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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수 May 26. 2024

4. 신과 인간의 이야기

  - 클린트 이스트우드, 〈밀리언 달러 베이비〉

4. 신과 인간의 이야기 - 클린트 이스트우드, 〈밀리언 달러 베이비〉(2005)

어질지 않은 천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삶은 공평하지 않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습니다. 아니, 공평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공정하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노자(老子)의 말처럼, 천지(天地)는 가혹하리만큼 불인(不仁)하며, 수시로 우리의 기대를 배반하고, 마침내 가차 없이 우리의 뒤통수를 때립니다. 한마디로, 어디 맛 좀 보라는 듯이 ‘엿을 먹이는’ 것이지요.

   우리는 한없이 억울합니다. 그렇다고 누구한테 억울하다며 하소연해 봐야 별 소용도 없습니다. 그 ‘누구’도 나와 마찬가지로 억울한 생을 힘겹게 살아가는 한갓 필부일 뿐이니까요. 그저 꾹 참고 몸과 마음을 추슬러서 기어이 다시 시작할 도리밖에는 없습니다.

   한데, 삶은 그렇듯 우리에게 온갖 수모를 겪게 한 뒤에야 비로소 겨우 뭔가를 말해 주기 시작합니다.

   그러함에도 여전히, 그것이 우리의 고생에 대한 보답인지, 아니면 우리를 쓰러뜨리는 결정적인 ‘카운터블로(counterblow)’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삶이 우리에게 뭔가 반응을 해온다는 사실 자체가 의미로울 뿐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여기서부터는 사실의 영역이 아니라 믿음의 영역입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그것을 우리의 인내에 대한 삶의 응대라고 무작정, 속절없이 믿는 척이나마 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온몸이 굳어버리는 가공할 신경세포질환인 루게릭병 환자로서 세계적인 과학자의 반열에 오른 스티븐 호킹의 다음과 같은 말 앞에서 우리가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래서입니다.

   ‘사람은 삶이 공정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까지 커야 한다. 그대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 몸이나 지식이나 돈이나 권력의 차원을 넘어 진정한 어른이 된다는 것은 결국 삶의 불공평함과 불공정함을 얼마나 뼈저리게 깨닫느냐의 여부에 달린 사태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진정한 어른

   하지만 삶이 그토록 고약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진정한 어른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왜 삶이 그래야만 하는가?’라는, 아무도 풀 길 없는 이 마지막 의문만은 속절없이 남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여기서부터는 철학이 아니라 신앙의 영역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이는 그 옛날 십자가를 눈앞에 둔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님께서 몸소 증명해 보이신 문제이기도 하지요.

   예수님께서도 그 가공할 의문을 풀 길이 없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믿으셨습니다. 아니, 믿기로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저는 그게 참 놀랍습니다. 아마도 그것이 정답 아닐까요. 선택이야말로 아무나 할 수 없는, 한 걸음 더 나아간 어른만의 징표라고 할 수 있을 터이니까요.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바로 이 기막힌 의문에 사로잡힌 인물, 곧 진정한 어른이 나오는 영화입니다.

   다시 말하면,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진정한 어른을 위한, 혹은 진정한 어른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영화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권투 영화의 감동

   흔히 그러하듯, 표면의 이야기는 일종의 속임수이기 십상입니다. 아니면, 이면에 숨어 있거나 틈새에 끼어들어 있는 진정한 이야기의 주제를 역설적으로 또 반어법적으로 강화하기 위한 극적 장치겠지요.

   이 영화의 표면은, 어쨌거나, 권투 이야기입니다. 지금은 K-1이나 PRIDE나 UFC 같은 신종 격투기 스포츠에 밀려 사양길에 접어든 인상이 짙지만, 영화로 만들었을 때 권투는 아직도 스포츠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제일 밀도 높은 감동을 자아내는 소재가 아닐까, 싶습니다.

   미학적으로든 정서적으로든, 권투는 스포츠 영화에서 언제나 선도적인 역할을 해온 소재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듯합니다.

   실베스터 스탤론을 세계적인 스타로 만들어준 존 G. 아빌드센의 〈록키〉(1976)가 그랬고, 로버트 드 니로에게 생애 첫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안겨준 마틴 스콜세지의 〈분노의 주먹(성난 황소)〉(1980)이 그랬습니다.

   어째서일까요?

   제가 찾은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권투야말로 명실상부한 ‘헝그리 스포츠’라는 점이고, 또 하나는, 가장 신사적인 격투기 종목이라는 점입니다. 물론 이는 전적으로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후자에 대해서는 설명이 필요하겠습니다.

   세상의 모든 격투기를 통틀어 쓰러진 상대를 공격해서는 안 된다는 규칙을 가진 종목은 권투뿐입니다. 있다면, 이 규칙을 권투에서 빌려간 것입니다. 실제로는 공격할 수 있는 기술이 있으면서도 권투를 본떠서 사용하지 않을 뿐이지요. 처음부터 공격법 자체가 없는 종목은, 적어도 제가 아는 범위에서는 권투가 유일한 사례입니다.

   이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권투는 영화 속으로 들어오면 이상하리만큼 가슴 뭉클한 정서적이고 감정적인 울림을 야기합니다. 적어도 저에게는 그렇습니다. 이 울림의 매력이 그동안 권투 영화의 양산을 부채질해 왔다고, 나아가 그 수명을 지금도 계속 늘려나가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권투의 인생론

   바로 이 권투의 매력에 기대어, 아니면 권투의 매력으로 위장하여 이 영화는 슬그머니 이즈막에는 좀처럼 보기 힘든 심오한 종교적 인생론을 펼칩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은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한 늙은 트레이너가 밑바닥 인생의 한 젊은이를 권투 챔피언으로 키우는 과정에서 좌절하는 이야기.’

   드라마로서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요.

   한데, 이 영화에서 ‘늙은 트레이너’는 예의 ‘진정한 어른’이고, ‘젊은이’는 ‘젊은 여자’입니다. 물론 이조차도 표면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독히도 무신경한 관객만 아니라면 일찌감치 이를 알아차릴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야기가 권투라는 표면을, 또는 중심 줄기를 일사천리로 따라가지 않고 자꾸만 샛길로 빠지는 것이지요. 거기에 진정한 어른으로서 늙은 트레이너인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이상한 행적이 출몰합니다.     


신의 카운터블로

   두 가지가 단연 두드러집니다.

   하나는 유일한 가족인 자기 딸한테 답장 없는 편지를 끊임없이 쓰는 그의 모습이고, 또 하나는 주일 미사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그가 때마다 종교적으로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던져 사제(신부)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모습입니다.

   후자가 핵심이지요.

   요컨대, 그는 진정한 어른이자, 매우 종교적인 인물인 것입니다. 혹은 종교적인 문제의식을 품고 있는 진정한 어른입니다.

   그만큼 겪었으면 삶이 무엇이라는 것쯤 모를 턱이 없습니다. 삶이 공평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공정하지도 않다는 것, 툭하면 우리 뒤통수를 친다는 것, 무슨 빌미만 생기면 가차 없이 우리를 물 먹인다는 사실을 넉넉히 알 만큼 알 나이입니다.

   문제는 그가 그 지점에 멈추어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그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습니다. 왜 삶이 그래야만 하는지, 왜 자신은 이렇게 살아가야만 하는지, 이 의문들을 그는 막을 수도, 외면할 수도 없습니다.

   그가 온갖 장애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나이 서른이 넘은 여자를 권투 챔피언으로 만들 허망한 꿈에 매달리고야 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그는 지금 신에게 반항하고 있는 것이라고요. 삶이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항변하고 있는 것이라고요. 그러니까 이는 그 딸 같은 여성을 최고의 권투선수로 온 정성을 다해 키우는 방식의 항변입니다.

   하지만 천지는 어질지 않고, 삶은 불공평할 뿐만 아니라, 불공정하기까지 합니다. 이 가혹한 원리를 뒤집어엎을 수 있는 인간이 누가 있겠습니까.

   마침내 신은 보란 듯이, 여자가 링 위에서 상대의 비겁하고 부당한 공격에 그만 회복할 수 없는 심각한 부상을 입도록 하는 방식으로 여자를 파멸시키고 맙니다.

   하지만 신이 주관한 그 혹독한 카운터블로를 얻어맞고도 그는 쓰러지지도 않고, 멈추지도 않습니다.

   이번에는 그 파멸 당한 여자를 안락사시키는 방법으로 신에 맞섭니다.

   저는 뭇 영화를 통틀어 이보다 더 슬픈 삶의 국면, 이보다 더 장엄한 복수의 현장, 신을 향한 이보다 더 가열한 항변, 이보다 더 심오한 종교적 질문의 장면을 본 적이 없습니다.

   이 대목에서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이제 더는 권투 이야기도, 사제(師弟)의 드라마도, 의사(擬似) 부녀 이야기도 아닙니다. 오로지 신과 인간의 이야기, 바로 그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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