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정권, 〈동감〉
C75. 우리는 그들보다 행복하리, 어쩌면 - 김정권, 〈동감〉(2000)
예, 2022년의 〈동감〉(서은영)이 아니라 2000년의 〈동감〉입니다.
사랑은 쟁취하는 것?
아주 오래전, 누군가 제게 조언 또는 충고랍시고 사랑은 쟁취하는 것이라고 의기양양하게 말해준 적이 있습니다.
꼭 그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한 시절 저는 사랑은 정말 쟁취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슴속 한 귀퉁이에 품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경쟁이라는 것을 체질적으로 싫어하고, 그래서 사랑이 무슨 선물처럼 제가 알아서 찾아오기를 꿈꾸던 저는 사랑 같은 것하고 나하고는 서로 닿을 수 없는 나쁜 연분이라고 자조하며, 어쩌면 영영 홀로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고 짐짓 스스로를 위로하려 애쓰기도 하였지요.
제가 어느 날 거짓말처럼 저를 찾아온 사랑을 맞이하여 그리 오래도록 허둥대며 본뜻과는 어긋나게 그 사랑을 무던히 괴롭혔던 것도 필경은 그 탓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은 운명이다
하지만 급기야 사랑을 얻었다고 믿은 순간 제 생각은 결정적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세상만사가 대체로 그럴 터이지만, 사랑을 얻기까지의 온갖 우여곡절들을 감당해 낸 것이 나 혼자만의 의지와 지혜의 결과라고 믿는다는 것은 너무도 염치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거듭 따져보아도 거기에는 나만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불가해한 고비들이 곳곳에 무수히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설사 그것이 〈오! 수정〉(2000, 홍상수)에서처럼 어쩌면 쌍방 간의 의도가 절묘하게 결탁한 덕이라 할지라도 그 결탁의 성사 자체는 전혀 나 혼자만의 힘이 빚어낸 결과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은 결코 쟁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쟁취했다면, 그것은 이미 사랑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운명이기 때문입니다.
쟁취했다는 포만감에 젖어드는 순간 그는 사랑 앞에서 오만해지고, 그 오만은 속절없이 서로를 파멸시키는 원흉이 됩니다.
따라서 결론은 이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을 얻고 싶다면 운명에 순응하라―.
또는, 운명 앞에 겸손하라―.
그녀의 사랑
여기 이제 막 3학년이 된 여대생이 있습니다. 이름은 소은(김하늘).
3학년이라면 대학 생활에 어지간히 이력이 붙은, 어쩌면 가장 완숙한 시기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그녀는 앳되고 참하고 발랄하며, 약간의 푼수기마저 숨기지 못합니다.
행동거지만으로 판단하자면, 그녀는 차라리 새내기에 가까운 느낌입니다.
그런 그녀가 바야흐로 누군가를 사랑하기 시작했습니다.
상대는 같은 과 선배이고, 운동권이며, 때는 1979년입니다.
여기까지라면 내용은 뻔합니다.
유신 체제의 폭압 속에 꽃피는 대학생 남녀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
적당한 눈물에, 적당한 신파가 있을 것은 당연지사지요.
이쯤 되면 전형적인 멜로드라마의 요소들이 고루 갖추어진 셈이고, 여기에 시대 상황에 대한 비판 의식까지 곁들여집니다.
이즈음에서야 다소 고루한 듯하지만, 그 시절을 온몸으로 살아낸 세대에게는 나름의 절실함으로 분명한 호소력을 발휘할 수 있는 소재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영화는 그녀의 사랑이 짝사랑의 단계를 넘어서는 대목에서 갑자기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엉뚱한 이야기를 시작함으로써 관객의 기대를 배반합니다.
물론, 언제나 그렇듯, 이런 종류의 배반만큼 관객을 감동케 하는 것이 어디 흔하겠습니까. 마술사의 속임수처럼요.
미지와의 조우
소은이 우연히 손에 넣은 무선 통신기―로버트 저메키스의 〈콘택트〉(1997)에서 엘리(조디 포스터)가 어린 시절에 애타게 아빠를 호출하며 부여잡고 있었던 것이 바로 이 무선 통신기지요―로 2000년의 미래에서 날아든, 같은 대학 2학년 생인 인(유지태)의 목소리와 통신을 시작한 것은, 그러나 결코 SF의 설정으로서가 아니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영화는 소은과 인 사이의 무선 통신이 성사된 것이 개기 월식 탓이라는 무언의 설명까지 덧붙이고 있는데, 이거야말로 오래된 ‘과학적’ 미신―과학적이라도 결코 검증되지는 않았으니, 어디까지나 미신인―이 아니던가요.
요컨대, 영화는 할리우드에서라면 아무 망설임 없이 SF로 나아갔을 설정을 이용하여 정말 괴상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것은 바로 운명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현재와 미래, 그리고 운명
여기에서 소은과 소은이 사랑하는 선배 동희(박용우)와 소은의 단짝 친구인 선미(김민주)와 나중에 동희와 선미가 결혼하여 낳은 아들인 인 사이의 복잡한 멜로드라마스러운 관계들을 소상히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초점은 소은이 미래의 인을 위하여 자신의 사랑을 포기해야만 하는 절체절명의 상황에 놓인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소은은 인의 존재를 존재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러니까 인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동희와 선미가 맺어질 수 있도록 자신의 사랑을 포기하고 물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자칫 사랑을 밀어붙이다가 자신과 동희가 맺어진다면 인의 존재는 없어지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마이클 제이 폭스도 〈백 투 더 퓨처〉(1985, 로버트 저메키스)에서 자기 엄마와 아빠가 무사히 맺어지도록 미친 듯이 동분서주하지 않았습니까.
두 영화 모두 이야기가 진행되는 기준점이 ‘미래에 대한 과거’에 놓여 있기에 관객은 그 과거가 현재가 되어 있는 상황에 얹혀서 영화를 보게 됩니다. 따라서 관객은 자연스럽게 그 과거를 기준으로 미래를 생각하게 되지요.
여기에서 기묘한 모순이 발생합니다.
과거가 기준이라면 미래는 기실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없는 것을 위해서 현재에다가 어떤 인위적인 조작을 가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난센스일 것입니다.
말하자면, 소은이 사랑을 포기하는 것은 미래의 인의 존재를 알았고, 나아가 그 존재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면 소은은 자신의 사랑을 포기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소은은 자신의 사랑을 포기하기로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운명이라고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아니, 소은은 운명에는 순응해야만 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겉으로는 영화가 미래에 대한 과거를 현재 시점 삼아 진행되지만, 진정한 기준점은 미래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화에서 진짜 현재는 미래인 셈입니다. 인이 과거의 소은과 무선 통신을 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한 긴급 조치인 셈입니다. 위기에 처한 것은 소은이 아니라 인입니다.
소은의 사랑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지하지 않으면 인은 죽게 되는 셈이지요. 아니, 처음부터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되는 셈입니다.
〈백 투 더 퓨처〉의 설정을 빌려온다면, 그는 ‘지워지는’ 셈입니다.
영화가 기대고 있는 것은 시공간에 대한 그런 이론의 바탕입니다.
영화가 소은이 사랑을 포기하기로 결심하기까지 무선 통신이 계속되도록 모든 조치―예컨대 인이 무선 통신기를 때려 부수려고 할 때 모든 내막을 알고 있는 경비 아저씨가 때맞춰 나타나 그것을 막는 것―를 취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어찌 되었든, 소은이 결정적인 선택을 하기까지 통신이 계속되어야만 미래, 곧 영화 속 진짜 현재가 보존되는 것입니다.
그녀, 운명을 선택하다
영화가 소은의 행적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기 때문에 마치 소은의 선택이 미래에 실질적인 영향을 끼친 것처럼 보이지만, 기실 이는 모순 이론에 근거한 영화적 트릭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러한 이론적 사항은 영화의 전정한 메시지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뜻입니다. 영화가 시종일관 소은 내면의 갈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운명을 ‘선택’한다는 것이니까요.
한데, 생각할수록 기이한 점이 있습니다. 소은이 사랑을 포기하는 것은 과연 무엇을, 아니 누구를 위한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우선, 사랑하는 선배 동희를 위해서라면 소은은 오히려 문자 그대로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더 적극적으로 선배를 사랑해야 옳지 않을까요.
또 친구 선미를 위해서라면, 여기에는 선미가 자신보다 선배를 더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를 확보해야만 한다는 전제와, 동시에 선배가 자신보다 선미를 더 사랑하거나, 또는 선배가 자신보다는 선미와 맺어졌을 때 더 행복하리라는 확신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니, 소은이 사랑을 포기한 것은 두 사람 가운데 그 누구를 위해서도 아니었던 셈입니다. 그렇다면 역시 인을 위해서일까요?
하지만 소은의 입장에서는 20년 뒤의 미래란 문자 그대로 난센스입니다.
제아무리 여러 가지 정황 증거를 바탕으로 인의 존재를 사실로 받아들였다 하더라도 미래란 그녀에게 아무 의미가 없는 것―〈터미네이터 2: 심판의 날〉(1991, 제임스 카메론)의 절대 명제 ‘No Fate!’를 상기해 보십시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미래로서 인의 존재도 그녀한테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소은이 사랑에서 물러나기로 한 것은 역시 운명을 위해서였다고요.
곧, 소은은 선배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운명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또는, 아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일까요.
그렇다면 그녀는 그 나이에 이미 사랑은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운명이라고 생각할 줄 알 만큼 철이 들어 있었던 것일까요.
하긴, 운명에 대한 진지한 성찰 없이 저돌적으로 사랑을 쟁취하려는 데서 빚어지는 불행한 삶의 양태들을 우리는 그동안 너무도 무수히 보아오지 않았던가요.
우리는 행복하다
하지만 정작 제가 이 영화 〈동감〉과 관련하여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따로 있습니다. 이것이 2022년의 〈동감〉과 다른 점입니다.
소은과 인이 통신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인이 자신의 존재를 소은에게 이해시키려고 소은의 처지에서는 미래가 되는 2000년의 상황을 설명해 주는 대목이 바로 그것입니다.
인은 말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죽었고, 김일성도 죽었고, 통행금지는 풀렸고, 지하철이 거미줄처럼 서울의 밑바닥을 돌아다니고, 금강산 관광(!)도 간다…….
이 영화를 처음 보던 2000년에 저는 꼭 이 말을 듣고 좋아하던 소은에게 감정이입이 되어서가 아니라, 당시 제가 살고 있던 세상에 대하여 소은의 입장에서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그 시절 저는 너무도 행복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니, 내가 얼마나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를 그제야 깨달았다고 하는 편이 나을까요.
IMF로 말미암은 실업난이나, 수돗물조차 마음 놓고 마실 수 없을 만큼 망가진 환경이나, 극심한 교통난과 살벌해진 인심, 늘어만 가는 세금과 범죄, 그리고 79년에는 들어보지도 못했을 에이즈 같은 질병들…….
그 모든 것에 대한 불평불만이 1979년을 살아가던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그저 사치스러운 투정에 불과한 것 아닐까. 그들이 목숨을 걸면서까지 얻어내고자 투쟁했던 것의 대부분을 우리는 말 그대로 ‘거저’ 누리고 있지 않은가.
저는 소은의 감탄에 문득 숙연해졌습니다.
그래, 우리는 행복하다, 그들보다. 어쩌면, 아니 분명히.
하지만 그 2000년의 〈동감〉을 보던 제가 그로부터 사반세기가 지난 지금의 저를, 제가 살아가는 지금의 세상을 과연 1979년의 소은이 미래의 인이 살아가는 세상에 대하여 듣고 좋아했던 것만큼 좋아하고 부러워할까요?
가만히 근심해 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