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經(경)16. 의가 없는 용의 폐해

- 군자 유용이무의 위란 / 《논어》 〈양화편〉 제23장

by 김정수

經(경)16. 의가 없는 용의 폐해 / 君子(군자) 有勇而無義(유용이무의) 爲亂(위란) - 《論語(논어)》 〈陽貨篇(양화편)〉 제23장

子曰(자왈)로 시작하는 공자님 말씀입니다.

끊어 읽기는 ‘군자 유용이/무의 위란’ 정도로 하면 되겠고, 저는 이렇게 번역합니다.

군자가 용은 있으되 의가 없으면 저지레를 친다.

여기서 ‘勇(용)’은 보통 ‘용맹함’이나 ‘용기’ 따위로 번역하는 경우가 많은데, 저는 이 글자 또한 유학(儒學)에서 ‘仁(인)’이나 ‘禮(예)’와 같은 개념어 가운데 하나라는 생각에서 그냥 ‘용’이라고 한 것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이 글자를 ‘용맹’이나 ‘용기’로 번역하면 의미상 뒤의 ‘亂(란)’과 어딘가 잘 호응하는 느낌이 아닙니다.

‘용맹’이나 ‘용기’는 긍정이나 부정이냐를 기준으로 따져볼 때 아무래도 긍정의 뉘앙스에 더 가까운 단어들 아닙니까. 특히 군인이나 경찰, 또는 격투기 선수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문장에서 ‘勇(용)’은 무식하여 생각이 짧고, 공감 능력 떨어지고, 조심(操心)성 없고, 삼갈 줄도 모르고, 그저 거칠고 무모하기만 한 호전적인 사람, 한마디로 어질지 못한 사람을 가리키는 글자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 문장에서 ‘勇(용)’은 뒤의 ‘亂(란)’이라는 부정적인 의미의 글자하고 호응 관계를 따질 때 차라리 ‘용렬(勇烈)’이나 ‘용렬(庸劣)’, 또는 이 둘을 합친 의미에 더 가깝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바로 뒤의 24장에 나오는 ‘勇而無禮者(용이무례자)’ 곧 ‘용은 있지만 예는 없는 자’와 ‘果敢而窒者(과감이질자)’ 곧 ‘과감하지만 막힌 자’가 바로 여기에 해당하는 인물일 것입니다. 여기서 ‘막힐 질(窒)’자는 남의 말을 귀담아듣거나 전후좌우를 세심하게 고려할 줄은 모르고, 그저 막무가내로 몰아붙일 줄만 아는, 한마디로 융통성 없이 앞뒤가 꽉 막힌 고집불통의 사람을 가리키는 글자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이런 점들을 헤아려볼 때 ‘勇(용)’자를 그냥 ‘용’이라고 하는 편이 그 본뜻을 되도록 다치지 않게 하는 번역이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뒤의 ‘義(의)’도, 앞의 ‘勇(용)’을 그냥 ‘용’이라고 했으니, ‘의로움’으로 풀어 번역하기보다는 그냥 ‘의’라고 해야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번역이 되겠지요.

마지막의 ‘爲亂(위난)’은 보통 ‘난을 일으킨다’ 정도로 번역하는데, 저는 그 낭패스러운 정황을 좀 더 실감 나게, 또 ‘亂(란)’의 부정적인 느낌을 도드라지게 표현하고 싶어서 ‘저지레를 친다’라고 한 것입니다. 조금 달리는 ‘난리를 친다’도 어감이 잘 살아나는 번역이겠습니다.

문제는 ‘君子(군자)’입니다.

朱子(주자)는 이 ‘君子(군자)’가 ‘지위(位)’를 뜻한다고 주석(註釋)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여기서 군자를 聖人(성인)이나 賢人(현인) 계열의 의미로 받아들이면 전체 문장의 의미가 요령부득으로 이상해집니다. ‘君子(군자)’ 자체가 ‘小人(소인)’의 대립 개념으로, 이미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가 의롭지 않을 리도 없고, 나아가 저지레를 칠 까닭은 더더욱 없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이 문장은 주자의 주석에 근거하여 풀이해야 논리적으로 아귀가 맞아떨어집니다.

그러면 이 문장은 국가원수처럼 지위가 높은 사람이 ‘勇(용)’만 있고 ‘義(의)’가 없다면, 그러니까 용맹스럽기만 하고 의롭지는 못하다면 필시 국정을 어지럽힐 것이라는 뜻으로 자연스럽게 새겨집니다.

어질지 못한 사람이 높은 지위에 앉아 있으면 세상을 어지럽히게(亂) 마련이라는, 곧 난리를 치거나, 저지레를 치게 마련이라는, 공자님의 지극히 상식적이면서도 엄중한 통찰이 이 문장에는 담겨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너무도 명약관화한 이 상식, 이 진리를 곧잘 잊어버리지요. 그래서 교활한 선동가한테 현혹되거나, 비루한 이해관계에 눈이 어두워져 자기도 모르게 잘못된 선택을 하곤 합니다.

아니면, 골치 아프게 생각이라는 것을 숫제 하고 싶지 않아서 기존의 관성에 떠밀려 부화뇌동(附和雷同)함으로써 나중에 후회해도 소용없는 선택을 그야말로 ‘생각 없이’ 덜컥 하고 말지요.

아니, 어쩌면 심지어는 후회라는 것조차 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후회라는 것도 ‘義(의)’에 대한 날 선 감각을 유지하고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일 테니까요.

이런 의식의 게으름, 나태(懶怠), 나아가 무신경이야말로 우리네 삶의 터전을 망가뜨리는 씻을 수 없는 죄, 용서받기 힘든 죄가 아닐까요.

이 문장은 공자님의 주요 제자들인 ‘孔門十哲(공문십철)’ 가운데 특히 ‘勇(용)’으로 이름난 제자인 子路(자로)에게 스승 공자님이 교훈으로 들려주신 말씀입니다.

정치에 뜻을 둔 제자 자로를 상대로 “네가 장차 정치를 하려거든 반드시 ‘義(의)’를 갖추어야 한다”라고 지적해 주신 것이지요.

공자님은 평소 ‘勇(용)’을 좋아하는 자로가 그 타고난 본성대로 함부로 처신하다가 제명(命)에 못 죽을까 늘 걱정이셨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바로 이 ‘勇(용)’ 때문에 뒷날 자로는 정치적인 사건에 연루되어 끔찍한 최후를 맞아 스승 공자님을 비통하게 만듭니다. 顔淵(안연)처럼 제자로서 스승 공자님보다 먼저 맞이한 안타까운 죽음이었습니다.

물론 자로는 ‘용은 있지만 의가 없는’, 곧, 용맹하기만 하고 의롭지는 않아서 함부로 저지레를 치는 무도한 사람보다는 훨씬 훌륭한 인물이었지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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