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베르 브레송,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
01. [영화 톺아보기] 그 이름 없는 사제는 어떻게 죽음에 이르렀는가? - 로베르 브레송,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1951)
1. 로베르 브레송의 영화
#00. 등장의 미학
브레송의 영화는 ‘등장(登場)’의 영화입니다. 아무도 그가 구사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인물을 또는 사물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아니, 못합니다.
〈소매치기〉(1959)에서 미셸(마르탱 라살)의 손이 누군가의 옷 속으로 꿈결처럼 살며시 들어갔다가 나오는 그 감쪽같은 마법의 순간, 그 손의 클로즈업은 흡사 세상에서 손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대하는 듯한 기이한 감흥으로 보는 이를 사로잡습니다.
〈무셰트〉(1967)에서 무셰트(나딘 노르티에)가 못된 아버지한테 죄도 없이 손찌검을 당하고 울 때 그 불쌍한 소녀의 눈가에 방울방울 맺히는 눈물은 그 순간, 이상하리만치 무표정한 얼굴에도 불구하고, 무너져 내리는 한 소녀의 내면을 견줄 데 없이 처절하게 드러내 보입니다.
〈당나귀 발타자르〉(1966)에서 타인의 삶은 물론이고, 스스로조차도 끈질기고 집요하게 파괴해버리는 인간의 저 불가항력적이고 끔찍한 탐욕의 세계 한가운데를 묵묵히 가로질러 가는 한 마리 당나귀의 크게 열린 순박한 눈동자는 인간의 추악한 내면을 세상 그 무엇보다도 섬뜩하게 역설적으로 되비춰 보여줍니다.
〈사형수 탈주하다〉(1956)에서 깡마른 사형수 퐁텐(프랑수아 르테리에)이 흡사 그것을 위해 세상에 태어난 듯, 또는 그것이 자기 직업인 양 줄기차게 탈옥을 지향할 때, 굵은 창살을 부여잡고 물끄러미 바깥을 내다보는 그의 저 깊이 꺼져 들어간, 가장 원초적인 욕망의 기운마저 모조리 탈색된 듯한 두 개의 눈동자는 인간에게 신체의 자유란 과연 무엇인가를 아주 고통스럽게 가르쳐줍니다.
〈잔 다르크의 재판〉(1962)에서 마치 부조리극의 한 장면처럼, 또는 어수룩한 학승(學僧)들의 선문답처럼 끝도 없이 이어지는 한심한 심문 과정이 지루하게 계속되는 동안, 가냘프지만 완강한 소녀 잔 다르크(플로랑스 카레)의 낯빛 대신, 사슬에 묶인 그녀의 손과 발만을 고개 숙인 채 죽어라 쫓아가는 카메라는 그래도 끝내 화형을 당해야만 하는 한 거룩한 희생자의 이미지를 한사코 완성해 내고야 맙니다.
그러나 이 모든 기라성 같은 영화들도 한 인물의 핵심을 형해(形骸) 같은 돌올함으로 사정없이 드러내어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감히 조르주 베르나노스가 지은 동명(同名)의 소설이 원작인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1951)의 앞에 나서지는 못합니다.
브레송의 후기 걸작들로 일컬어지는 일련의 색채 영화들, 곧 〈몽상가의 나흘 밤〉(1972), 〈호수의 랑슬로〉(1974), 〈아마도 악마가〉(1977), 〈돈〉(1983) 등의 작품들은 제아무리 뭐니 뭐니 해도 결국은 위에서 보기로 든 초기에서 중기에 이르는 일련의 흑백 영화들을 재탕한 격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다음 글로 잇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