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文(문)4. 와신이 상담에 지다

- ‘와신상담’ 달리 따져보기

by 김정수

文(문)4. 와신(臥薪)이 상담(嘗膽)에 지다 / ‘臥薪嘗膽(와신상담)’ 달리 따져보기

단순한 ‘사자성어(四字成語)’가 아닌, 그 배경에 얽힌 나름의 ‘이야기’가 있는 ‘고사성어(故事成語)’는 번역 자체가 요령부득으로 무의미한 경우가 많습니다.

예컨대, ‘설상가상(雪上加霜)’이라는 사자성어의 경우 ‘눈 위에 서리가 덮이다’라고 번역만 해도 ‘안 좋은 일이 거푸 일어나서 처지가 어렵고 곤란하다’라는 그 고유의 의미가 금세 헤아려집니다.

하지만 이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는 고사성어의 경우 ‘섶(薪)에 눕고(臥) 쓸개(膽)를 맛보다(嘗)’라고 번역을 해놓으면 이것만으로는 도무지 그 의미를 알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고사성어의 경우는 그 성어의 고사(故事), 곧 그에 얽힌 ‘옛이야기’를 알아야 그 본디 의미를 헤아릴 수 있다는 점에서 단순한 사자성어보다는 아무래도 다소 어려운 느낌입니다.

그래도 ‘와신상담’은 우리에게, 원수를 갚거나,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해 스스로를 가혹하리만큼 닦달하며 노력한다는 의미로 이미 잘 알려져 있는, 비교적 이해하기 쉬운 고사성어지요. 저는 이걸 조금 다른 시각으로 뜯어보고 싶습니다.

우선 ‘고사’에 해당하는 그 역사적인 배경을 간단히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이 고사는 중국 춘추시대(春秋時代)에 서로 경쟁 관계에 있던 오(吳)나라와 월(越)나라 사이에 있었던 일입니다. 경쟁 관계라고 해도, 실은 오나라는 강대국이고 월나라는 약소국이라는 차이가 분명히 존재했지요.

그때 오나라에는 오자서(伍子胥)라는 발군의 책사(策士)가 있었습니다. 그는 초(楚)나라에서 왕에게 아버지와 형이 억울하게 목숨을 잃게 되자 화를 피해서 오나라로 도망쳐 온, 그러니까 일종의 정치적인 망명을 해온, 정사(政事)와 군사(軍事)에 뛰어난 재주를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오나라 왕 합려(闔廬)는 이 책사 오자서의 지략과 계책을 발판으로 월나라를 공격했는데, 그 과정에서 외려 큰 부상을 입었고, 그 상처가 악화되어 끝내 절명하고 맙니다. 역사를 보면 더러 이런 일이 생기지 않습니까. 예컨대, 당나라 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했다가 양만춘 장군이 쏜 화살에 맞고 패퇴한 것과 같은 사건 말이지요.

이 합려의 뒤를 이어 새로 오나라 왕위에 오른 인물이 그의 아들 부차(夫差)입니다. 그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섶(땔나무)에 누워 자면서 아버지의 원수 갚을 일을 잊지 않고자 노력한 끝에 드디어 월나라를 무찌르는 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부차는 오자서가 극구 반대하는데도 구천의 거짓 충성심에 현혹되어 기어이 그를 살려주고 맙니다. 이는 이때 구천이 부차한테 중국 4대 미녀―서시(西施), 왕소군(王昭君), 초선(貂蟬), 양귀비(楊貴妃)―가운데 한 명으로 유명한 서시(西施)를 바쳤기 때문이라는 야사(野史)의 이야기가 전합니다. 이 이야기대로라면 부차는 미인계(美人計)에 당한 셈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한데, 부차는 여기서 한 가지 더욱 결정적인 잘못을 저지릅니다. 바로 평소 오자서가 출세하는 걸 질시하고 있던 당시 재상(宰相)에 해당하는 태재(太宰) 벼슬의 백비(伯嚭)라는 인물이 악의를 품고 참소하는 말에 넘어가 오자서를 죽인 것입니다. 당시 유명했던 촉루(屬鏤)라는 이름의 칼(劍)을 하사하여 그것으로 자결하게 하는 방법으로요.

억울한 최후를 맞게 된 오자서는 집안사람들에게 자신이 죽고 나면 자기 눈을 당시 오나라 수도의 동쪽에 있던 문인 동문(東門)에 높이 걸어 월나라가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모습을 자신이 볼 수 있도록 하라는 한 맺힌 유언을 남깁니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구천은 날마다 쓰디쓴 쓸개를 맛보며 복수의 의지를 불사른 끝에 마침내 오나라를 쳐부수는 데 성공합니다.(이 쓸개가 동물의 것인지 사람의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동물의 것으로 보는 편이 자연스럽기는 합니다. 물론 사람의 것이라고 해도, 당시가 왕명으로 사람―죄인이든 아니든―을 얼마든지 죽일 수 있었던 춘추시대라는 점을 감안하면, 크게 무리는 없지 않겠나 싶습니다.)

다시 궁지에 몰린 부차는 구천에게 화친을 청하지만, 구천은 절대 그래서는 안 된다는 자기 책사 범려(范蠡)의 말을 받아들여 부차를 죽입니다.

이로써 최종 승자는 월나라의 왕 구천이 된 셈입니다.

이 승패가 드라마틱한 것은 최종 승자인 월나라가 애초 오나라보다 약한 나라였다는 점에 기인합니다.

이렇듯 강한 나라인 오나라의 왕 부차가 약한 나라인 월나라의 왕 구천한테 최종적으로 패배한 것은 거의 전적으로 부차 본인의 탓입니다.

여러 가지 객관적인 지표들, 그러니까 경제력과 군사력 따위에서 부차의 오나라는 구천의 월나라보다 분명히 훨씬 더 우위에 있던 강한 나라였습니다.

책사의 경우에도 월나라의 범려가 오나라의 오자서보다 더 뛰어난 인물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처럼 온갖 훌륭하고 유리한 조건을 구비하고서도 부차는 끝내 구천한테 패하여 자기 목숨까지 내어주는 치욕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물론 태재 백비라는 간신 모리배가 있었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는 요인이기는 하지만, 그런 개념 없는 신하를 등용하고, 나아가 그에 맥없이 휘둘린 책임은 한 나라의 군주로서 그 누구에게도 전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는 《삼국지(三國志)》에서 유비(劉備)가 관우(關羽)의 원수를 갚겠다는 조급한 마음에 군사(軍師)인 제갈량(諸葛亮)을 비롯한 주변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무리하게 대군을 일으킨 ‘이릉대전(吏陵大戰)’에서 섣불리 장사진(長蛇陣)을 치는 바람에 대패를 하고, 그때부터 촉(蜀)나라의 국운이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던 사례와도 맥락이 통합니다.

항우(項羽)가 책사인 범증(范增)의 계책을 따르지 않아서 결국 유방(劉邦)에게 천하를 내어주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 것도 마찬가지지요.

최고 지도자가 스스로 굳건히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둘리면 아무리 뛰어난 책사와 기본 국력을 갖추고 있더라도 나라는 금세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이 역사의 교훈입니다.

오나라 멸망의 근원적인 책임소재를 특정한다는 차원에서, 저는 부차가 패배한 단초가 이미 ‘와신(臥薪)’에 놓여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숫제 처음부터 부차의 ‘와신’이 구천의 ‘상담(嘗膽)’보다 조금 못했다는 뜻이지요.

고사성어로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고 함께 묶여 거론되고 있기는 하지만, ‘와신’과 ‘상담’ 사이에는 그 주체인 부차와 구천의 각오가 서로 얼마나 더 강하고 약한지, 또는 누가 더 상대를 도모하는 일에 절박했는지, 그 차이가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두 인물이 스스로 각오를 다지기 위해서 실천한 행동의 성격을 견주어보면 그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오나라 왕 부차가 ‘와신’을 실천하는 상황을 살펴보면, 그는 섶 위에 드러누워 지내면서 그곳을 드나드는 이들한테 이렇게 외치도록 시킵니다.

夫差而忘越人之殺而父耶(이망월인지살이부야)?

저는 다음과 같이 번역합니다.

부차야, 너는 월나라 사람들이 네 아비 죽인 일을 잊었느냐?

여기서는 而(이) 자가 ‘너(당신, 그대)’라는 2인칭 대명사로 쓰였고, 맨 끝의 耶(야) 자가 의문종결사라는 점만 주의하면 되겠습니다.

그 소리를 들으면서 부왕(父王)의 원수 갚을 일을 상기하여 때마다 새롭게 각오를 다지겠다는 의도지요.

한데, 월왕 구천이 ‘상담’을 실천하는 상황을 살펴보면, 그는 쓸개를 자기 자리 위에 매달아 놓고 누워 그 쓸개를 우러러보고 때마다 그 쓰디쓴 것을 맛보면서 ‘스스로’ 이렇게 말합니다.

女忘會稽之恥耶(여망회계지치야)?

저는 다음과 같이 번역합니다.

너는 회계의 부끄러움을 잊었느냐?

여기서도 女(여자 여) 자가 ‘너(당신, 그대)’라는 2인칭 대명사로 쓰였고, 마지막의 耶(야) 자가 의문종결사로 쓰였다는 점만 주의하면 되겠습니다. 물론 판본에 따라 이 女(여) 자 대신 汝(너 여) 자를 쓰는 경우도 있지요.

‘會稽(회계)’는 구천이 부차한테 패하여 도망쳤던 산의 이름입니다. 그래서 보통 ‘회계산’이라고 번역하는 경우가 많기는 합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부차와 구천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가 드러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부차는 남한테 말하게 시켰고, 구천은 스스로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부차는 의지를 굳세게 하고 각오를 다지기 위해서 남의 손을 빌렸고, 구천은 혼자서 스스로 그렇게 했다는 차이입니다.

아무리 각오를 다지기 위한 목적으로 감행한 일이지만, 남한테 의존한 쪽과 의존하지 않은 쪽 사이에 의지의 차이는 분명히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부차는 구천한테 이 의지의 강도에서 처음부터 밀렸던 셈입니다.

다시 말하면, 구천의 의지가 부차의 의지보다 더 강했던 것이지요.

이 의지의 강약, 그 차이가 뒷날 두 나라 사이에 최후의 승패를 결정짓는 요인으로 발전한 것이라는 것이 제 해석입니다.

부차가 첫 번째 전쟁에서 구천을 무찔렀는데도 오자서의 조언을 듣지 않고, 구천이 자신은 부차의 신하가 되고, 자기 여자인 서시는 부차의 첩으로 주겠다는 솔깃한 제안을 덥석 받아들여서 그를 살려주고 만 일부터가 부차가 지닌 성격의 유약한 한 단면이 극명하게 드러난 사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또, 부차가 태재 백비의 참소에 넘어가 책사인 오자서에게 촉루검을 내려주어 스스로 죽게 만든 것도 똑같은 맥락입니다. 속절없이, 항우가 ‘홍문의 연회(鴻門之宴)’에서 유방을 죽이라는 책사 범증의 말을 끝내 듣지 않고 유방을 살려준 일생일대의 실수를 저지른 일이 떠오르는 대목입니다.

이 모두가 부차의 의지가 충분히 강하지 못했던 탓에 빚어진 불상사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의지가 충분히 강하지 못하면 결정적인 순간 흔들리게 마련이니까요.

이런 오판과 오류들이 하나둘씩 쌓여서 마침내 나라의 멸망이라는 파국에까지 이르고 말았다는 것이 제 판단입니다.

그러니까 ‘와신상담’은 오나라가 월나라에 진 이야기, 곧 부차가 구천에게 진 이야기지만, 결국은 ‘와신’이 ‘상담’에 진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달리 말하면, ‘상담’이 ‘와신’을 이긴 이야기입니다. *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文(문)3. 버림받은 여인들은 어디로 갔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