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가오 나오키, 〈아르헨티나 할머니〉
C78. 구원과 해방 그리고 복원 - 나가오 나오키, 〈아르헨티나 할머니〉(2007)
가족의 이야기
가족이란 무엇일까요?
아, 이런 질문은 진부합니다.
가족은 그냥 있었습니다. 먼 옛날 원시시대에는 어땠을지 모르지만, 구약성서 창세기 1장의 시대부터 가족은 ‘이미’ 있었습니다.
남자, 여자, 그리고 그 둘 사이에서 나온 새 생명들로 이루어진 이 가장 원초적인 형태의 인간 집단―.
그러니, 인류의 역사를 이 가족이라는 인간 집단의 가장 기초가 되는 형태를 지키려는 움직임과 깨뜨리려는 움직임 사이의 길항으로 파악하려는 것은 섣부른 시도일까요.
어쨌거나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수많은 가족의 이야기가,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존재가 아닌 다음에야 어떤 한 가족의 일원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사실은 아무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 가족이 그 존재를 그 가족의 일원으로 인정하지 않으려 할 수도 있겠지만, 또는 그 가족의 정체 자체를 파악하기가 어려울―예컨대, 버려진 아이나 고아와 같은 경우―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어떤’ 가족으로부터 그 존재가 생겨났다는 사실마저 부정할 수는 없지 않을까요.
요컨대, 우리는 모두 ‘어떤’ 가족의 일원입니다.
그렇다면 무슨 이야기를 하건 그것이 기본적으로 가족의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속절없는 일일 것입니다.
이 영화 〈아르헨티나 할머니〉도 바로 ‘가족’의 이야기입니다.
할머니가 아닌 할머니
한데, 제목이 어딘가 조금 이상합니다. 할머니라니요?
아무리 눈을 똑바로 뜨고 보아도 그녀는 할머니가 아닙니다.
하얗게 센 머리를 빼놓는다면, 그녀를 할머니로 규정할 수 있는 근거는 마을에 떠도는, 곧 그녀가 오래 살았다는 풍문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아무것도 없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시각 정보만으로는 그렇습니다.
어떻게 보아도 그것은 할머니의 풍채가 아니며, 할머니의 몸짓이 아니며, 할머니의 몸가짐이 아니며, 할머니의 몸맵시가 아니며, 할머니의 춤사위가 아니며, 할머니의 얼굴이 아니며, 할머니의 목소리가 아니며, 할머니의 눈빛이 아니며, 할머니의 에너지가 아닙니다.
실제로 그 할머니 역을 맡은 배우(스즈키 쿄카)도 할머니의 나이가 아니고요.
그래서 그녀가 야쿠쇼 코지를 만나 임신을 하는, 또는 야쿠쇼 코지가 그녀에게로 와 자신을 의탁하고, 끝내는 그녀를 임신하게까지 만드는 대목에 이르면 그녀를 할머니라고 부르는 것이 억지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제목은 분명히 ‘할머니’입니다.
죽어야 한다는 요구
여기서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영화를 볼 때는 언제나 이렇게 비어 있는 곳을 채우려는, 또는 연결고리의 끊어진 부분을 이으려는 기이한 본능이 내면에서,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꿈틀꿈틀 움직입니다. 그것도 아주 맹렬하고 활발하게요.)
그녀가 할머니인 것은 아기를 낳고 죽어야 하는 상황을 위한 조건이라고요.
그러니까 그녀는 아기를 낳은 다음 곧바로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운명이라기보다는 이 영화의 이야기 구조가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녀가 꼭 죽어야 할 현실적인 필요는 아무리 살펴보아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죽어야 합니다, 반드시.
이야기 구조가 그것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노산(老産)이어서라는 의학적인 설명은 따라서 불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왜요?
산산이 부서진 가족
왜냐하면, 그녀가 죽어서 새로운 삼자 관계, 새로운 가족을 만들어놓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비로소 이야기의 처음으로 돌아갈 순간이 되었습니다.
사정은 이런 것입니다.
아빠, 엄마, 딸로 이루어진 단란한 한 가정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느닷없이 엄마가 죽었습니다. 아빠는 졸지에 홀아비가 되었고, 역시 졸지에 엄마를 잃은 딸은 아직 미성년입니다.
뿐인가요. 아빠는 이때부터 삶의 의욕을 잃고 방황하기 시작합니다.
딸은 이제부터, 완전히, 방치됩니다.
그야말로 고아나 다름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한 가족이 박살이 난 것입니다.
영화의 처음이 이 지경이니, 결국 이 영화는 이 산산이 부서진 가족이 어떻게 복원되느냐, 하는 이야기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니면, 이 남겨진 가족, 그러니까 아빠와 딸이 어떻게 부서진 가족의 굴레를 견뎌내고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이냐, 하는 이야기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할머니의 역할, 가족의 복원
‘할머니’의 역할, 또는 사명이 바로 여기에 놓여 있습니다.
아빠는 이 할머니에게로 와서 무언가를 얻습니다.
딸 역시 이 할머니와의 만남에서 무언가를 얻습니다.
이 ‘무언가’가 이 아빠와 딸에게 다시금 살아갈 힘과 용기를 주고, 의미를 찾도록 돕습니다.
물론 이 무언가는 이 할머니와 아빠 사이에서 새로이 태어난 아기로 상징됩니다.
또는, 그렇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계적으로 적용하면 이 새로 태어난 아기가 이 딸을, 그 빠져나간 고리, 곧 엄마의 빈자리에 앉혀놓는 구실을 함으로써 한 가족을 복원시켜 놓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설명은 대단히 기하학적입니다. 기하학적이기에 다소 억지스럽습니다.
그러나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차피 한 번 부서진 가족은 이렇듯 유사한 가족의 모양새로밖에는 복원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의 경우, 죽은 엄마가 부활하지 않는 한 그렇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할머니는 죽음으로써 한 가족을 복원시켜 놓은 것입니다.
또는, 복원시켜 놓고 죽은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야기 구조 속에서 부여받은 자신의 임무가 끝난 것이지요.
아르헨티나, 해피 투게더
마지막으로 남는 문제는 ‘아르헨티나’입니다.
왜 하필 아르헨티나일까요?
또는, 왜 꼭 아르헨티나여야만 하는 것일까요?
네팔이나, 브라질이나, 인도면 왜 안 되는 것일까요?
이 점에 대해서만은 논리적인 설명을 하기 힘듭니다.
이것은 아마 이 영화의 원작소설을 쓴 요시모토 바나나만이 대답할 수 있는 성질의 문제 아닐까요.
이쯤에서 문득 떠오르는 것은 있습니다.
왕가위 감독이 자기 영화 인생의 어떤 전환점을 마련하기 위하여 찾아간 곳이 바로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였다는 사실입니다. 그것도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되기 직전의 시기에요.
바로 〈해피 투게더〉(1997)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르헨티나라는 지명 또는 말에는 왠지 어떤 해방이나 구원의 ‘느낌’이 있습니다.
꼭 탱고나 말람보와 같은 그 특유의 음악이나 춤과 관련짓지 않더라도 그렇습니다.
물론 요시모토 바나나가 그 하고많은 나라들 가운데 왜 하필 아르헨티나를 선택했는지를 따져 묻는 것이 꼭 필요한, 또는 의미 있는 일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단지 여기에 어떤 구원의 느낌과 자유분방한 해방의 느낌이 동시에 있다는 것만은 분명한 듯합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게 느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