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베르 브레송,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
02. [영화 톺아보기] 그 이름 없는 사제는 어떻게 죽음에 이르렀는가? - 로베르 브레송,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1951)
2. 영화 속으로
#01. 사제의 등장
영화는 한 선병질(腺病質)적인 가톨릭 사제(클로드 레뒤)의 등장으로 시작합니다.
브레송 영화 전체를 통틀어 이보다 더 강렬한 등장의 이미지를 저는 달리 알지 못합니다.
이 영화를 처음 볼 때 예의 사제의 자태가 화면 속으로 들어오는 순간 제 가슴이 순식간에 온통 서늘해지고 말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하지만 단언컨대 이는 카메라가 대상을 찍는 방식이 무지하게 독특해서라든가, 또는 사제 역을 맡은 배우의 생김새가 워낙 남다른 탓이 아닙니다.
그 사제가 등장하는 순간 그냥 영화 전체의 기조를 이루는 핵심적인 정서가 화면에서 다짜고짜 물씬 풍겨 나오기 때문입니다.
타이틀 자막이 뜨는 동안 화면에 보이는 것은 사제가 아니라 사제의 일기장입니다.
그리고 감독 로베르 브레송의 이름을 마지막으로 자막이 모두 사라지고 나면, 곧바로 손 하나가 화면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와 그 일기장을 들춥니다. 거기 첫 페이지에 씌어 있는 글을 사제의 목소리가 읽습니다. 일종의 독백이지요.
‘이렇듯 날마다 그리 신비하지도 않은 삶의 자질구레한 비밀들을 매우 솔직하게 기록하는 것이 좋지 않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 영화가 한 사제의 내밀한 기록이라는 선언입니다.
이어 ‘앙브리쿠르(AMBRICOURT)’라는 마을 이름이 쓰인 팻말이 화면을 채우고 드는데, 이것이 영화의 공간적 배경이자 사제의 교구―사제는 곧 여기가 ‘내 첫 교구’라고 독백합니다―를 가리킴을 알아차리기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이야기의 무대지요.
그리고 사제의 클로즈업.
한데, 그는 지금 기도를 하거나 예배를 집전하는 것이 아니라, 손수건으로 얼굴에 비어져 나온 땀을 훔치는 중입니다. 누구라도 한눈에 그가 병약한 상태임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이 순간 사제의 낯빛은 여지없이 창백합니다. 수의(壽衣)의 흰빛이 연상될 정도지요.
이런 모습의 사제를 가장 먼저 보여준 데에는 분명히 감독 나름의 특별한 작의(作意)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카메라가 뒤로 빠지면, 그는 철제문의 살들 너머에서 자전거를 붙잡은 채 그곳이 처음인 사람답게 다소 어정쩡한 기색으로 엉거주춤하게 서 있습니다.
이 순간의 사제는 또 흡사 창살 너머에 갇혀 있는 듯한 모습이기도 합니다. 일종의 감옥 이미지라고 하면 될까요.
그 마을에서 사제가 바야흐로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가를, 또는 장차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될는지를 시각적으로 분명하게 암시해 주는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방식 자체는 쉬운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더없이 효과적이라는 점도 부정하기 힘듭니다.
이 대목에서 마지막으로 지적할 것은 잠깐 삽입되는 아주 이상한 장면 하나입니다.
점잖게 생긴 한 중년의 남자와 미모의 젊은 여자가 서로 포옹하고 있는 모습이 바로 그것입니다. 좀 더 나중에 알 수 있지만, 남자는 마을의 유지인 백작이고, 여자는 그 백작의 딸을 가르치는 입주 가정교사입니다.
두 사람의 시선 처리로 미루어보건대, 그들이 포옹을 푸는 것은 사제의 존재를 목격하고 나서입니다.
하지만 사제 쪽에서도 그들을 목격했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그들은 당황하지 않고,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유유히 들판 저쪽으로 멀어져 갑니다. 사제도 무심히 자전거를 끌고 제 갈 길로 가고요. *(다음 글로 잇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