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크 오스본 & 존 스티븐스, 〈쿵푸 팬더〉
C77. 맞춤형 교육의 개가 - 마크 오스본 & 존 스티븐스, 〈쿵푸 팬더〉(2008)
팬더의 매력
저한테는 역시 팬더―‘팬더’의 우리말 규범 표기는 ‘판다’고, ‘쿵푸’의 우리말 규범 표기는 ‘쿵후’입니다―가 슈렉보다는 더 매력적입니다.
이는, 한쪽은 CG고 다른 한쪽은 실물이라는 점 말고도, 한쪽은 무시무시한 피지컬의 헐크를 떠오르게 하는 녹색인 반면, 다른 한쪽은 우리네 잔잔하고도 고요한 수묵화를 떠오르게 하는 검은색과 흰색의 조합인 탓이기도 합니다.
시각적으로는 어쨌거나 그렇습니다. 적어도 저한테는요.
쿵푸의 매력
무술(武術) 또는 무도(武道)의 하나로서 쿵푸의 매력이야 이미 정평이 나 있는 것 아닙니까.
무엇보다도 훌륭한 스승이 천방지축의 철딱서니 없는 제자를 쿵푸의 달인으로 키워 강력하고도 극악무도한 적을 단죄하거나 물리치게 하는 이야기의 매력은 그 유구한 상투성에도 불구하고 볼 때마다 매력적입니다.
심지어 쿠엔틴 타란티노의 〈킬빌: Volume.1〉(2003)과 〈킬빌: Volume.2〉(2004)의 주인공인 금발의 서양 여인 우마 서먼도 바로 이런 과정을 거쳐서 발군의 무도인으로 조련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그저 ‘재미있는’ 요소들일 뿐입니다.
정작 〈쿵푸 팬더〉에서 제 마음을 울린 요소는 따로 있습니다. 바로 ‘맞춤형 교육’이라는 테마입니다.
맞춤형 교육의 개가
‘쿵푸 팬더’는 그 존재 자체가 맞춤형 교육의 개가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주지하다시피 맞춤형 교육의 핵심은 잠재력의 계발에 있고, 그 운용 원리는 사랑입니다.
현실 속에서는 이율배반적일 수도 있지만,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계발’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 개개인에 대한 각별한 관심과 사랑을 기반으로 한 맞춤형 교육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데에 아무도 반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꼭 오쿠다 히데오의 장편소설 《남쪽으로 튀어》(양윤옥 옮김, 은행나무)에서 주인공 지로의 그 ‘문제’ 아버지처럼 ‘제도교육이란 국가권력이 자기들 써먹기 좋은 인간을 길러내는 과정에 불과하다’라는 식으로 과격하게 평가하지는 않더라도, 이런 맞춤형 교육의 필요성이나 매력은 부정하기 힘든 것 아닐까요.
인간이 기본적으로 다 다르다는 이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그 필요성을 입증하기에는 충분하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맞춤형 교육이란 일종의 개별교육입니다.
교육과정에 개개인을 뚜드려 맞추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에 교육과정을 맞추는 것이지요.
아마도 현실적으로는 그런 식의 제도를 운영하기에 어려운 점이 많을 테지만, 그것이 지금의 교육제도보다는 이상적인 모습에 훨씬 더 가깝다는 데에는 대체로 동의하는 분들이 많지 않을까 싶네요.
제자에게 적응하는 스승
‘맞춤형 교육’ 테마는 ‘쿵푸’ 소재의 영화에서, 적어도 제가 알기로는, 처음입니다.
기존의 쿵푸 소재 영화들에서 스승이 제자를 길러내는 과정은 문자 그대로 지극히 제도교육스러운 강압의 틀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매우 폭력적이었지요.
대개는 스승이 고분고분 말 안 듣는 제자를 뛰어난 쿵푸 실력으로 제압하여 다스리거나, 또는 제자의 마음을 감동시켜 스승의 교육 프로그램의 체제 안으로 스스로 들어오게 한 다음, 스승이 만족할 만한 수준으로까지 가혹한 훈련 과정을 통하여 제자를 키워내는 것이 그 전형적인 교육과정의 모습이었습니다.
요컨대, 제자가 스승의 프로그램에 적응하는 것이 그 교육과정의 기본 원리였지요.
한데, 〈쿵푸 팬더〉에서 제자 팬더는 스승의 교육 프로그램에 끝내 적응하지 못합니다.
저는 이것이 너무나 이상했습니다. 쿵푸 영화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다음에야 제자가 스승에게 굴복하고 열심히 수련하는 과정이 빠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지요.
한 가지만 예를 들자면, 심지어 〈취권〉(1978, 원화평)에서 그 제멋대로인 성룡도 결국은 자신을 스승의 훈련 프로그램에 적응시킨 뒤에야 취권의 달인으로 성장할 수 있지 않았던가요.
관찰하는 스승
하지만 〈쿵푸 팬더〉는 바로 그 ‘이상한’ 방향으로 거침없이 나아갑니다.
결국 적응을 하는 쪽은 스승입니다.
스승은 자신이 지금까지 운용해 온 쿵푸 교육 프로그램을 과감히 포기하고, 제자에게 맞는 새로운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합니다.
이 개발을 위한 스승의 궁리 과정이 사뭇 ‘갸륵하고’ 감명 깊습니다.
사랑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제자에 대한 스승의 사랑이지요. 기실, 이런 사려깊은 애정에 우리는 얼마나 갈급합니까.
여기서 스승이 가장 먼저 시도하는 것은 관찰입니다.
저는 ‘관찰’이라는 것 자체가 사랑에 기반한다는 사실을 〈쿵푸 팬더〉를 보고 처음 깨달은 기분이었습니다.
더불어 우리 교육과정에 가장 심각하게 결여되어 있는 것도 바로 이 관찰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관찰하지 않으니 무시하게 되고, 무시하니 폭력스러워질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순응하지 않는, 또는 순응을 못 하는 학생들은 필연적으로 방치되거나 도태될 수밖에 없을 테고요.
행운아 팬더
바로 이 폭력의 메커니즘에 시달리는 것이 지금 우리네 학생들이 처해 있는 운명적인 현실임을 감안하면, 팬더는 정말 행운아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무시와 방치의 뼈아픈 경험을 공유하고 있기에 이 팬더가 너무너무 부럽습니다.
사랑으로 가득 찬 사려 깊은 스승을 만나는 것의 중요성을 설파하는 작품으로 〈쿵푸 팬더〉를 읽는 것은 그래서 가슴 뻐근한 일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런 스승(교육제도)을 만나고 싶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모두 이런 제자(피교육자)가 되는 행운을 누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