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격양가(擊壤歌)〉_2
H02. 아, 태평성대로다! / 〈격양가(擊壤歌)〉_2
이제 마지막 다섯째 구입니다.
‘帝力於我何有哉(제력어아하유재)?’
끊어 읽기는 ‘재력/어아/하유재(재력어/아/하유재)’ 정도로 하면 되겠고요.
맨 앞의 글자는 ‘임금 제(帝)’자고, 어조사인 ‘於(어)’자와 ‘哉(재)’자는 여기서 각각 전치사와 의문종결사 정도로 보면 될 테니까 문맥에 잘 어울리도록 처리하면 되겠습니다.
‘何(하)’자는 ‘어찌’, ‘무엇’. ‘얼마’ 따위 의미로 고루 쓰이므로 역시 문맥을 잘 살펴보고 결정해야겠지요.
이제 차례로 적용해서 번역하면 이렇게 되겠습니다.
‘임금의 힘이 나(우리)한테 어찌 있겠는가?’
저는 여기서 ‘나 아(我)’자는 복수형으로 ‘우리’라고 번역해도 괜찮다는 생각입니다.
번역문만으로는 이 다섯째 구의 문의(文意)가 명확하게 짚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앞의 내용을 미루어서 판단하면 그리 어렵지는 않으리라 여겨집니다.
앞 네 구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당시 사람들이 영위하던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모습입니다. 당연히 그때는 농경문화 시대였으니, 당시의 일반적인 백성, 곧 농사짓는 사람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모습이지요.
여기서 평범하다는 것은 그만큼 이렇다 할 불상사 없이 하루하루가 평화롭다는 뜻입니다.
그 시대가 법과 제도는 물론이고 도덕과 윤리의 차원에서도 모든 것이 제대로 자리를 잡지 않은, 여러 가지 위험 요소가 즐비한, 한마디로 무도한 시대였다는 걸 감안하면 평범한 하루하루라는 것은 자연스럽게 태평성대라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별 탈 없이 평범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행복의 가장 중요한 기본 요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그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감사하고 소중한 것인지를 흔히 잊어버리고 엉뚱한 욕망만 좇다가 정작 우리 바로 곁에 있는 행복을 놓치는 우를 범하는 경우가 참 많지요. 네 잎 클로버의 행운만 찾아다니다가 정작 세 잎 클로버의 행복을 놓치는 것처럼요.
그러니까 〈격양가〉의 이 마디막 다섯째 구는 앞에서 선보인 그 평범하고 평화로운 삶의 모습을 한마디로 집약해서 강조하는 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요즘에는, 또는 요즘의 사회에 대해서는 거의 쓰지 않는, 어쩌면 ‘못 쓰는’, 나아가 ‘쓸 수 없는’ 말이겠지만, 당시에는 그런 평범하고 평화로운 삶을 가리켜 흔히 ‘태평성대(太平聖代)’라고 했지요.
그 평범하고 평화로움이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임금의 힘이 나(우리)한테 어찌 있겠느냐, 곧 임금이 나(우리)를 위해 애써서 뭘 해주는 게 있기는 한가, 하고 역설적으로 의문을 표할 만큼이라는 것입니다. 흔히 ‘임금의 힘이 나한테 무슨 소용인가?’ 정도 의미로 풀이되거나 번역되는 구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세상이, 자기 하루하루의 삶이 별걱정 없이 평화로울 때는 임금이나 대통령 같은 최고 정치 지도자 또는 최고 권력자를 떠올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든, 또 어떤 식으로든 삶이 힘들어지면 평소에는 별 관심도 없다가 비로소 그들을 떠올리며 그들의 실정을 탓하는 불평불만을 쏟아내기 마련입니다.
그러니까 백성들이 〈격양가〉의 화자(話者)처럼 ‘임금의 힘(帝力)’, 곧 임금의 정치 행위를 거의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그만큼 그 화자의 ‘지금 이 시대’가 큰 걱정 없이 살기 좋은 세상이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요임금 시대가 바로 그렇듯 백성들이 임금을 떠올리지 않으면서, 또는 의식하지 않으면서 평범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었던 태평성대였다는 이야기지요.
이제 〈격양가〉 전체를 보면 이렇습니다.
日出而作(일출이작) / 해 뜨면 일하고
日入而息(일입이식) / 해 지면 쉬네
鑿井而飮(착정이음) / 우물 파서 마시고
耕田而食(경전이식) / 밭 갈아서 먹네
帝力於我何有哉(제력어아하유재)? / 임금의 힘이 나(우리)한테 어찌 있겠는가?
이 노래(歌)와 관련해서는 널리 알려진, 고사(故事)라고 할 만한 배경 이야기가 있습니다.
요임금이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한 지 몇 해가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요임금은 어느 날 문득 지금 자신이 임금으로서 정치를 제대로 잘하고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또는, 은근히 걱정되었습니다. 이걸 확인하기 위해서 요임금은 백성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를 직접 살펴보아야겠다고 생각했지요. 그래 사람들 눈에 띄지 않도록 평범한 일반 백성처럼 차려입고 그들이 사는 데로 갔습니다.
그랬더니 어느 곳에서 노인들이 손에 쥔 나뭇가지로 박자를 맞추어 땅바닥을 두드리면서 위와 같은 가사의 노래를 즐겁게 부르고 있는 게 아닙니까. 그 노래를 가만히 귀담아듣고 나서 요임금은 비로소 자신이 정치를 잘하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당연히 요임금은 흐뭇한 마음으로 돌아갔고요.
물론 그런 경우 백성들이 자기의 공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섭섭해하거나 노하는 군주도 있을 수 있겠지요. 그래서 자신이 뭘 하는지 백성들이 알아주기를 바라면서 이런저런 거창한 청책들을 요란하게 펼치거나, 대규모 국책사업을 떠들썩하게 벌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무리할 수밖에 없고, 결국 사달이 나게 마련이지요.
그래도 백성을 위해서 뭔가를 하려고 노력한다는 점에서는 차라리 그런 군주가 정사는 돌보지 않고 향락에만 빠져 있는 군주나 백성들을 탄압하여 고혈을 짜내는 폭군보다는 낫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당시 백성들에게는 참 다행스럽게도, 요임금은 그렇듯 옹졸한 군주도, 어리석은 군주도, 한심한 군주도, 포악한 군주도 아니었던 것이지요.
백성을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해주는 군주와 그렇지 못한 군주의 차이는 이처럼 명확합니다. 오늘날이라고 어찌 다르겠습니까.
제목의 ‘擊壤(격양)’은 요임금이 목격한 예의 노인들이 땅바닥(壤 : 땅 양)을 나뭇가지로 두드리며(擊 : 칠 격) 노래를 부르던 모습을 표현한 말로, 후대에 지어 붙인 것입니다.
이 ‘擊壤(격양)’에 대해서는 이것이 당시에 유행하던 놀이의 일종이라는 설명도 있습니다. 이때 壤(양)은 나무로 만든 팽이의 일종으로,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이 경우 擊壤(격양)은 팽이들을 서로 맞부딪게(擊) 하면서 승패를 결정짓는 놀이를 뜻하는 말이 됩니다.
더불어, ‘격양’이 그저 돌멩이를 던져서 다른 돌멩이를 맞추는 놀이라는 설도 있고요. 우리로 치면 ‘비석치기(비사치기, 비석놀이, 돌치기)’ 같은 것이라고 하면 될까요.
그러니까 이렇게 보면 예의 노인들이 땅을 두드린 것이 아니라, ‘격양’이라는 놀이를 하면서 노래를 부른 셈이 됩니다.
또, 원나라 때 편찬된 중국 역사서인 《十八史略(십팔사략)》에는 요임금이 어느 마을에서 아이들이 부르고 있던 요임금 칭송의 노래를 먼저 들었고, 그것만으로 부족하다고 여기던 차에 뒤이어 노인들이 부르는 〈격양가〉를 듣고 비로소 흡족해했다는 것으로 되어 있기도 합니다.
이 ‘격양’과 비슷한 사자성어(四字成語)로 ‘含哺鼓腹(함포고복)’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머금을 함(含), 먹을 포(哺), 두드릴 고(鼓), 배 복(腹). 사람이 물을 두 볼이 불룩 튀어나올 만큼 입에 머금듯 음식을 아귀아귀 많이 먹어서 잔뜩 부른 배를 손바닥으로 느긋하게 두드리며 “아, 잘 먹었다!” 하고 만족스러워하는 모습을 표현한 말이지요.
그래서 ‘격양’과 ‘함포고복’의 ‘고복’을 합친 ‘鼓腹擊壤(고복격양)’이라는 말도 있고, 따라서 〈격양가〉를 〈鼓腹擊壤歌(고복격양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흔히 ‘요순(堯舜) 시대’로 싸잡아 얘기하듯이, 요임금의 뒤를 이은 순임금 때도 태평성대였지요. 그렇다면 당연히 그 태평성대를 표현하는 그 시대의 노래가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이 〈격양가〉와 짝을 이루는 〈남풍가(南風歌)〉라는 노래인데, 이것은 순임금 본인이 지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물론 〈격양가〉와 관련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여기에 몇 구가 더 추가되어 있는 판본도 있고, 요임금 관련 고사가 후대의 누군가가 지어낸 것이라는 설도 있으며, 〈남풍가〉의 순임금 창작설도 분명치는 않다는 것 등이지요. 이는 요순시대 자체가 구체적인 자료의 미비로 어느 만큼은 허구에 가까운 느낌이 있는 탓이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격양가〉 자체가 진정한 태평성대란 어떤 것이며, 어떤 군주라야 태평성대를 이룰 수 있겠는지에 대한 교훈이나 지침을 전해주는 노래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시대의 거울이요, 시대에 대한 발언입니다.
그런 시대의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살펴보고, 그런 시대의 발언에 겸허히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어진 군주가 다스리는 나라에서라야 백성들은 비로소 큰 걱정 없이 편안한 하루하루의 삶을 누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