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봉준호, 〈괴물〉
C76. 이 시대, 가족 파탄의 선언 - 봉준호, 〈괴물〉(2006)
괴물의 역할, 그 의미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이 영화를 끔찍하다고 한다면 오버일까요, 뒷북일까요?
나아가 21세기 들어 제가 본 가장 끔찍한 영화라고 한다면, 이것은 뒷북일까요, 오버일까요?
이 ‘끔찍함’은 당연히 제작비의 30퍼센트가 넘는다는 40억 원짜리 CG 캐릭터의 괴물스러운 실감이 나는 외모 때문도 아니요, 파충류스러운 움직임의 소름 끼치는 리얼함 때문도 아닙니다.
하나뿐인 딸을 구하려는 아버지의 사투에 가족 말고는 아무도 공감해 주지 않는 그 이상한 시추에이션 때문도 아니고요.
사태의 핵심은 괴물인데, 엉뚱하게도 바이러스를 퇴치한답시고 남의 나라 미국을 끌어들이는 국가 공권력의 황당한 헛다리 짚기 때문도 아닙니다.
대한민국의 젖줄인 한강에 엄청난 양의 포름알데히드를 ‘넓은 마음으로’ 유유히 방류하는 주한미군의 추악한 만행 때문도 아니고요.
문제의 독극물이 골뱅이를 ‘괴물’이라는 돌연변이 생물체로 뻥튀기(!) 해버린 그 엄청난 생물학적 변이 과정 때문도 아닙니다.
이유는 단 하나, 괴물의 역할 때문입니다. 아니, 그 역할의 의미 때문입니다.
가족과 괴물의 관계
개봉 당시 대한민국 영화 흥행 사상 최단기간 1천만 관객 돌파라는 신기록을 세운 이 ‘괴물 같은’ 영화를 두고는 그 테마를 소박하게 선뜻 ‘가족’이라고 규정해도 우습고, 사려 깊은 척 ‘가족’이 아니라고 해도 멋쩍습니다.
‘가족’이라면, 이 영화는 그 가족을 너무나 전면에 배치해 놓고 있어서 삼척동자라도 이 영화의 테마가 가족임을 오해하거나 착각할 여지가 없으니, 굳이 ‘이 영화의 테마는 가족이다’라고 선언하는 일 자체가 겸연쩍습니다.
또, ‘가족’이 아닐진대, 이렇게나 도저하게 처음부터 대놓고 가족 이야기를 하는 영화를 두고 굳이 그 테마가 가족이 아니라고 억지를 부린다면, 거기에는 뭔가 영화에 대한 자신의 감식안이나 심미안을 과시하려는 얄팍한 저의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조차 불러일으킵니다.
하지만 그러함에도 어떤 식으로든 가족을 언급하지 않고 넘어갈 수 없는 것은 이것이 괴물의 역할과 ‘치명적인’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에서 문제의 괴물이 이 가족 구성원 가운데 무려 둘의 목숨을 앗아가는 탓이 아닌 것입니다.
만일 그 때문이라면 이 영화는 가족 해체의 테마를 다루고 있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도 아주 즉물적인 차원에서의 해체지요.
여기서 치명적이라는 말은 그와는 정반대의 의미입니다.
이미 훼손된 가족
그러니까 가족의 파괴나 해체는 괴물의 진정한 구실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예, 그것은 도저히 괴물의 구실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영화의 가족은 영화가 시작하기 훨씬 전에 이미 그 원형이 심각하게 훼손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이 가족은 지금 할머니는 물론이거니와 무엇보다도 어머니가 없는 가족입니다. 게다가 아버지는 행동거지 자체가 어딘지 모자라는 위인이고, 삼촌은 운동권 딱지를 달고 있는 백수 신세로, 바깥으로만 떠돕니다.
무엇보다도 이 가족에게는 다 함께 모여 오순도순 살아갈 수 있는 집이라는 공간이 없습니다.
이런 규정에 반대하려면 한강 둔치의 그 썰렁한 간이매점을 가리켜 ‘홈 스위트 홈’이라고 억지를 부릴 수밖에 없습니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매점 말고는 집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공간을 결코 보여 주지 않습니다.
가족을 결속시키는 역할
하지만 그렇듯 처음부터 부서져 있는 가족을 무슨 부관참시하듯 다시금 파괴하는 것이 괴물의 역할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 영화의 테마가 가족이라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난센스일 것입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이 영화에서 괴물이 맡고 있는 역할은 가족의 파괴가 아닙니다. 정반대입니다.
예, 가족과 관련하여 이 괴물의 진정한 역할은 가족을 결속(!)시키는 것이 괴물의 진정한 구실, 역할, 아니, 임무입니다.
괴물이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이 가족의 외동딸이 백주에 괴물한테 납치되지 않았더라면 과연 이 가족이 그토록이나 끈끈하게 결속하는 사태가 벌어졌을까요.
흔히 그렇듯, 외부에서 비롯된 위기 상황은 내부를 결속시키는 법이지 않습니까.
또, 그 위기 상황이 심각하면 심각할수록 내부의 결속력도 그만큼 더 강화되는 법이지요.
요컨대, 바로 이 고전적인 원리가 영화 속 문제의 가족에게 고스란히 관철된 것뿐입니다.
이 영화가 끔찍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괴물이 끔찍한 것이 아니라, 괴물이 가족을 결속시키는 상황이 끔찍하다는 것이지요. 괴물 자체가 끔찍한 것이 아니라, 괴물이 이 영화에서 수행하고 있는 역할이 끔찍한 것입니다.
아니, 그 역할의 의미가 끔찍한 것이지요.
그러니까 저는 지금 ‘괴물로 말미암은’ 가족의 결속이 끔찍하다는 주장을 하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가족을 버리는 쪽은 대개 아버지였고, 반면에 무슨 수를 써서든 가족을 지키는 쪽은 어머니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무책임한 아버지에 성실한 어머니, 그리고 그 희생―.
하지만 이제는 그 어머니들도 가족을 버리기 시작했습니다. 가부장제가 아주 근원적인 지점에서부터 무너지고 있다는 증좌로 읽히는 사태라고 하면 될까요.
다시 말하면, 지금까지 가부장제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가족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 덕분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영화 속 가족의 모양새가 바로 그와는 사뭇 다른 지금 이 시대 가족의 상황을 고스란히 대변하는 셈이지요.
바로 그 가족을 할아버지를 중심으로 똘똘 뭉치게 만드는 역할을 하는 존재가 다름 아닌 괴물이라는 점이 핵심입니다.
파탄 난 가족
하지만 괴물은 실제가 아니라 허구입니다.
실물이 아니라 CG입니다.
과학적인 개연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한 과장이지요.
설사 영화의 설정을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괴물이 아니고는 그 가족이 결속할 일이 없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21세기 대한민국의 가족은 괴물이라는 존재의 등장이 아니고는 결코 뭉칠 수 없다는 이 역설적인 선언의 끔찍함―.
가족이 결정적으로 파탄 났다는, 이보다 더 끔찍한 주장을 저는 어떤 영화에서도 목도한 바가 없습니다.
물론 당연히 이런 생각 또는 주장은 가족의 파탄 자체가 선인가 악인가, 또는 긍정적인가 부정적인가 하는 평가와는 별개의 맥락에서 나온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