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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71. 연애, 조용한, 그리고 순정한

  - 기타노 다케시,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

by 김정수 Feb 19. 2025

C71. 연애, 조용한, 그리고 순정한 - 기타노 다케시,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1991)

기타노 다케시의 연애 이야기

   우연한 만남, 조용한 연애, 느닷없는 이별―.

   이것이 이 영화에서 진행되는 연애의 3단계 공식입니다.

   공간적 배경은 해변이고, 서핑 보드에 몸을 싣고 파도를 타는 젊은이들의 이야기지요.

   그렇다고 여름 휴양지의 떠들썩함과 흥청거림을 떠올리며 이 영화를 일회성의 달콤하고 짜릿한 청춘 연애 드라마쯤으로 넘겨짚는다면, 완전한 오해라고 할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연애의 쌍방인 두 남녀 주인공이 모두 청각장애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두 사람은 말이 없습니다. 당연히 영화에는 그 둘이 서로에게는 물론 그 누구에게도 말을 건네는 장면이 끝까지 나오지 않습니다.

   그들 몫으로 할당된, ‘발화’하는 대사 자체도 없지요.

   영화는, 아니, 그들의 연애는, 제목 그대로, 그야말로 ‘조용’합니다.

   너무나 조용하여 관객은 어느 순간 이 두 청춘 남녀가 서로 연애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깜박 잊을 정도입니다.


오해되어 온 과정

   기타노 다케시는 우리나라에서 얼마간 오해되고 있는 감독이라는 느낌이 있습니다.

   주지하다시피 우리나라에서 일본영화에 대한 개방 조치는 아주 느리게, 단계적으로 이루어져 왔습니다.

   덕분에 일본영화에 대한 몰이해도 ‘단계적으로’ 조장되어 온 느낌이 있습니다.

   이해가 단계적으로 깊어진 것이 아니라, 몰이해나 오해가 단계적으로 심화된 것이지요.

   그러니까 개방 조치가 시행되는 과정이 그 개방의 대상에 대한 올바른 이해의 깊이를 점진적으로 더해가는 효과적인 학습의 과정이 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 탓에 기타노 다케시를 비롯하여 적지 않은 일본영화 감독들이 ‘운명적으로’ 오해될 수밖에 없었지요.

   예컨대, 〈언두〉(1994)나 〈쏘아올린 불꽃, 밑에서 볼까? 옆에서 볼까?〉(1993)처럼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빛나는 전작들을 다 놔두고, 그에 견주면 오히려 평범한 멜로 또는 러브스토리라 할 수 있는 〈러브 레터〉(1995)로 우리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이와이 슌지도 그런 메커니즘을 따라 속절없이 오해된 감독의 계보에 속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그들의 작품들을 필모그래피의 궤적에 맞추어 차례대로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그들의 출현은 언제나 느닷없었고, 또 중간 과정이 통째 생략된 것이어서 그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거기에까지 이르렀는지를 미처 확인하지 못한 채로 그들의 영화를 본 것이지요.

   기타노 다케시의 경우 무엇보다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개봉된 그의 작품이 다름 아니라 저 ‘하드’하기 짝이 없는 야쿠자 형사 이야기인 〈하나비〉(1997)였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이 작품으로 그의 영화 세계에 대한 첫인상이 결정되었고, 차후에 계속될 그에 대한 특유의 선입관이 조성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기타노 다케시 영화의 두 가지 부류

   다소 억지스럽지만,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는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주연급으로 자신이 직접 출연한 영화와 그렇지 않은 영화, 이렇게요.

   실은 ‘신기하게도’ 이렇게 나뉜다고 진술해야 옳을 것입니다.

   정말 신기하게도, 이 두 부류의 영화들은 서로 다른 성격의 스타일과 내용으로 깔끔하게 갈리기 때문입니다.

   우선, 자신이 직접 출연한 영화는 대개 아주 ‘하드’한 야쿠자 영화거나 형사 영화입니다.

   물론 로드 무비이자 코미디인 〈키쿠지로의 여름〉(1999) 같은 예외적인 작품도 있지만, 데뷔작인 〈그 남자 흉폭하다〉(1989)에서부터 시작하여 명실상부한 최고작으로 평가받는 〈소나티네〉(1993)를 거쳐, 우리나라 첫 개봉작인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인 〈하나비〉에 이르기까지, 상당수가 이 계열에 속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대개는 이쪽 이미지로 알려져 있지요.

   반면, 자신이 직접 출연하지 않았거나, 출연했더라도 주연급이 아닌 경우에는 사정이 사뭇 다릅니다.

   비루한 현실과 암담한 미래에도 불구하고 희망의 편린을 찾으려 애쓰는 젊은이들을 주인공으로 한 가슴 뭉클한 청춘 드라마 〈키즈 리턴〉(1996)이 이 계열에 속하는 영화로는 대표적인 작품이지요.


기타노 다케시의 멜로

   그러나 〈하나비〉 계열의 감독으로만 기타노 다케시를 알고 있는 관객의 처지에서는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또 하나의 갈래가 이에 포함됩니다. 바로 남녀 간의 사랑을 그린 애정 영화, 또는 연애 영화입니다.

   그렇다고 기타노 다케시 영화에 다짜고짜 ‘멜로’라는 명칭을 갖다 붙이자니, 이것만은 아무래도 어색합니다.

   일본의 전통 인형극을 기조로 삼아 남녀 간의 운명적인 사랑의 극한 국면들을 옴니버스 형식을 원용한 독특한 스타일로 묘파한 작품 〈돌스〉(2003)가 이 계열에 속하는 드문 사례의 하나지요.

   문제는 〈돌스〉에 훨씬 앞서 초기에 이미 그와 같은 사례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의 불과 세 번째 작품인 이 영화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가 바로 그것입니다.


순정(純情)의 사랑

   기타노 다케시 영화 속 남녀 간의 사랑은 놀랍게도 즉물적이지 않고, 매우 순정적(純情的)입니다.

   이 영화에 나오는 두 청각장애인 커플도 마찬가지입니다.

   해변에서 그 둘은 정말 ‘우연히’ 만납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연인관계로 발전하는 과정은 당연히(!) 전혀 언어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관객은 모든 것을 오로지 감독이 허락하는 시각적 정보에 의존하여 파악할 수밖에 없습니다. 두 사람의 연애는 그야말로 ‘조용히’ 진행됩니다.

   관객의 처지에서는, 어쩌면 그 두 사람의 처지에서도,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덧 서로 연인관계가 되어 있더라는 식입니다.

   카메라는 인적이 드문―기타노 다케시 영화의 해변은 언제나 인적이 드물지요―해변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거나, 모래사장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말없이’ 오도카니 앉아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수평 트래킹으로, 또는 정지화면으로 그저 보여줄 뿐입니다.

   시종일관 그렇습니다. 무뚝뚝하기 짝이 없는 방식이지요.

   그래서 단 한 번 남자를 향한 여자의 ‘순정’이 절절하게 표현될 때 이는 마치 관객에 대한 서비스 같기만 합니다.

   하지만 단 한 번뿐이기에 그 절절함은 보는 이의 가슴을 둔중하게 치고 듭니다.

   해변에서 시간을 보내고 귀가하려는 참에 먼저 버스에 오른 여자의 뒤를 따르려던 남자가 운전기사의 제지로 키를 넘는 서핑 보드를 가지고는 버스에 탈 수 없게 되자 하는 수 없이 남자 혼자 걸어서 가게 되었을 때, 홀로 버스 안에 남은 여자는 할머니 한 사람을 제외하고 모든 승객이 하차하여 온통 빈자리뿐인 버스에서 자리에 앉지 않고 끝까지 서서 갑니다.

   먼 길을 차를 타지 못한 채 걸어서 올 남자에 대한 안쓰러움 때문이지요. 이 순정이 관객의 가슴을 울립니다. 이런 식입니다.


느닷없는 이별

   하여 어느 날 그야말로 ‘느닷없이’ 남자의 죽음이 닥쳐왔을 때도 카메라는 주인을 잃고 해변에서 맥없이 파도에 휩쓸리는 남자의 서핑 보드만을 달랑 보여줄 따름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물끄러미, 그야말로 아무 말도 없이 바라보는 여자의 무표정한 얼굴이 이어집니다.

   어느 날 ‘우연히’ 만나 ‘조용히’ 연애를 했던 두 사람은 그렇게 ‘느닷없이’ 이별을 맞이한 것입니다.

   온통 소란스럽고, 수다스럽고, 시끄럽고, 요란하기만 한 여느 영화들과는 달리 이 영화는 그야말로 ‘조용히’ 관객의 가슴속에 잔잔한 감동의 파문을 일으켜 놓습니다.

   이 잔잔함의 체험이 참 귀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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