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은망덕’의 심리학
文(문)5. 어째서 ‘背恩忘德(배은망덕)’을 하는가? / ‘背恩忘德(배은망덕)’의 심리학
널리 알려진, 그래서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는 사자성어들 가운데서도 이 ‘배은망덕(背恩忘德)’이라는 말은 단연 그 첫 번째 그룹에 속하는 사례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하긴, 이는 우리 생활 속에서 사자성어라는 느낌조차 없이, 무슨 숙어처럼 흔히들 쓰고 있는 말이니까요.
‘등질 배(背)’, ‘은혜 은(恩)’, ‘잊을 망(忘)’, ‘덕 덕(德)’―.
글자의 배열 순서를 지켜서 번역하면 ‘은혜를 등지고, 덕을 잊다’ 정도가 되겠지요.
하지만, 한문에서는 두 글자가 한 단어인 낱말을 한 글자 한 글자씩 떼어서 이와 같이 징검다리 모양새로 배치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본디는 ‘배망은덕(背忘恩德)’으로, 여기서 ‘배망’이 동사 곧 술어가 되고, ‘은덕’이 목적어가 되는, ‘술목구조’의 문장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은덕’은 국어사전에도 올라 있는 어엿한 한 낱말 아닙니까.
따라서 ‘은덕을 배망하다’ 곧 ‘은덕을 등지고 잊다’ 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고, 이를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의미에 맞추어 좀 더 익숙한 느낌으로 번역하면 ‘입은 은덕을 저버리고 배반하다’나, ‘입은 은혜를 잊고 배반하다’라는 식의 일반적인 사전의 풀이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저는 제가 배운 한문 문장 번역의 원칙대로 한 글자 한 글자를 배열된 순서에 충실히 맞추어서 ‘은혜를 저버리고, 덕을 잊다’라고 번역하겠습니다. 뭐, 이러나저러나 그 뜻은 특별한 축소나 확장, 또는 왜곡 없이 다 통합니다.
출전이나 이에 얽힌 고사를 찾으면 《漢書(한서)》나 《後漢書(후한서)》를 비롯하여 《楚漢志(초한지)》나 《三國志(삼국지)》까지도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이 글은 그런 이야기를 하려는 목적으로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이 ‘배은망덕’이라는 사자성어에, 또는 이 ‘배은망덕’이라는 ‘행위’에 얽힌 인간의 심리를, 또는 그 심리를 필터로 배은망덕이라는 사자성어의 의미를 새삼 다른 눈으로 ‘문득’ 한번 들여다보고 싶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을 언제, 어떤 때 쓰고 있을까요?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는 이 말을 ‘배은망덕을 저지르는 사람’을 비난하는 뜻으로 흔히 입에 올립니다. 그렇지요?
하지만, 이 비난은 과연 타당한 비난일까요? 이 비난은 과연 옳은 비난일까요? 예, 이런 의문에서 저는 이 글을 시작합니다.
먼저,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볼까요.
가해자는 자신이 저지른 가해를 고의로 또는 절로 곧잘 잊어버립니다. 이것이 가해자 쪽의, 또는 가해자 심리의 주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지만 그 가해자한테서 가해를 당한, 곧 피해를 입은 피해자는 그 피해의 기억을 평생 잊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떤 계기나 자극을 받아 그 일이 머릿속에 떠오를 때마다 어김없이 마음의 괴로움을 겪습니다.
그러니까 은혜를 베푼 쪽과 그 은혜를 입은 쪽의 관계도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와 비슷하지 않은가, 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베푼 쪽은 자기가 은혜를 베풀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하지만 그 은혜를 입은 사람은 평생토록 그 은혜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지요.
당연히 전제가 있습니다.
그 은혜가 아무런 사심 없이, 아무런 조건 없이, 아무런 계산속 없이, 그야말로 진심으로 베푼 은혜일 경우라는 전제입니다. 그런 은혜의 성격은 그 은혜를 받는 사람이 가장 잘 알고, 가장 정확히 느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 이 사람이 나한테 정말로 아무런 사심 없이, 아무런 조건 없이 진심으로 은혜를 베푸는구나!’
이런 생각이 드는 은혜는 베푼 쪽에서는 잊어버리고, 입은 쪽에서는 영원히 잊지 못합니다. 아니, 잊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 은혜를 기억하면서 자신도 그런 은혜를 베푸는 사람으로 살아가려 노력합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이건 성경말씀(마태복음 10장 8절)이기도 하지요.
예, 그런 은혜는 그 은혜를 입은 쪽의 삶을 바꾸어놓습니다.
(내가) 거저 받았으니, (나도) 거저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빅토르 위고의 장편소설 《레미제라블》에서 장발장이 입은 은혜가 바로 그런 것이었지요. 마리엘 주교가 장발장에게 베풀어준 은혜는 그 장발장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반대로 누가 어떤 사심을 가지고 은혜를 베푸는 경우 그 은혜를 입는 사람은 그 은혜가 진심에서 우러나온 은혜가 아니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차리고, 느낍니다. 참 신기하지요?
그 당장에는 현실적으로 필요해서 그 은혜를 속절없이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그 은혜에, 그 은혜를 베풀어준 상대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거나 감동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은혜는 시간이 지나면서 그 은혜를 받은 사람의 기억 속에서 그 존재감이 흐릿해지게 마련이고, 나아가 어느 시점에는 아주 사라져버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은혜를 베푼 쪽에서는 어떤 사심으로, 어떤 계산속에서 그 은혜를 베풀었기 때문에 그 은혜를 은혜가 아니라, 언젠가는 반드시 되받아야 할 빚으로 여깁니다. 빚이니까 잊지 않는 거지요. 언젠가는 꼭 받아내어야 하니까요.
최소한 그 은혜를 베풂으로써 자기 사람 됨됨이에 대한 평판이라도 높아져야 하는 것입니다. 남들에게 자랑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숫제 이걸 목표로 은혜를 베푸는 경우도 있지요.
이때 은혜를 받는 사람은 그 은혜를 베푸는 사람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수단으로(만) 대하지 말고 목적으로(도) 대하라는 임마누엘 칸트의 명제가 무색해지는 마당입니다.
그렇듯 애초 빚의 성격을 지닌 은혜를 주고받은 쌍방은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당연히 거기에 감사나 감동이 있을 까닭이 없지요.
저는 배은망덕이라는 행위는 바로 그런 관계에서 빚어지는 것이기도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더러더러 우리는 생활 속에서 이런 말이 오가는 정황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합니다.
“내가 그때 너한테 어떻게 해줬는데, 그거 벌써 다 잊어버렸니?”
오래전에 A가 B한테 은혜를 베푼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은혜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순수한 은혜가 아니었습니다. 하여 그 은혜를 베푼 A는 그 은혜를 자기가 베풀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지만, B는 그 은혜가 그 당장에는 필요해서 받기는 하였어도 그것이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님을 느꼈기에 감사한 마음도 들지 않았고, 따라서 감동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하여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히 잊어버린 것이지요. 또는, 짐짓 잊은 척하는 것일 수도 있고요. 기억하기 싫으니까요.
심지어 그런 ‘가짜’ 은혜는 베푸는 쪽과 받는 쪽의 위계를 뚜렷하게 만들어놓는 경우가 많습니다. 베푸는 쪽이 위이고, 받는 쪽이 아래인 것이지요. 베푸는 쪽은 우월감을 느끼고, 받는 쪽은 굴욕감을 느낍니다.
이 굴욕감, 수치스러움, 부끄러움, 열등감, 열패감, 나아가 자괴감은 그 은혜를 받는 쪽의 영혼을 망가뜨립니다. 더러는 감사나 감동은커녕 외려 증오와 복수심을 빚어내는 데에까지 나아가기도 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배은망덕의 행위는 그렇게 해서 생기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누가 배은망덕을 저질렀다는 소리를 들을 때면 그 배은망덕의 주체를 비난하기에 앞서 거기에 어떤 배경이 있는지를 함께 살피기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는 것입니다.
이 또한 성경말씀(마태복음 6장 3절)이지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이 왜 있겠습니까.
진정한 은혜는 아무나 베풀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예, 은혜를 베풀 수 있을 만한 ‘사람’이 먼저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 또한 ‘능력’이 아닐까요.
실제로 저는 지금껏 살아오는 동안 주변에서 은혜를 주고받은 쌍방이 뒷날 서로 원수지간이 되는 경우를 적잖이 보았습니다. 그 ‘은혜’가 어떤 성질, 어떤 정도, 어떤 모양새의 것이든 말입니다.
예, 배은망덕, 간단한 말이 아닌 것 같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