상을 ‘바꾼’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거기에 개연성이나 설득력이 넉넉하게 있을 턱이 없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개념의 오류 셋 – 진술

   흥부의 과거 회상 장면을 보면, 흥부의 형인 놀부는 난리 통에 목숨을 잃은 아이들의 시체들 가운데서 동생 흥부를 살리기 위해 그더러 죽은 척하라고 시키고는 기지를 발휘하여 자기만 누군가에게 잡혀갑니다.

   그 직전에 놀부는 어떻게 알았는지, 흥부에게 저들은 살아 있는 아이들을 모아 청나라로 보낸다고 말합니다. 맥락을 따져보면 일종의 인신매매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다면 김삿갓의 말대로 애초 흥부가 자기 ‘이름 석 자를 조선팔도에 알려서 놀부 형(진구)이 찾아올 수 있게’ 하려고 음란소설을 열심히 썼다는 것은 역시 모순으로, 거짓 진술에 해당한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청나라로 팔려 간 형이 자기를 찾아오게 하려면 ‘조선팔도’가 아니라 ‘청나라’에 알려야 할 테니까 말입니다. 그러니까 흥부는 조선이 아니라 청나라에 가서 놀부 찾기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영화를 주의 깊게 살펴봐도 흥부는 조선팔도를 떠난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 보니, 뒤이어 펼쳐지는 이야기의 개연성도 덩달아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형의 소식을 듣기 위해 조혁(김주혁)이라는 인물을 만났을 때 흥부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때 달구지에 형을 싣고 간 사람이 어르신이라고 들었소이다.

   여기서 ‘어르신’은 조혁을 가리키고, 흥부가 ‘들었다’는 것은 조혁을 만나기 직전에 들었다는 뜻입니다.

   이는 결국, 그때 놀부를 다른 생존자 아이들과 함께 달구지에 싣고 간 사람들이 청나라에 아이들을 팔아먹으려던 인신매매단이 아니라, 그 아이들을 구제하여 돌보려던 조혁이었다는 사실을 흥부가 그제야 알았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 진술로도 그동안 흥부가 청나라에 자기를 알리려는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고 국내에, 그러니까 조선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는 이상한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 흥부는 영화에도 여러 차례 나오듯, 한문이 아니라 언문(諺文), 곧 한글로 글을 쓰는 사람입니다.

   청나라에 자기를 알려서 형에게 자기 소식이 전해지기를 바라는 사람이라면 직접 청나라로 가지는 못할지언정, 적어도 한글이 아니라 한문으로는 글을 쓰는 게 논리적으로 맞지 않을까요.

   그래도 한문 소설이라면 한글 소설보다는 청나라에서도 이름을 알릴 수 있는 가능성이 훨씬 더 높지 않겠습니까.


개념의 오류 넷 - 주인공

   영화 〈흥부〉의 주인공은 물론 흥부입니다. 하지만 이 흥부는 모두 네 명입니다.

   음란소설 작가로 《흥부전》을 쓰게 되는 흥부가 그 하나요, 《흥부전》의 주인공으로서 등장인물의 하나인 흥부가 그 둘이요, 《흥부전》의 주인공인 흥부의 실제 모델인 조혁이 그 셋이요, 마지막은 흥부가 새로 쓴 《신흥부전》의 주인공인 흥부입니다.

   여기에 혁명가로 거듭난 흥부를 또 하나의 캐릭터로 추가한다면, 영화 〈흥부〉에 나오는 흥부는 모두 다섯 명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도대체 어떤 흥부가 실질적인 주인공인지 헷갈리는 것도 당연합니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가 이 넷 가운데 어떤 흥부에 초점을 맞추고 서사를 밀고 나아가고 있는지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쿠키 영상이 나오기 전의 맨 마지막 장면에서 흥부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표표히 길을 떠납니다. 한데, 그게 결코 혁명가의 모습으로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실제로는 그렇지도 않지만, 마침내 글로 세상을 바꾸었으니, 자기가 할 일은 다 끝났고, 이제는 모든 걸 뒤로 하고 어딘가에 은거하려고 떠나는 것인지, 아니면 이제부터 혁명가를 그만두고 다시 집필에 몰두하기 위해서 떠나는 것인지, 어느 쪽도 명확하지 않은 결말입니다.

   설사 이걸 열린 결말이라고 너그럽게 이해하려고 해도 개운치 않은 뒷맛이 남는 것은 피하기 어렵습니다.

   조선이 세도정치의 복마전 속에서 확실히 망해가던 그 시기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흥부의 태도는 아무래도 선뜻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글쎄요, 상업영화에서 해피엔딩에 대한 강박이 빚어낸 장면일까요?


복합 스토리텔링

   보통 〈흥부〉 하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흥부전》을 스토리텔링 한 작품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아주 틀린 이야기는 아닙니다.

   하지만, 이 영화 〈흥부〉는 여러 개의 스토리텔링, 또는 여러 차례의 스토리텔링 행위가 중첩되어 있다는 점에서 전체 구조가 갈피를 못 잡고 혼돈된 상태에 머무는 느낌이 짙습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이 영화의 시나리오 작가나 감독이 이야기 구조를 중층적으로 만들기 위해 지나치게 욕심을 부린 것이 아닌가 하는 혐의가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우선 극 중에서 흥부가 집필한 전통적인 고전소설로서 《흥부전》이 있습니다. 이건 흥부가 조혁과 조항리(정진영) 형제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스토리텔링 한 작품입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이것은 작자미상의 《흥부전》을 누가 어떻게 쓰게 되었는가를 순전히 상상력으로 꾸며서 보여주는 허구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그래서 이 영화가 원래의 《흥부전》을 가지고 스토리텔링을 했다고 단순하게 진술하기에는 어딘가 충분하지 않은 느낌입니다.

   다음은 극 중에서 각성하여 혁명가로 거듭난 흥부가 ‘새로 쓴’ 《신흥부전》이 있습니다. 이건 《흥부전》을 기초로 하긴 했지만, 《흥부전》 출간 이후에 흥부가 보고 겪고 느낀 일들을 토대로 조항리의 역모를 무너뜨리겠다는 명백한 의도 아래 공연의 대본으로 스토리텔링한 것입니다. 아마도 부제인 ‘글로 세상을 바꾼 자’에 해당하는 흥부가 바로 이 흥부일 것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원래의 작자미상인 우리 고전소설 《흥부전》에서 기획이 출발했다고 볼 수밖에 없는 영화 〈흥부〉 전체가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원래의 《흥부전》을 바탕으로 스토리텔링한 것이라고 할 수밖에는 없지만, 실제 《흥부전》의 스토리 라인과는 크게 관계가 없습니다.

   박이 터져 흥부가 복을 받는 이야기도, 박이 터져 놀부가 혼이 나는 이야기도, 마지막에 놀부와 흥부 형제간의 화해의 서사도 이 영화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저 잠시 남사당패의 저잣거리 공연의 한 장면으로 등장했다가 지나갈 뿐입니다.

   무엇보다도 영화 〈흥부〉에서 놀부와 흥부 형제는 처음부터 의가 좋았고, 조항리와 조혁은 처음부터 철천지원수의 관계로 설정되어 있기에 영화 속에는 형제 사이의 감정이 화해를 겨냥해서 변화하는 지점 자체가 없습니다.

   이는 사람이란 그리 쉽게 변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점에서 어느 정도 리얼리티를 획득한 설정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물론, 《흥부전》 속에 형제가 화해하고 우애를 회복하는 테마가 들어간 것은 이 소설을 쓴 흥부와 그의 형인 각기장군 놀부가 처음부터 우애가 깊은 사이였기 때문에 그걸 반영한 결과로 볼 수는 있겠습니다.

   아무리 조항리와 조혁 형제의 불화를 소재로 글을 썼다고 해도 형에 대한 감정이 그토록 애틋한 흥부가 결말조차 그렇게 불화한 상태로 끝내고 싶지는 않았겠지요.


선출 혹은 《심청전》의 작자

   이 영화 〈흥부〉에서 제가 가장 이상하게 느꼈던 인물이 바로 이 선출(천우희)이라는 캐릭터입니다. 선출은 왜 있는 것일까요? 또, 선출은 굳이 왜 남장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적어도 저는 영화 〈흥부〉의 주요 등장인물들 가운데서 이 선출 캐릭터에 대해서만큼은 극적 필연성을 느끼기 어려웠습니다.

   물론, 감초 같은 존재로 주인공인 흥부를 보조하는 역할이라는 쓰임새는 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걸 뛰어넘는 존재 이유는 찾기 어려웠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인물은 나중에 《심청전》의 작가로 세간에 알려지게 되지 않습니까.

   아니, 그가 쓴 《심청전》이 흥부의 배려 하에 출간되어 세상 속으로 나아가지 않습니까.

   그 정도로 중요한 인물이 이 정도로 비중이 낮게 그려진다는 것도 이야기의 균형이라는 측면에서 따져볼 때 고개가 갸우뚱거려지는 점입니다. 우리 고전소설인 원래의 《심청전》도 작자미상이기 때문에 그녀도 결국 《흥부전》의 작자인 흥부가 잊혔듯이 잊힌 게 틀림없습니다.

   조혁만이 아니라, 이 선출마저 조항리의 칼에 목숨을 잃었으니, 같은 자리에서 국문을 받던 흥부가 살아남은 것 또한 아무래도 미심쩍습니다. 굳이 가리자면, 주범은 분명 흥부고, 선출은 다만 종범에 지나지 않는데도 어째서 그래야만 했을까요?

   물론, 뒤에 궁중에서 열릴 《신흥부전》 공연에서 조항리의 역모를 무너뜨리는 역할을 해야 하므로 흥부는 반드시 살아야겠지만, 흥부를 살린 과정의 논리성 또는 인과성이 충분히 가슴에 와닿도록 묘사되지 않은 느낌인 것도 이 영화가 지닌 약점의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민란 또는 혁명의 의미

   우리나라 사극 영화들의 경향을 살펴보면 대체로, 폭군이었던 연산군을 다루는 경우 정도를 제외한다면, 왕은 성군이거나 큰 문제가 없는데, 신하들이 백성의 삶은 돌보지 않고 서로 정쟁만 벌이느라 나라 살림이 어려워지고 국정이 어지러워진다는 시각이 주를 이루는 양상인 것 같습니다.

   이 영화 〈흥부〉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이 영화에 나오는 헌종(정해인)은 매우 무기력하여 국정 전반을 장악할 힘이 없는 임금이기는 하지만, 폭군은 분명히 아닙니다.

   그래서인지, 흥부가 백성들을 동원하여 일으키는 난은 왕조를 뒤엎는 혁명이 아니라, 역모를 꾸미는 세력을 처단함으로써 기존의 왕조를 지키는 것을 목표로 삼습니다.

   상황이 다 수습되고 마지막에 흥부가 헌종 앞에 엎드려 절하며, 어색하기 짝이 없는 분위기에서, 성군이 되어달라고 아뢰는 것도 그 난의 목표가 왕조를 뒤엎고 새 세상을 여는 것이 아니라, 역모를 꾸미는 세력으로부터 왕조를 지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실제로 흥부가 무엇을 바랐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역사는 그것이 결국 아무것도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을 가르쳐줄 뿐입니다.

   왕권은 계속 약화 일로를 걸었고, 세도정치는 점점 더 기세등등해졌고, 그러다 마침내 외세의 침략에 나라를 내어주는 참담한 사태를 향하여 돌진해 간 것이 조선의 운명 아니었습니까.

   그러니 도대체 ‘세상을 바꾼’이라는 인식은 어디에 근거를 둔 것입니까? 따라서 이 마지막 순간 혁명 전사로서 흥부의 정체성은 그 개념 자체가 매우 혼란스럽습니다.

   이 영화의 극적 설득력이 충분하지 않다고 평가할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런 개념의 오류와 혼란 위에 스토리텔링이 이루어졌고, 총체적인 난국 또는 전반적인 파탄의 느낌 속에 이야기가 적절히 수습되지 못한 채 그냥 끝난 탓이 아닐까 싶습니다.  *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