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브렛 래트너, 〈엑스맨: 최후의 전쟁〉
C79. 강자들의 신사협정, 차이에 대한 이해 - 브렛 래트너, 〈엑스맨: 최후의 전쟁〉(2006)
차이에 대한 이해
‘차이’에 대한 이해는 지금을 특징짓는 여러 가지 긴요한 시대정신들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넉넉히 이해되지 않은 차이는 흔히 차별을 낳고, 그런 차별은 결국 불평등을 조장하기 십상이겠지요.
이 인식이 중요한 것은 차별로 혜택을 보는 쪽이든, 반대로 피해를 입는 쪽이든, 불행이 그 양자 모두에게 어김없이 해당하는 사태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대개 혜택을 보는 쪽은 그걸 불행으로 인식하지조차 못하기 십상인 듯하지만요.
작게는 일상생활의 신산스러움으로부터, 크게는 대량 학살의 전쟁에 이르기까지, 제대로 이해되고 받아들여지지 않은 ‘차이’에서부터 시작되는 불행의 양상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무수합니다.
인간은 대개 어떤 불행한 사태를 겪고 나서야 비로소 그에 대한 대비책이나 해결책, 또는 예방책을 마련하고자 머리를 싸매고 골몰하게 마련인데, 이 차이로 말미암은 불행도 어느 만큼은 그 탓 아닐까요.
적어도 불행이라는 문제에서만큼은 인간의 상상력은 빈곤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 빈곤한 상상력을 극복하려면 부지런히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는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문자 그대로 다상량(多商量)이지요.
그러자면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차이에 대한 인간의 감각은 어쩌면 이럴 수가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 만큼 애당초 ‘무디게’ 생겨 먹었기 때문입니다. 진화생물학의 시각에서 이걸 자기 보호본능의 발로라고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어쩐지 궁색한 느낌입니다.
차이에 대한 사고
인간이 기본적으로 이기적인 존재임은 이로써 명백합니다. 어쩌면 ‘유전자스러운’ 인간의 조건이라고나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기적이기만 해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 또한 부정하기 힘든 사실입니다.
〈엑스맨〉 시리즈가 차이에 대한 사고를 강제하는 영화라는 사실은 그래서 의미심장합니다.
그런데도 정작 이 영화가 특이한 것은 할리우드 영화 특유의 전형적인 SF 액션 판타지 활극이면서도 처음부터 차이라는 테마를 누구도 오해할 수 없도록 백일하에 드러내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왕의 할리우드 SF영화들이 흔히 그랬던 것처럼 SF라는 외피 속에 테마를 은근히 숨겨놓고 관객이 나름의 감식안으로 그 테마를 읽어내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아예 초장부터 테마를 여봐란듯이 표면으로 드러내놓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래도 모른 척할래, 하고 추궁하는 기세로 말입니다.
따라서 도무지 이 영화의 테마가 무엇인지를 오해할 여지가 없습니다. 테마를 포착해 내는 데 별다른 노력이나 심미안, 또는 감식안의 도움이 필요하지가 않다는 뜻입니다.
돌연변이, 그 타고난 차이로 말미암은 소수자
주지하다시피 이 영화의 주인공은 초능력자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초능력자들이지요. 다수입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그들은 갈데없는 소수자입니다. 그것도 ‘타고난 차이’로 말미암은 소수자지요.
영화 속에서 그들은 ‘돌연변이(뮤턴트)’로 불립니다. 정상이 아니라는 의미가 들어 있는 말입니다. 단박에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이런 명칭을 그들 스스로가 붙였을 까닭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돌연변이가 아닌 다수의 그들이 돌연변이인 소수의 그들한테 느끼는 거부감 또는 공포를 그런 껄끄러운 용어를 씀으로써 드러내고 있는 셈이라고나 할까요.
여기서 ‘돌연변이’를 ‘장애인’이나 ‘성소수자’나 ‘노숙자’나 ‘유색인종’ 따위로 바꾸어놓으면 이 영화의 테마가 어떤 성격의 것인지 금세 확연해집니다.
곧 영화 속 세계에서 초능력자들인 그 돌연변이들과 돌연변이가 아닌 인간들은 서로 대립하는 관계인 것입니다.
아니, 차라리 적대관계라고 하는 편이 옳겠습니다. 이 관계는 제1편에서부터 선연했지요.
돌연변이는 사회적으로는 물론이고, 심지어 가족한테서도 환영받지 못합니다.
이쪽은 저쪽을 격리 또는 퇴치하려 들고, 저쪽은 그러는 이쪽과 맞서 스스로의 생존과 안위를 지키려고 맞서 싸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대로는 공존 불가의 관계입니다. 스펙터클한 볼거리를 빼놓는다면, 이 영화의 테마는 식상할 지경으로 상투적입니다.
소수자 또는 강자
하지만 이쯤에서 이 영화가 그저 소수가 다수한테 핍박받는 이야기라고 넘겨짚는다면 그것은 명백한 오판입니다. 바로 여기에 이 영화의 테마가 지닌, 진정으로 눈여겨볼 만한 점이 놓여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명확히 해두어야 합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돌연변이들은 분명히 사회적 소수자입니다. 하지만 결코 ‘약자’는 아닙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들은 약자가 아니라 강자입니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능력을 지닌 강자들이지요.
돌연변이들이 일치단결하여 돌연변이가 아닌 인간들과 전면적으로 맞서 싸우려고 든다면 인간은 아무리 첨단 무기를 총동원하더라도 돌연변이들을 당해낼 수가 없을 것입니다.
제2편의 도입부가 보여 주듯 단 한 명의 돌연변이가 침입한 것만으로도 지상 최대의 강대국 미국의 대통령 관저인 백악관의 경호 시스템이 한순간에 완전히 무력해지지 않습니까.
금문교가 장난감처럼 요동을 치는 이 제3편의 무지막지한 장관에 이르면 인간이 돌연변이의 적수가 못됨은 더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받아들여집니다.
돌연변이들 하나하나가 그 자체로 가공할 만한 무기인 것입니다.
강자와 또 다른 강자, 그들의 신사협정
요컨대, 이 영화의 테마는 다수와 소수의 대립이 아니라, 다수와 강자의 대립입니다.
다시 말하면, 결국은 강자와 강자의 대립인 셈입니다.
다수자로서의 강자와 초능력자로서의 강자―.
하지만 영화는 대립을 지향하지 않습니다.
제1편과 제2편이 넉넉하게 그려낸 바 있는 이 대립의 양상은 제3편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평화로운 공존을 향해 나아갑니다. 당연한 귀결입니다.
이것이 당연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장애인도 동성애자도 노숙자도 유색인종도 모두 결국은 다 같은 인간이듯, 그 돌연변이들도 결국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들 양자 간에 합의된 평화로운 공존이 의미로운 것은 바로 이 인식이 그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제3편에서 돌연변이들과 돌연변이가 아닌 인간들과의 관계가 평화로운 공존으로 나아간 것이 중요한 이유는 그 공존이 약자에 대한 강자의 배려가 아니라, 쌍방이 서로 대등하고 평등한 관계에서 맺은 일종의 신사협정이 빚어낸 마땅한 결과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