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 폴 라프노, 〈시라노〉
C13. 이 난감한 외모지상주의 시대에 - 장 폴 라프노, 〈시라노〉(1990)
외모지상주의 시대의 선거
사람의 생김새가 선거 결과에 영향을 끼치는 현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공화당의 닉슨과 민주당의 케네디가 맞붙었던 미국의 제35대 대통령 선거에서부터였다고 익히 알려져 있지요? 세계 선거 역사상 처음으로 후보 간의 TV 토론이 있었던 바로 그 선거 말입니다.
그 선거 결과에 대해서 저는 이렇다 할 의견이 없습니다. 그건 저한테 그저 역사의 한 사건일 뿐입니다. 다만 저는 그때 TV 토론이라는 것이 없어서 혹 케네디를 제치고 닉슨이 당선되고, 나중에 좀 더 나이 든 케네디가 다시 선거에 나서서 대통령이 되었더라면 미국의, 아니 세계의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까, 하고 가끔, 정말 아주 가끔 심심풀이 삼아 상상해 보곤 할 뿐입니다.
물론 역사에 ‘가정’이란 없는 거니까, 이건 그야말로 한갓 상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단지 저는 그때 미국의 유권자들이 케네디의 외모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선거권을 행사했더라면, 그래서 케네디가 아니라 닉슨이 당선되었더라면, 그래서 뒷날 좀 더 나이가 들어 한층 성숙해진 케네디가 재도전하여 닉슨의 뒤를 이어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더라면, 적어도 그가 임기를 반밖에 채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비극은 면할 수 있지 않았을까, 나아가 워터게이트 같은 역사에 남을 추문도 없지 않았을까, 하는 실없는 상상을 저도 모르게 문득문득 해볼 따름입니다.
예전에 올리버 스톤의 〈JFK〉(1991)를 보면서 러닝 타임 내내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던 기억이 새삼 떠오르네요.
하지만 아무래도 지금과 같은 외모지상주의 시대에 유권자들한테 외모 따위와는 무관하게 오로지 이성적으로 냉철한 판단만을 기대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실제로 우리 모두가 크고 작은 선거 때마다 그와 비슷한 성격의 일들을 흔히 겪고 있지 않습니까.
미국의 제44대 대통령 선거 때 민주당의 대선후보 선출 과정에서도 오바마가 힐러리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것이 힐러리의 당차고 날카로운 외모와 오바마의 상대적으로 부드러운 외모 사이의 차이가 유권자들에게 적어도 얼마간은 영향을 끼친 결과가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고요.
그 남자의 외모 콤플렉스
제라르 드파르디외가 안 그래도 커다란 코를 분장으로 두 배쯤 더 크게 키운 기괴한 몰골로 열연을 펼쳤던 〈시라노〉라는 영화에 대한 제 감정은 참 시립니다. 아니, 시라노라는 남자에 대한 제 감정이 시리다고 해야 옳겠네요.
기형적으로 큰 코에 대한 콤플렉스로 일평생 시달렸던 남자―.
그래서 사랑하는 여자 앞에 감히 당당하게 나서지 못했던 남자―.
그러나 누구보다도 뛰어난 신체적 능력과 시적 재능을 지녔던 남자―.
마지막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 잠시도 멈추지 않고 좌충우돌 자신의 삶을 사정없이 불살랐던 열정적이고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
늘 뜨거운 가슴으로 살았던 남자―.
그러나 정말 사랑했던 여자에 대한 속마음을 그녀가 사랑하는 다른 남자의 입을 빌려서 간접적으로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던 기구한 운명의 남자―.
연적(戀敵)인 남자의 뒤에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감추고 있어야만 했던 남자―.
도대체 외모가 무엇이기에요?
코의 공로
시라노는 참 멋진 남자입니다. 받아주기만 한다면 친구로 사귀고 싶을 만큼요.
단지 코 하나가 문제일 뿐입니다.
사람의 얼굴에서 코가 차지하는 그 절묘한 지정학적 위치를 생각해 보십시오. 동양인이 서양인의 신체에서 가장 부러워하는 것이 하나는 긴 다리요, 또 하나는 바로 그 높은 코라고 하지 않던가요.
하지만 서양인인 시라노는 기이하게도 바로 그 코가 지나치게 커서 고민인 것입니다.
아마 지금이라면 시라노는 조금도 망설일 필요 없이 당장 성형외과로 달려가 코를 깎아 낮추는 수술을 받지 않았을까요.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한 치만 낮았어도 세계 역사가 바뀌었으리라는 우스갯소리를 시라노에게 적용한다면, 그의 코가 한 치만 낮았어도 그는 아마 진작에 사랑하는 여인 록산느에게 자신 있게 다가가 적어도 자기 마음을 당당하게 표현할 수는 있지 않았을까요. 사랑을 얻고 못 얻고는 둘째 문제고요.
물론 여기에서, 만일 그렇게 되었더라면 시라노가 그토록 아름답고 열정적인 편지와 시편들을 평생토록 줄기차게 써낼 수 있었겠는가, 하는 상상 역시 피할 수는 없습니다.
〈서편제〉(1993, 임권택) 식으로 말한다면, 가슴속에 한이 쌓이지 않으면 아무래도 절창이 나오기는 어렵지 않겠습니까.
시라노의 재능은 당대의 천재 희극작가 몰리에르가 그의 작품을 표절할 정도로 발군의 것이었다고 하니, 그런 재능을 꽃피울 수 있게끔 한 공로는 마땅히 그가 사랑하는 여자가 아니라, 그의 코에 돌려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의 비밀
하지만 이런 흥미로운 심심풀이 상상은 시라노가 아닌, 그래서 시라노처럼 고민할 필요가 없는, 또는 적은 사람들의 몫일 것입니다.
외모 콤플렉스에 조금이라도 시달린 경험이 있는, 또는 목하 그런 고민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으로서야 시라노의 그런 고민이 어찌 강 건너 불이겠습니까.
물론 〈시라노〉라는 영화의 주제를 외모 콤플렉스에 한정시킬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런 외모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한 사내가 그런데도 기어이 사랑하는 여자를 위하여 일평생 스스로 자기의 실질적인 연적의 연애편지를 대신 써주었다는 비밀을 가슴속에 고이 간직했다는 것, 그래서 그 여자가 일평생, 적어도 시라노가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 운명적으로 그 편지의 비밀이 드러나기 전까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추억을 간직하고 살 수 있었다는 것―. 바로 여기에 관련되어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무렴, 그 뜨겁고 아름다운 ‘사랑과 영혼’이 〈시라노〉의 진짜 주제라고 해야겠지요.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고발
동시에 〈시라노〉는, 당연히,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통렬한 고발로 읽히기도 합니다.
연애편지 하나 제대로 쓸 줄 모르고, 그저 밀어붙일 줄만 아는 이 천생 마초 사내 크리스티앙(뱅상 페레)의 수려한 외모에 현혹당하여, 자기 바로 옆에 얼마나 뜨거운 영혼의 남자가 있는지는 헤아릴 염도 내지 못한 채, 도무지 헤어날 줄을 모르는 이 여인 록산느(안느 브로쉐)가 속절없이 딱하게 느껴지니까요.
어처구니없는 것은 그러면서도 록산느는 크리스티앙이 시라노와 같은 시적 영혼을 지니고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는 점입니다. 이런 정황에서 크리스티앙은 남의 속도 모르고 시라노가 대신 써주는 연애편지의 힘을 빌리지 않을 수 없었으니, 이 얼마나 끔찍한 아이러니입니까. 또 이 얼마나 고약한 운명의 장난입니까.
저는 도무지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에 대한 감정을 연적의 이름을 빌려 편지로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었던 시라노라는 남자의 내면 풍경을요.
그리고 그것을 평생토록 가슴속 깊이 비밀로 간직하고 살았던 그 사내의 영혼을요.
눈을 감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시라노는 추하다고 여겼던 것일까요, 자신의 큰 코를?
전쟁터에서 죽은 ‘가짜’ 연인 크리스티앙을 잊지 못해 혼자 몸으로 평생을 살아가기로 결심한 록산느는 최후의 순간 마침내 그 오랜 비밀을 깨닫고 ‘진짜’ 연인 시라노를 위한 회한의 눈물을 흘립니다.
천신만고 끝에 비로소 자기 진심을 사랑하는 여인에게 전하는 데 성공하고 장엄하게 숨을 거두는 이 사내 시라노를 목도하며 저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심정이 되고 말았습니다.
시각으로부터의 자유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아니, 시각장애인이 아닌 사람으로서 감히 ‘시각의 거추장스러움’이라는 표현을 써도 될까요?
영화는 시각 매체입니다. 여기서 굳이 영화는 ‘시각’ 매체가 아니라, ‘시청각’ 매체라고 바로잡을 필요는 없겠지요.
영화는 애초 온전한 시각 매체로 출발했고, 오로지 시각 매체일 때 가장 순정하고 위대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한데, 지금 저는 〈시라노〉를 떠올리며 인간의 오감 가운데 시각이라는 것이 문득 거추장스럽게 느껴지는 것을 어쩌지 못하겠습니다.
시각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겪어야 하는 운명적인 불행의 양태를 생각하면 시각은 심지어 저주가 아닌가 싶기까지 합니다.
적어도 저는 시각의 현혹에서 자유로워지지 못하는 한 인간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말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시각적으로 관객을 현혹하는 모든 영화는 나쁜 영화라고요.
어쩌면 〈판타스틱 4〉(팀 스토리, 2005)에서 하필이면 막강한 암석 근육 인간으로 외모가 가장 크게 변한 벤의 연인을 시각장애인으로 설정한 것도 이런 차원의 고려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고 슬쩍 넘겨짚어 봅니다.
선거라는 것과 결부해서 다시 말해본다면, 어떤 성격의 것이든, 시각과 같이 허울 좋은 겉치레로 유권자를 현혹하는 모든 후보는 나쁜 후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영화를 볼 때든, 투표를 할 때든, 세상에 그 깊은 속을 못 보고, 시각의 농간에 휘둘리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아마도 없지 않을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