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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수 Sep 15. 2024

C26. 조선시대 슈퍼히어로 이야기의 스토리텔링 방법

  - 최동훈, 〈전우치〉

C26. 조선시대 슈퍼히어로 이야기의 스토리텔링 방법 – 최동훈, 〈전우치〉(2009)

목적지를 알 수 없는 이야기

   작자미상의 우리 고전소설 《전우치전》은 십여 개의 삽화들이 특별한 인과관계 없이 나열되어 있는 병렬식 구성입니다. 따라서 어디를 향해서 나아가는 이야기인지가 분명치 않습니다.

   이 점에서 《전우치전》은 손오공을 포함한 삼장법사 일행이 천축국을 향해서 간다는 목적이 뚜렷한 중국 고전소설 《서유기》와 다릅니다.

   또한, 도술을 활용하여 힘없고 가난한 백성을 위하고, 탐관오리를 혼내주는 전우치의 다양한 활약상을 보여주는 데 주력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또 다른 우리 고전소설 《홍길동전》과 비슷하지요.

   이런 지향 없는 병렬식 구성의 이야기에서 돋보이는 것은 역시 주인공인 전우치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정의로운 슈퍼히어로라고 하면 될까요.

   상업영화의 주인공으로서는 퍽이나 매력적인 캐릭터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병렬식 구성은, 달리 말하면, 스토리상의 이렇다 할 기승전결이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곧, 이야기로서의 매력도는 떨어진다는 의미지요.

   그렇다면 이걸 원작으로 삼아 영화를 만들 때 그 스토리텔링의 전략은 명확합니다. 주인공의 매력을 최대한 활용하거나 끌어올리면서 동시에 이야기 구조의 기승전결을 재미있고 흥미롭게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슈퍼히어로 vs 슈퍼빌런

   영화의 주인공이 슈퍼히어로라면 당연히 그 슈퍼히어로를 괴롭히거나 방해하는, 더 나아가 위협하는 슈퍼빌런의 존재가 필수적입니다.

   천하무적의 슈퍼히어로인 슈퍼맨에게도 언제나, 〈배트맨 대 슈퍼맨 : 저스티스의 시작〉(2016)의 둠스데이처럼, 그의 생명을 위태롭게 할 만큼의 어마어마한 슈퍼빌런이 있게 마련이고, 온갖 슈퍼히어로들의 집합체인 어벤저스에게도 타노스라는 가공할 만한 슈퍼빌런이 있어서 서로 간에 얼른 우열이 갈리지 않는 극한의 대결 국면을 펼치게 마련입니다.

   그러면 관객의 눈길을 붙잡아둘 스토리의 기승전결은 자연스럽게 짜입니다. 둘 사이의 용호상박의 대결 끝에 슈퍼빌런이 패배하고 슈퍼히어로가 승리하는 결말이 스토리의 목적지가 되는 것이지요.

   영화 〈전우치〉도 맨 먼저 전우치라는 슈퍼히어로의 상대역으로 어떤 빌런을 설정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하는 것으로부터 스토리텔링 작업을 시작했을 법합니다.

   하지만 〈전우치〉는 가공의 빌런을 창조해 내기보다는 원작소설 《전우치전》에서 빌런 역을 맡길 만한 캐릭터를 찾기로 한 모양입니다.

   《전우치전》의 맨 마지막에 느닷없이 등장하여 전우치를 세상일로부터 떠나 진정으로 도를 닦는 길에 들어서도록 인도하여 이야기를 끝내는 역할을 맡은, 저 ‘도학(道學)이 높고 마음이 청정하여 세상 명리(名利)를 구치 아니하며, 다만 박전(薄田:메마른 밭) 다섯 이랑과 화원(花園) 10간으로 세월을 보내’는 ‘지상선(地上仙:이 세상에 존재하는 신선)’ 서화담(徐花潭)이 바로 그입니다.


빌런으로서 화담의 정체

   소설에서 전우치를 뛰어넘는 도력(道力)의 소유자로 나온다는 점에서 화담은 우선 빌런으로서 그 기본 자격은 갖춘 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만 소설에서 화담은 명백한 악역이 아니기에, 그를 악역으로 만들기 위해 영화에서는 먼저 그가 자신의 정체성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으로 설정하여, 중반부까지 관객은 그가 빌런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인지하기가 어렵습니다.

   실제로 영화에서 그는 신선들에게 요괴를 물리칠 수 있는 능력자로 인정받음은 물론, 높은 도력을 지녔다는 점에서 신선들의 존경을 받는 처지이기도 하니까요. 더욱이 평소에는 의원(醫員)으로 백성들에게 의술을 베풀고 있기도 하지 않습니까.

   화담은 자기 몸에서 요괴의 가장 핵심이 되는 신체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초록색 피가 흐르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비로소 요괴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합니다. 관객이 그를 빌런인 요괴로 명확히 인지하는 것도 바로 이 순간이지요.

   동시에, 영화가 명백히 슈퍼히어로인 전우치와 슈퍼빌런인 서화담의 대결 국면으로 접어드는 것도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입니다.

   말하자면, 이 지점을 관객은 서화담의 정체가 밝혀지고 이야기가 흥미진진한 국면으로 넘어가는 일종의 반전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반전 또한 스토리의 필수 요소 가운데 하나 아닙니까.


피리 쟁탈전

   상대역인 빌런이 결정되었다면, 이제 남은 것은 둘 사이에 벌어질 대결의 내용, 곧 무엇을 위해서, 무엇 때문에 둘이 싸우게 되는가, 하는 점입니다.

   소설 《전우치전》에는 이 둘 사이의 대결 설정이 아예 없기에 영화 〈전우치〉에서 이 부분은 전적으로 창작인 셈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화의 성패도 바로 이 대결의 내용을 어떤 것으로 어떻게 채우느냐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영화의 스토리 전체도 바로 이 대결의 내용 위에 세워져 있고요.

   이를 위해 영화는 아주 오랜 옛날, 곧 태초까지 거슬러 올라가 일종의 전설과 같은 상황을 도입합니다. 도입부의 내레이션에 그 내용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태초에 땅에서는 인간과 짐승이 조화로웠고, 하늘 깊숙한 감옥에는 요괴들이 갇혀 있었다. 도력 높은 신선 표훈대덕은 신비한 피리를 삼천 일 동안 불며 요괴의 마성을 잠재우고 있었다. 삼천 일의 마지막 날 열렸어야 될 감옥문이 그곳을 지키던 미관말직 신선 셋의 실수로 하루 먼저 열리고 말았다. 바로 그 순간 요괴들의 마성은 다시 깨어났고, 표훈대덕의 피리는 사악한 기운에 묻혔다. 요괴들은 모두 피리의 주인이 되고 싶었다. 피리를 빼앗긴 표훈대덕은 요괴의 마성에 젖은 채 지상으로 떨어졌다.

   ‘마성에 빠진 표훈대덕과 요괴들은 지상으로 쫓겨와 인간의 모습으로 숨어들었고, 자신이 누구였는지, 그 기억마저도 잃어버렸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오직 피리를 가진 자만이 요괴들을 다스릴 수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니까 예전처럼 다시금 요괴들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이 신비한 피리가 필요하고, 요괴들로서는 이 피리를 자기들 손에 넣어야 ‘다스려지는’ 상황을 피할 수 있는 셈이니, 결국 영화 〈전우치〉에서 전우치와 서화담 사이의 대결은 이 피리를 두고 벌이는 쟁탈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스토리텔링의 최종 목적지가 정해졌습니다. 피리가 서화담의 손에 들어가느냐, 전우치의 손에 들어가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추가된 캐릭터들

   주인공과 상대역이 정해지고, 이야기의 큰 틀이 결정되었다면, 이제 남은 것은 원작 소설 《전우치전》에는 없는 어떤 조연급 캐릭터들로 영화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 것이냐, 하는 점입니다. 조연급 캐릭터들이 매력적이고 다양하면, 거기에서 영화의 잔재미로 기능하는 크고 작은 많은 에피소드를 만들어낼 수 있게 될 테니까요.

   우선, 영화의 주인공에게는 언제나 감초처럼 따라다니는 조력자 캐릭터 초랭이가 있습니다. 영화 속에서 초랭이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개로, 평소에는 사람 모습이다가 상황에 따라서 말(馬)로도 변하면서 극을 가볍고 신명 나는 활극의 분위기로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합니다.

   마지막 순간 초랭이는 수컷이 아니라 암컷으로 밝혀지는데, 다소 엉뚱하지만, 이 또한 감초 역할인 초랭이의 느낌에 어울리는 반전입니다.

   다음은, 도입부의 내레이션에서 언급된 미관말직의 신선(神仙) 셋입니다. 이들도 삼천 일을 다 채우지 못하고 하루 먼저 감옥문을 여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질러 요괴들이 풀려나게 만들었다는 사실로도 미루어 알 수 있듯, 매우 어리숙한 인물들입니다.

   초랭이와 더불어 역시 극을 코믹한 분위기로 만드는 데 일조하는 캐릭터들이지요.

   또, 전우치의 스승인 천관대사가 있습니다. 그는 영화에서 도학(道學)의 정수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천방지축인 전우치를 스승으로서 바로잡는 역할을 함으로써 주인공으로서 전우치가 마땅히 갖추고 있어야 할 품격의 최저선을 유지시켜 줍니다.

   무엇보다도 극의 중반부에서 아직 도력이 모자란 전우치를 대신하여 화담과 대등하게 맞섬으로써 전우치와 화담 사이의 결정적인 대결을 극의 마지막 순간까지 유예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합니다.

   그리고 앞서 삼천 일 동안 피리를 불어 요괴의 마성을 잠재우던 표훈대덕이 있습니다. 여기에도 반전이 있어서, 나중에 극 중 임수경이 맡은 서인경이 표훈대덕으로 밝혀지는데, 전우치와 서화담의 마지막 대결에서 서화담의 옆구리에 벚나무 줄기를 꽂아 결정타를 먹임으로써 전우치의 승리로 대결이 마무리되도록 하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합니다.


오백 년의 시간을 넘어서

   영화 〈전우치〉가 고전소설 〈전우치전〉과 가장 크게 다른 점은 뭐니 뭐니 해도 역시 중간에 시대 배경이 현대로 바뀐다는 점일 것입니다.

   물론 영화의 분위기가 무겁거나 진지하지 않은 탓에, 오백 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나 마침내 그림 속 봉인이 풀려 갑자기 현대로 소환되어 나왔는데도 전우치는 이렇다 할 정서적인 어려움을 겪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점, 비슷하게 과거와 현재로 시대 배경을 넘나드는 예전의 영화 〈은행나무침대〉(1996)의 진지함과는 매우 다르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듯 영화에서 공간적 배경이 현대 서울의 도심으로 바뀐 덕에 전우치가 초랭이와 그 주변 캐릭터들과 함께 엮어내는 에피소드들을 훨씬 더 흥미롭고 다양하게 만들어낼 수 있는 여지가 생겼습니다.

   표훈대덕을 영화배우의 매니저로 설정하여 영화 촬영 현장을 이야기 속에 끌어들인 것도, 도사 전우치의 비현실성과 영화의 판타지스러운 성격을 자연스럽게 서로 만나게 하여 상징적인 의미맥락을 만들어내는 효과가 있다는 점에서 유의미한 스토리텔링이라고 여겨집니다.

   실제로 전우치와 서화담의 마지막 대결이 영화를 촬영하는 야외 세트장에서 벌어진다는 점도 매우 상징적입니다. 이 장면에서 영화의 특수효과는 마치 도술처럼 보이고, 도술은 마치 특수효과처럼 보입니다.


멜로와 무협

   아마도 전우치가 정의롭고 선하면서도 워낙 가볍고 활달하고 쿨한 캐릭터인 점에 충실하려는 의도 때문인지, 전우치와 서인경(표훈대덕) 사이의 멜로 설정을 더 밀고 나아가서 심화시키지 않은 것은 개인적으로 조금 아쉽지만, 영화 전체의 정서가 워낙 가벼운 활극 풍이어서 크게 문제가 된다는 느낌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도술이 액션의 핵심인 탓인지, ‘협(俠)’을 앞세우는 무협영화의 진지함도 들어설 여지가 없다는 점에서 영화 〈전우치〉의 자리는 명확합니다.

   이처럼, 여러 가지 설정을 뒤섞어서 잡탕처럼 만들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이 점을 절제하여 영화의 성격을 명확히 견지해 냈다는 점에서 영화 〈전우치〉의 스토리텔링은 나름의 성과를 얻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떻게 끝낼 것인가?

   영화를 어떻게 끝낼지에 대해서도 스토리텔링의 마지막 과정으로서 매우 고민스러웠을 법합니다.

   고전소설 《전우치전》이 서화담과 전우치가 은거하며 도를 닦는 것으로 끝나는 설정인 것을 감안한다면, 영화 촬영 세트장에서 전우치가 서화담과 마지막 대결을 펼치던 중 갑자기 꿈에서 깨어나 스승인 천관대사와 초랭이를 초막에서 만나는 장면에서 이야기를 끝내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은 선택지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천관대사는, 어떻게 된 셈인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하는 전우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 놈이 하도 잡생각이 많아서 내가 꿈으로 다스려준 것이니라.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모든 이야기는 《구운몽》을 비롯한 몽유록계(夢遊錄系) 소설처럼 그야말로 일장춘몽으로, 인생무상이 주제가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랬다면 〈전우치〉는 ‘조신 설화’가 바탕인 이광수의 소설 《꿈》을 원작으로 만든 배창호의 〈꿈〉(1990)과 같은 영화가 되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영화 〈전우치〉는 다른 길을 갑니다.

   이는 영화 촬영 현장을 영화 속에 끌어들여서 전우치와 서화담의 마지막 대결이 영화 세트장에서 벌어지도록 설정한 의도에서 이미 드러난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영화는 판타지라도 어디까지나 현실이니까, 전우치의 오백 년 세월을 넘나드는 활약도 현실이 아니면 안 되는 것입니다. 적어도 영화 속에서는요.

   그러니까 이것은 서화담의 최후의 한 수였던 셈인데, 전우치는 이에 속아 넘어가지 않습니다.

   결국 패배를 자인한 화담은 그림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감으로써 봉인되는 길을 택합니다. 물론 이들의 대결에서 문제의 피리는 누구의 손에도 들어가지 않고 박살이 나고요.


바다

   영화 〈전우치〉에는 하얀 모래사장 위 파란 하늘 밑의 푸른 바다 풍경이 두 번 나옵니다. 한 번은 과거에 전우치가 바다가 보고 싶다는 서인경에게 도술로 바다를 보여주는 장면이고, 또 한 번은 영화의 맨 마지막에 전우치가 서인경과 초랭이와 함께 사진 속의 바닷가로 간 장면입니다.

   한데, 첫 번째 바다 장면에서 전우치는 바다가 무엇인지 잘 모르는 것처럼 나오고, 두 번째 바다 장면에서 전우치는 언젠가 그 바다를 본 듯한 알 수 없는 기시감에 사로잡힙니다.

   이 두 개의 바다 장면이 스토리에서 어떤 구실을 하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영화의 중간과 끝에 배치되어 시각적으로 너무나 아름답고 정서적으로 탁 트인 해방감을 선사해 주는 탓에 이 두 개의 바다 장면은 마치 영화의 고유한 어떤 인장처럼 느껴집니다.

   원래는 표훈대덕이었던 서인경도, 천관대사의 제자로 도술을 닦던 전우치도 결국은 그렇듯 바다와 같은 자유로움을 지향했던 것이 아닐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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