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클린트 이스트우드, 〈체인질링〉
C74. 체인지링과 체인질링, 영화 밖의 이야기들 - 클린트 이스트우드, 〈체인질링〉(2008)
조던, 조단, 조든
‘체인지링’과 ‘체인질링’이 같은 말의 다른 표기임을 못 알아볼 사람이 어쩌면 있을까요?
예전에 마이클 조던이 시카고 불스 선수로 활약하던 시절, 같은 날짜의 국내 유력 일간지의 각기 다른 지면에서, 혹 그 각각의 기사를 쓰는 주체(기자)가 달랐던 탓인지, ‘마이클 조던’의 표기가 ‘마이클 조던’, ‘마이클 조든’, ‘마이클 조단’으로 되어 있어서 실소를 금치 못했던 적이 있습니다.
이런 무신경한 혼용은 그 당시 인터넷, 방송, 잡지, 신문 등을 막론하고 다 마찬가지였습니다. 지금은, 글쎄요, 그때와 많이 다를까요.
‘마이클 조던’의 경우 문제가 되었던 것은 언제나 ‘마이클’이 아니라 ‘조던’이었지요. ‘마이클’은 ‘마이끌’이나 ‘마이껄’이 아니고 언제나 ‘마이클’이었지만, ‘조던’은 때로는 ‘조단’으로도, 때로는 ‘조든’으로도 표기가 되었으니, 엄밀히 말하면 그 당시 시카고 불스 팀에서는 마이클이라는 똑같은 이름을 가진 선수 세 명이 동시에 활약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하긴, 마이클 조던과 같은 팀에서 스몰 포워드로 활약했던 ‘스코티 피펜’도, ‘스코티’와 ‘스카티’가, 또 ‘피픈’과 ‘피펜’이 혼용되고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데니스 로드맨’에서 ‘로드맨’과 ‘라드맨’이 혼용되는 경우가 별로 없었던 것은 이상한 일이긴 하지요.
한데도 신통한 것은 조단, 조든, 조던을 아무도 각기 다른 사람으로 받아들이는 불상사는 없었다는 점입니다. 어쩌면 그렇듯 아무도 헷갈려하지 않는 탓으로 그저 믿거라 하면서 그 세 가지 표기가 아무렇지도 않게 동시에 쓰였던 것일까요?
외래어(또는 외국어)의 한글 표기법 문제
외래어를 한글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이런 난맥상은 지금도 완전히 개선되었다고는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 정도 정리가 되기는 합니다. 마이클 조던의 경우, 지금은 거의 ‘조던’으로 굳어진 느낌이기는 하니까요.
이런 현상은 영화 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봉준호 감독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감독상을 수상하러 무대에 올라갔을 때 객석 쪽을 가리키며 높이 기렸던 감독 ‘마틴 스코세이지’의 경우 제가 처음 접한 표기는 ‘마틴 스코세스’였습니다. 이것이 얼마 뒤에 ‘마틴 스콜세지’나 ‘마틴 스코시즈’ 따위로 표기되더니, 지금은 ‘마틴 스코세이지’로 많이 기운 느낌입니다. 물론 여전히 ‘마틴 스콜세지’로 표기되는 경우가 적지 않지만요.
범주를 넓혀서 살펴보아도 이런 현상은 마찬가지입니다.
일본어의 경우는 조금 단순한 양상입니다.
예컨대 ‘구로사와 아키라’를 ‘흑택명’으로, ‘구로사와 기요시’를 ‘흑택청’으로, ‘오즈 야스지로’를 ‘소진안이랑’으로, ‘미조구치 겐지’를 ‘강구건이’로 표기하는 사례는 숫제 없지요.
‘아키라’를 ‘아끼라’로 표기하는 사례도 거의 없고요.
단 ‘구로사와’의 경우는 ‘구로자와’와 ‘구로사와’가 거의 대등하게 사용되고 있는 느낌이어서 쓸 때마다 이 두 가지 표기 가운데 어느 쪽을 택해야 할지 망설이게 됩니다.
하지만 중국어의 경우는 똑같이 한자로 이루어진 이름인데도 양상이 조금 다릅니다.
글쎄요, 세 글자와 네 글자 또는 다섯 글자의 차이일까요?(설마요!)
예컨대, ‘왕가위’를 ‘왕자웨이’로 표기하는 경우는 별로 없지만, ‘장예모’는 처음에는 ‘장예모’로 표기하다가 지금은 ‘장이머우’라는 표기가 많이 쓰이는 느낌이며, ‘첸카이거’의 경우는 제 기억에 처음에는 ‘첸카이게’였는데, 이제는 ‘천카이거’와 ‘첸카이거’가 혼용되는 느낌입니다.
그럼에도 ‘오우삼’은 여전히 ‘오우삼’이고, ‘성룡’은 여전히 ‘성룡’이고, ‘이연걸’은 여전히 ‘이연걸’이며, ‘이소룡’은 여전히 ‘이소룡’입니다. ‘주윤발’, ‘장국영’, ‘유덕화’, ‘양조위’, ‘장만옥’, ‘임청하’, ‘양자경’, ‘여명’, ‘견자단’ 등등도 다 마찬가지지요.
〈비정성시(非情城市)〉(1989)의 감독 ‘허우 샤오시엔’의 경우는 ‘후효현’으로는 거의 표기되지 않고, 처음에는 ‘후 샤오시엔’이었는데, 잠깐 ‘허우 시아오시엔’이 어딘가에서 쓰이다가, 지금은 거의 ‘허우 샤오시엔’으로 굳어진 느낌입니다. 〈애정만세〉(1994)의 감독 ‘차이밍량’도 처음에는 ‘채명량’이었다가 ‘차이밍량’으로 정리된 느낌이지요.
그러니, 중국어의 경우는 한자를 우리 식대로 읽을 것이냐, 아니면 중국어 발음 그대로 표기할 것이냐의 문제에서, 조금 극단적으로 말하면, 완전히 제멋대로인 셈입니다. 한 마디로 통일된 기준이 없는 것이지요. 아니, 기준은 있지만, 입에 익숙해진 관습을 좇느라 제대로 시행이 되고 있지 않다고 해야 할까요.
체인지링 또는 체인질링
다시 ‘체인지링’과 ‘체인질링’의 문제로 돌아가면, 이 둘은 물론 영어단어 ‘Changeling(바꿔친 아이)’에 대한 한글 표기의 두 가지 모양새입니다.
한데, ‘체인지링’은, 동양에서는 세 번째이자 일본에서는 두 번째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오에 겐자부로의 장편소설 제목이고, ‘체인질링’은 이제는 배우보다는 감독으로서 세계적인 거장의 반열에 오른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 제목입니다.
똑같은 영어단어가 한쪽에서는 ‘체인지링’으로, 다른 한쪽에서는 ‘체인질링’으로 표기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오에 겐자부로의 장편소설 《Changeling》은 우리나라에 ‘체인지링’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으며,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 〈Changeling〉은 우리나라에 ‘체인질링’이라는 제목으로 개봉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단어가 각기 다른 의미로 사용된 것일까요? 그럴 리가요. 당연히 아니지요.
이 단어 ‘Changeling’은, 오에 겐자부로의 장편소설 《체인지링》의 ‘옮긴이의 글’에서 설명되어 있는 의미 그대로입니다.
요컨대, 이는 유럽을 중심으로 세계 각지에 퍼져 있는 민간전승에서 따온 말로, 아름다운 아기가 태어나면 작은 도깨비 같은 요정이 나타나 이 아기를 자기들의 보기 흉한 아이와 바꾸어놓는데, 이때 뒤바뀌어 남겨진 흉한 아기를 ‘체인지링(체인질링)’이라 일컫는다는 것입니다.
정확히 구분하자면 ‘아이 바꿔치기’라고 해야겠지만, 결국 일종의 ‘유괴’인 셈입니다.
부모로서는 자기 아이는 온데간데없고, 웬 엉뚱한, 그것도 자기 아이보다 못생긴 아이가 자기 아이가 있어야 할 요람에 버젓이 누워 있는 형국이니, 충격적이고 당황스럽기 이를 데 없는 심정일 것입니다.
일종의 ‘금기(禁忌)’ 문화인데, 이런 금기는 우리나라에도 있어서, 옛날 어르신들은 아기가 태어나면 곧잘 ‘밉다’라고 표현함으로써 예쁜 아기를 잡아가려는 악귀를 헷갈리게 만들어 혹 있을지 모를 그 악귀의 위해로부터 아기를 보호하려 들지 않았습니까.
‘Changeling’이라는 낱말의 이런 의미가 오에 겐자부로의 장편소설 《체인지링》에서는 이야기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의 구실을 하고 있습니다.
‘오에 겐자부로 또는 이타미 주조’와 클린트 이스트우드
저는 처음에 2008년도 칸 영화제의 경쟁 부문에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들고 간 영화의 제목이 ‘체인질링’이라는 소식을 접하고는 단박에 이 작품이 오에 겐자부로의 장편소설 《체인지링》을 원작으로 삼아 만든 영화라고 믿어버렸습니다.
제가 이렇게 믿어버린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물론 단순히 ‘체인질링’이 ‘체인지링’과 같은 말의 다른 표기임을 알아보았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오에 겐자부로의 장편소설 《체인지링》이 〈담뽀뽀〉(1985)의 감독 이타미 주조의 죽음을 파헤친 작품이었기 때문입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계속 왕성하게 작품활동을 했더라면 아마도 이타미 주조는 지금쯤 기타노 다케시보다 더 중요한 감독으로 취급되고 있지 않을까, 싶기까지 합니다.
알 사람은 다 알고 있겠지만, 이타미 주조는 오에 겐자부로의 처남입니다. 그러니까 오에 겐자부로의 아내가 이타미 주조의 여동생인 것이지요.
따라서 그 저명한 영화감독 이타미 주조가 어느 날 느닷없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을 때 오에 겐자부로 부부가 받았을 충격이 얼마나 큰 것이었겠는가는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 일입니다.
오에 겐자부로와 이타미 주조는 학생 시절부터 친분이 남달리 두터웠고, 따라서 예술적으로 서로에게 끼친 영향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물론 소설 《체인지링》 속에서 이들이 실명으로 등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각각의 존재감은 분명 실명 이상입니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은 지극히 자기 고백적이며 자기 성찰적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친구이자 처남인 이타미 주조 감독의 그 충격적인 자살의 배경에 무엇이 놓여 있는가를 추적하는 과정이 이야기의 뼈대라고 하여 이 소설이 필경 추리소설적인 구조를 취하고 있지 않겠는가, 하고 넘겨짚는다면 그것은 오산입니다. 오에 겐자부로의 작풍(作風)을 감안한다면요.
소설 ‘체인지링’과 영화 ‘체인질링’
이 소설의 번역본이 우리나라에 출판된 것은 2006년입니다. 따라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이 작품을 영화화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는 것이 제 판단이었습니다.
아무렴,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2006)를 만든 감독이 이타미 주조의 자살을 다룬 〈체인지링〉을 영화화한다는 게 그리 뜬금없는 작업은 아니지 않나, 싶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그해 칸 영화제에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들고 간 신작의 제목이 〈체인질링〉이라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그 영화의 원작이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 《체인지링》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당시 임신하기 전의 안젤리나 졸리가 어머니 역으로 출연하여 감동적인 열연을 펼쳐 보인 영화 〈체인질링〉의 내용은, 오에 겐자부로와는 무관하게, 문자 그대로 ‘유괴’(!) 이야기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