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로사와 아키라, 〈조용한 결투〉
C22. 인간이 참으로 인간다웠을 때 – 구로사와 아키라, 〈조용한 결투〉(1949)
결투라는 제목
오해 또는 편견을 불러일으키는 제목들이 있습니다. 그 하나가 ‘결투’입니다.
원제를 직역한 것은 아니지만, 같은 이야기의 두 가지 버전인 존 포드의 〈황야의 결투(My Darling Clementine)〉(1946)나 존 스터지스의 〈OK 목장의 결투(Gunfight At The O.K. Corral)〉(1957)는 아마도 ‘결투’라는 제목의 의미를 가장 즉물적으로 구현한 영화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그 수단이 주먹이든 총이든, 대개는 몸과 몸이 맞부딪는 일대 격돌을 내용으로 하는 영화들은 흔히 ‘결투’라는 말을 제목으로 삼거나, 아니면 적어도 ‘결투’의 상황을 이야기의 일부로 포함하고 있지요.
따라서 〈조용한 결투(静かなる決鬪)〉라는 제목도 우선은 관객에게 얼마간 그런 쪽의 박진감 넘치는 대결의 장면을 기대하게 만듭니다.
물론, 예민한 관객이라면 ‘결투’라는 말 앞에 ‘조용한(静かなる)’이라는, 어찌 보면 사뭇 어울리지 않는, 어딘가 궁합이 잘 맞지 않는 느낌을 주는 단서가 붙어 있다는 데서 힌트를 얻어 본능적으로 조금은 달리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기는 합니다.
예컨대, 존 슐레진저의 〈한밤의 카우보이(Midnight Cowboy)〉(1975) 같은 경우, 역시 ‘카우보이’라는 말 앞에 ‘한밤의(Midnight)’라는 단서가 붙어 있으니, 이 영화가 서부의 무법자 총잡이들이 뜨거운 태양 아래 서로 숨 막히는 ‘총싸움(gunfight)’을 벌이는 내용의 영화가 아니리라는 지레짐작 정도는 어지간히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어쨌거나, 적어도 ‘조용한’이라는 단서가 붙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 영화 〈조용한 결투〉가 살벌하게 주먹이 오가거나 총격전의 아비규환이 벌어지는 내용이 아니리라는 정도는 누구나 쉽게 추측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조용한 결투〉는 한 사내의 ‘내면의 결투’를 다루고 있는 영화입니다.
내면의 결투
당연히 이 내면의 결투는 구로사와 아키라가 평생토록 추구한 몇 가지 주제들의 범주에 당당히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 결투는, 지금은 조금 달라진 기류가 느껴지기는 하지만, 한동안, 아니, 꽤 오랫동안 영화의 역사가 이상하리만큼 거의 완전히 잊어버리거나, 또는 고의로 방기해 버린 혐의가 짙은, 저 양심과 도덕과 윤리와 배려와 애정과 용기와 같은 고전적인 인간의 덕목들과 관련이 있는 결투입니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페르소나라 해도 과언이 아닐 미후네 도시로가 연기한 이 영화의 주인공 사내는 종군(從軍)의 경험을 지닌 의사입니다.
때는 전후(戰後) 일본의 피폐한 사회, 그러니까 인간이 인간으로서 마땅히 지니고 추구해야 할 덕목들이 잔혹하리만큼 팍팍한 삶의 국면에 처하여 거의 맥을 추지 못하던 살벌한 시기입니다.
물론 저의 관심을 끈 이 영화의 첫째 요소는 감독 구로사와 아키라고, 둘째 요소는 배우 미후네 도시로와 시무라 다카시입니다.
이 영화에서 시무라 다카시와 미후네 도시로는 부자(父子) 관계로 나오며, 둘 다 의사입니다.
그러니까 미후네 도시로는 아들로서 아버지 시무라 다카시의 가업을 계승하고 있는 셈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영화는 〈7인의 사무라이〉(1954)와 더불어 이 두 대배우를 한 프레임에서 볼 수 있는 드문 사례인 셈이지요.
하지만 영화가 시작하고 채 10분도 지나기 전에 저는 애초의 제 기대를 훌쩍 뛰어넘는 매우 흥미로운 테마와 만났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조용한’ 결투의 진면목이 때 이르게 벌써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으니까요.
하지만 신기하게도 테마를 미리 짐작할 수 있다는 사실이 보는 사람을 심드렁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야기의 전개를 악착같이 쫓아가도록 자극하는 것은 역시 구로사와 아키라의 연출력 덕분일까요.
저는 그 순간부터 이 테마의 전개 과정과 그 결말에 대한 궁금증으로 조바심치기 시작했습니다.
감염된 의사
아마도 ‘매독(梅毒)’이라는 소재를 이렇게 본격적으로 다룬 영화가 또 있을까 싶습니다. 적어도 제가 아는 범위에서는 그렇습니다.
암이나 에이즈를 소재로 다룬 사례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떠올려 보면, 그 희소성만으로도 이 영화는 충분히 제게 흥미로웠습니다.
얼마 전, 일본에서 매독이 새삼스럽게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는 외신을 접했을 때 제 머릿속에는 이 영화가 제일 먼저 떠올랐습니다.
군의관으로 종군하던 이 영화의 주인공 후카사키 쿄지(미후네 도시로)가 매독에 걸린 부상병을 수술하던 중 아차 하는 순간의 실수로 그만 그 부상병의 피에 감염이 되면서 이야기는 본격적인 궤도에 오릅니다.
이는 일련의 의학 드라마에 필수적으로 나오는 저 응급실 상황에서 제법 흔히 볼 수 있는 이벤트이기도 하지요.
폭우가 쏟아지는 와중에 벌어지는 그 수술 과정의 긴박함과 긴장감을 규칙적으로 빗물이 떨어지는 소리(청각)를 활용하여 점진적으로 고조시켜 가는 감독의 솜씨는 마치 세르지오 레오네가 〈옛날 옛적 서부에서(Once Upon A Time In The West)〉(1968)의 초반부에 일종의 퍼포먼스처럼 연출했던 저 1대 3의 대결이 벌어지기 직전의 긴장감 넘치는 대목을 떠올리게 할 만큼 인상적입니다.
그러니까 바로 이 매독이 그의 ‘조용한 결투’의 빌미가 되는 것이지요.
전쟁 후일담 영화에서 상투적으로 나오는 저 참전 군인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따위와는 상당히 차원을 달리하는 테마인 셈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치료가 쉽지 않던 시절이라서 매독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데 이 영화의 독특함, 또는 구로사와 아키라스러움이 놓여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결투의 시작
그는 성실하고 양심적이고 정의로운 의사입니다. 한마디로, 인간의 도리와 명예에 대한 타고난 윤리 감각을 지닌 사람이라 할 수 있겠지요. 그런 그가 성병(性病)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매독에 걸린 것입니다.
실제 감염 경로야 어찌 되었든, 누가 매독에 걸렸다고 하면, 적어도 그 시대(1940년대)에는 먼저 당사자의 문란한 성생활부터 의심하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이지 않았을까요.
물론 그 자신이 의사니까 병의 치료 자체야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설사 치료에 시간은 많이 걸릴지언정, 그것이 당시의 의학 수준에서도 감당하기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는 우선 자신의 병을 숨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감독은 여기에 몇 가지 설정을 덧붙임으로써 그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결투의 양상을 좀 더 치열한 것으로 만드는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그는 전쟁이 끝나기 전부터 이미 약혼녀가 있는 처지입니다.
그 약혼녀는 착하고, 정숙하고, 지조가 있으며, 무엇보다도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습니다.
매독만 아니었더라면 예정대로 결혼식을 올리고 행복한 가정생활을 영위해 나갈 수 있었을, 참 잘 어울리는 한 쌍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결혼에 이르지 못합니다.
당연히 그는 약혼녀에게 자신이 매독에 걸렸다는 사실을 차마 털어놓지 못합니다. 매독이 완치되기 전에는 결혼할 수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의사로서 그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입니다.
한데, 그의 약혼녀는 바야흐로 병든 아버지 탓에 집안에서 결혼을 빨리 해야 한다는 압박까지 받고 있는 처지입니다.
어떻게 된 사정인지를 전혀 모르니, 약혼녀는 도저히 그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결국 약혼녀는 가슴 아프게도 그가 자신을 더는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며, 동시에 자신에게는 그의 마음을 돌려놓을 힘이 없음을 절감합니다.
한데도 그는 약혼녀에게 끝까지 그 사실을 숨깁니다. 따라서 약혼녀는 끝까지 그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보는 사람을 매우 갑갑하고 안타깝게 만드는 국면입니다.
설상가상의 복마전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부족하다고 판단했는지, 감독은 여기에 몇 가지 설정을 더 추가하여 이 딱한 의사를 더욱 벗어나기 어려운 궁지로 몰아넣습니다.
부도덕한 과거 전력 탓인지, 다소 불량스럽고 호의적이지 않은 간호사가 우연히 그의 비밀을 알아차리고 그를 오해하여 무턱대고 적의를 드러냅니다.
심지어 그에게 매독을 옮긴 병사는 임신한 아내와 더불어 그의 병원에 나타나 그를 괴롭히기까지 합니다.
여기에 믿었던 자식이 매독이라는 수치스러운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 아버지 시무라 다카시의 실망과 고뇌가 더해집니다. 그야말로 설상가상(雪上加霜)입니다.
이 모든 것이 복마전(伏魔殿)처럼 얽히고설켜서 펼쳐지는 영화의 중후반부는 구로사와 아키라 특유의 박력 있는 연출력이 빛을 발하는 대목입니다. 그야말로 장관이지요.
그는 주변의 모두에게 고루 마음이 쓰입니다. 약혼녀도 안쓰럽고, 간호사도 딱하고, 그 병사도 불쌍합니다. 아버지께는 한없이 죄송스럽습니다.
하지만 정말 안타까운 것은 그렇게 마음을 쓰면서도 그 역시 한갓 인간이기에 힘에 부치는 모습을 숨기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그렇다고 그런 그를 보면서 ‘굳이 저럴 필요까지야 있을까?’라거나 혹은 ‘왜 저렇게 유난을 떠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 우리들의 도덕감각이요 윤리의식일 뿐입니다. 그 시대의 정서를 지금의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그가 주변의 모든 사람을 위해서 동분서주하며 마음을 쓰는 모습은 한 마디로 눈물겹습니다.
그렇듯 태산처럼 한꺼번에 내리누르는 온갖 고뇌의 무게에 괴로워하는 인물을 배우로서 강인한 남성상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미후네 도시로가 아니라면 과연 그 누가 넉넉히 소화해 낼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결말입니다.
여기서 감독의 선택은 우리에게 이 영화가 겨냥하고 있는 과녁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만듭니다. 이 대목에서 해피엔딩이냐 아니냐는 번지수를 잘못 찾은 질문입니다.
그 시대가 필요로 했던 인간형
물론 이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을 조바심치게 만드는 것은 결국 이 두 남녀가 모든 난관을 뚫고 마침내 행복한 결혼에 도달할 것이냐 아니냐의 여부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제발 결혼에 성공하여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은 마음입니다. 해피엔딩에 대한 속절없는 갈망이지요.
하지만 〈조용한 결투〉는 남녀 사이의 연애 감정을 다룬 로맨스 영화가 아닙니다.
따라서 두 사람이 결혼에 이른다고 해피엔딩이라고 볼 이유도, 끝내 결혼하지 못한다고 해피엔딩이 아니라고 볼 이유도 없는 셈이지요. 이 점을 잊지 말아야 비로소 이 영화의 결말에 대한 감독의 선택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결말이 자아내는 감동은 우리의 허를 찌르는 것입니다.
두 사람은 끝내 결혼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는 의사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그 무엇’을 마침내 지켜냈습니다.
감독이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미후네 도시로가 의사로서 성심을 다하여 환자를 돌보는 모습으로 선택한 것은 바로 ‘그 무엇’을 보여주기 위해서라 할 수 있겠습니다.
어쩌면 당시 전후의, 물질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몹시 피폐하고 혼란스러웠던 일본 사회가 이런 ‘단단한’ 인간형을 간절히 필요로 했다고 말해야 할까요.
하지만 이 ‘그 무엇’을 한 마디로 딱 부러지게 규정하는 것은 이 영화가 마지막 순간까지 보여주었던 한 젊은 의사의 ‘조용한 결투’의 내용을 편협하게 축소하는 만행이 될지도 모릅니다.
굳이 규정하지 않아도 이 ‘그 무엇’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의 이마에 송골송골 돋아나 있는 땀방울들로 충분히 헤아릴 수 있을 듯한 기분이 듭니다.
그렇습니다. 모름지기 의사란, 아니, 직업이야 무엇이든, 인간이란 그래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 인간형을 더는 찾아보기 힘든 세상을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다는 자각은 참 뼈아픈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