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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수 Jun 02. 2024

5. 무엇이 그들을 사랑하게 만들었나?

  - 이창동, 〈오아시스〉

5. 무엇이 그들을 사랑하게 만들었나? - 이창동, 〈오아시스〉(2002)

과거나 미래가 궁금한 사람들

   영화에서 주인공의 온 생애를 다 볼 수 있는 경우는 그것이 명백한 전기(傳記)가 아닌 다음에야 매우 드문 일일 것입니다. 관객은 대개 그 인물의 생애에서 일정한 기간만을 접할 수 있을 따름이지요. 더러 그 인물의 과거나 미래가 궁금해지기도 하는 것은 이 탓입니다.

   물론, 영화가 그 인물이 태어나는 것으로 시작하거나, 죽는 것으로 끝난다면, 각각 그 인물의 과거나 미래를 궁금해할 여지 자체가 없어지는 셈이 되니, 별문제겠지요. 하지만 보통은 그렇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는 피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주인공의 과거나 미래가 예외 없이 죄다 궁금한 것은 아닙니다. 특별히 그런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영화 속 인물들이 따로 있지요.

   저의 경우에, 보기를 들자면, 과거가 궁금한 인물로는 〈택시 드라이버〉(1976, 마틴 스콜세지)의 주인공 트래비스(로버트 드 니로)가 있고, 미래가 궁금한 인물로는 〈기쁜 우리 젊은 날〉(1987, 배창호)의 주인공 김영민(안성기)을 꼽을 수 있겠습니다.

   트래비스는 그의 병적인 불면증과 기이한 정의감과 엽기적인 행각의 심리적 배경으로 추정되는 베트남 전에서 그가 겪은 일들의 상세한 내용이 궁금하고, 김영민은 그토록 일편단심으로 사랑했던 아내를 잃고 홀로 어린 외동딸을 키워야 하는 장차의 삶의 과정, 곧 그 후일담이 궁금한 것이지요.

   다시 말해서, 이 두 작품은 제게 주인공의 과거나 미래를 궁금케 하는 그 나름만의 어떤 불가항력의 매력을 지닌 영화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아시스〉는 홍종두(설경구)의 과거가 몹시 궁금한 영화입니다.

   영화에서 어떤 인물의 과거를 처리하는 데는 두 가지 방식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회상 장면(플래시백)으로 직접 보여주는 것이고, 또 하나는 대사나 내레이션을 통해서 말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오아시스〉는 대사만으로 홍종두의 과거를 설명하는 영화입니다.     


이상한 비밀들

   〈오아시스〉는 비밀이 많은 영화입니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미스터리 장르인 것은 아니지만, 이야기 구조 자체가 그 비밀들을 풀어놓는 과정에 고스란히 대응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적어도 제가 보기에는 그렇습니다.

   그 비밀들 가운데 몇 가지는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차례로 탄로 나지만, 딱 한 가지만은 끝까지 정체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이 마지막 한 가지 비밀에 이 영화의 진정한 주제가 놓여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 탄로 나는 몇 가지 비밀들은 주로 종두와 공주(문소리)에 얽힌 것들입니다.

   먼저, 종두의 경우입니다.

   이미 폭력과 강간 미수범 경력이 있는 홍종두가 뺑소니 과실치사로 2년 반의 옥살이를 한 뒤 갓 출소한 전과 3범이라는 사실은 영화 초반에 얻을 수 있는 정보지만, 교통사고 뺑소니 사건의 진범이 종두의 형님이라는 사실은 나중에 밝혀집니다.

   그러니까 사정이야 어찌 되었든 종두는 형님을 대신하여 죄를 뒤집어쓰고 억울하게 옥고를 치른 셈입니다.

   다음은 공주의 경우입니다.

   종두가 출소 다음 다음날 허름한 다세대 주택으로 과일 바구니를 사서 들고 찾아갔을 때 그를 맞이한 사람은 다름 아닌 뇌성마비 장애인 한공주입니다. 이내 밝혀지는 것은 이 공주가 바로 종두가 저지른 것으로 처리된 뺑소니 교통사고 피해자의 딸이라는 사실입니다.

   장애인인 공주가 집에 혼자 있는 것은 공주 덕에 장애인 아파트를 분양받은 공주의 오빠네가 공주를 짐만 된다고 여겨 이 옛집에 혼자 버려두고 그 분양받은 새 집으로 이사를 가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로 미루어 그들의 인간 됨됨이가 어지간히 짐작되지요.

   그러니까 오빠네 내외는 동사무소(지금의 주민센터)에서 명의도용 여부를 조사하러 그들을 방문해 오는 날에만 그 담당 직원들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잠시 공주를 자기들의 새 집에 데려갔다가 조사가 무사히 끝나면 다시 이 옛집에 돌려놓곤 하는 식의 이중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나중에 밝혀집니다.    

 

그의 과거가 궁금하다

   그러나 이 과정을 통해 알 수 있는, 또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은 표면적인 내용에 지나지 않습니다.

   종두가 여러 가지로 처치 곤란한 문제적 인물이라는 사실, 공주가 뇌성마비 장애인이라는 사실, 둘의 관계가 각기 같은 교통사고에서 가해자와 피해자 가족이라는 사실, 종두나 공주 모두 자기 가족들로부터 교묘하게 배척당하고 있다는 사실 등등은 따지고 보면 하나같이 어처구니없을 만큼 딱한 사정들입니다.

   한데, 이 딱한 사정들로부터 파생되는 현상은, 웬걸요? 공주와 종두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이성으로는 선뜻 이해하기 힘든 이 현상이 감정으로는 받아들여진다는 것도 신기합니다. 어째서 이런 현상, 이런 사태가 벌어지는 것일까요?

   영화에 나오지 않는 종두의 과거가 바야흐로 궁금해지기 시작하는 것은 바로 이 대목에서부터입니다.    

 

기도를 요청한 불한당

   이 영화에는 뜻 없이 스쳐 지나가는 듯하지만, 정작은 아주 중요한 장면 하나가 있습니다.

   종두는 자기 욕망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여 충동적으로 공주를 범하려다 실패합니다. 종두는 그 뒤에 다시 공주를 찾아가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빕니다. 그러고 나서 종두는 공주를 휠체어에 태우고 그 집 옥상으로 데려가 공주에게 맑은 하늘을 보여주지요.

   이 대목에 바로 이어지는 것이 문제의 장면입니다.

   종두가 공주와 만나고 나서 집으로 돌아와 보니, 대문 앞에서는 어머니와 형수가 심방(尋訪) 왔다 돌아가는 목사를 배웅하고 있습니다. 얼결에 마주친 목사와 종두는 어색하게 간단한 수인사를 나눕니다. 이때 어머니가 목사한테 종두를 소개하며 느닷없이 다음과 같은 한마디를 내뱉습니다.

   “얘 어렸을 때 성가대 참 열심히 했어요.”

   성가대? 성가대라니요? 그렇다면, 종두한테는 기왕에 신앙의 경험이 있었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뿐만이 아닙니다. 이어지는 상황은 더욱 기이합니다.

   종두가 갑자기 당돌하게 목사를 불러세웁니다. 그리고 주뼛거리며 이런 부탁을 합니다.

   “절 위해서요, 기도 좀 해주시면 안 돼요?”

   기도라고요? 세상에, 천하의 불한당 종두가 목사에게 직접 기도를 요청한 것입니다. 목사는 다소 당황스럽지만, 얼른 그들과 함께 골목길 한쪽으로 가서 다 같이 손에 손을 잡고 종두를 위한 기도를 시작합니다.

   “참 고마우신 하나님 아버지……”

   목사의 기도가 계속되는 가운데 종두는 문득 눈을 뜨고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조금 전 공주네 집 옥상에서 공주와 함께 올려다보았던 바로 그 하늘입니다. 이 순간 종두를 연기하는 배우 설경구님의 눈빛은 참 잊기 힘든 것입니다. 그렇듯 잊기 힘든 설경구님의 눈빛을 우리는 〈박하사탕〉(2000)의 마지막 대목에서도 목격할 수 있지요.     


재검토의 지점

   여기서 주의 깊게 따져볼 문제는 어떤 장면들 사이에 이 대목이 놓여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앞에는 공주가 종두의 호의를 받아들이기 시작하는 장면이, 뒤에는 종두가 카센터를 하는 형님(안내상)한테 일을 배우고 싶다고 말하는 장면이 놓여 있지요. 절묘한 타이밍입니다.

   법적으로는 전과 3범이지만, 실제로는 2범인 종두가 형 대신 겪은 감옥생활을 통해서 뭔가 중대한 영적 변화를 겪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은 이제 더는 허황한 생각이 아닐 것입니다.

   신앙의 눈으로 이 영화를 재검토하기 시작해야 할 지점이 바로 여기입니다.     


천진난만한 어린아이

   종두의 전력은 나름 흉악합니다.

   하지만 종두 자신은 전혀 흉악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시종일관 그렇습니다. 그는 항상 웃는 얼굴입니다. 천진난만하기가 이를 데 없지요.

   영화의 첫머리, 출소하던 날 종두는 반 소매 옷차림으로 한겨울의 거리를 어슬렁거리다 불쑥 어느 가게에 들러 생두부 한 모를 사 먹습니다. 그런 그에게 인심 좋은 주인이 함께 먹으라며 서울우유 한 팩을 건네주지요. 그 순간의 종두를 보십시오.

   종두는 주인의 호의에 고맙다는 인사는 차릴 줄 모르고 “해태우유가 좋은데……” 운운하며 생각 없이 나오는 대로 지껄여 그 주인을 민망하게 만듭니다. 이 장면에서부터 시작된 종두의 천진스러운 행각은 영화 내내 변함없이 계속됩니다.

   몸은 20대 후반의 청년이지만, 정신연령은 어린아이인 것입니다. 책임감도, 자기 통제력도, 예의범절도 없지요. 당연히 남을 배려할 줄도 모릅니다.

   반면, 공주는 뇌성마비 장애인이 흔히 그렇듯 몸은 마음대로 통제가 되지 않아도 정신만은 온전합니다. 어쩌면 공주는 상상 이상으로 명민한 통찰력 또는 감식안의 소유자인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그래서 공주는 종두의 그 어린아이스러운 천진함을 꿰뚫어 보고, 그 특유의 무도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의 천진한 행각을 이해하고 받아들인 것이 아닐까요.

   어쨌거나, 그런 두 사람이 만나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는 것입니다. 정확히는 종두가 공주네 집으로 ‘천진스럽게’ 찾아간 것이 그 계기가 된 셈이지만요.

   따라서 영화가 끝난 다음 우리는 맨 첫 장면으로 다시 돌아와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질문해야 합니다.

   ‘그 2년 반 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종두는 출소하자마자 공주네 집부터 방문한 것일까?’  

   

무엇이 그들을 서로 사랑하도록 만들었나?

   답은 이미 주어져 있습니다.

   출소하자마자인 것으로 미루어 종두는 진작부터 그러기로 마음먹고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또, 그것은 가해자가 피해자를 방문하는 것이므로 속죄와 위로의 행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또, 마땅히 그래야만 하고요.

   하지만 그 죄는 종두의 것이 아닙니다. 형님의 것이지요.

   그렇다면 종두는 형님 대신 공주를 방문하여 형님의 죄를 ‘대속(代贖)’하려 하는 셈이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어째서 온 가족의 문제아였던 그가 갸륵하게도, 또는 기특하게도 감히 대속할 마음을 품을 수 있었을까요?

   이를 감옥에서 그가 영적으로 변화한 덕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섣부릅니다.

   제 생각에 형님 대신 감옥에 가겠다고 결심했을 때 그는 이미 변화해 있었다고 보아야 옳습니다.

   따라서 그런 결심은 그의 영적 변화가 빚어낸 한 가지 결과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종두로 말미암아 그 가족이 보존될 수 있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이렇게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요? 종두는 가족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했다고요.

   장애인 아파트 분양을 공주의 희생이 빚어낸 결과라고 할 수 있다면, 공주의 희생도 마찬가지 의미로 해석해야 맞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둘한테서는 억울한 희생자들 특유의 그늘이 어느 구석에서도 엿보이지 않습니다.

   심지어 종두는 공주조차도 웃게 만듭니다. 교만하지도 않고요. 완전한 어린아이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저는 자꾸만 이렇게 생각하고 싶어집니다.

   ‘공주와 종두를 서로 만나게 하려는 어떤 거룩한 섭리가 보이지 않는 배후에서 작동하였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들의 미래를 우리가 지레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 미래는 이 섭리를 주관하신 분의 몫일 테니까요. 책임지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어느 날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느닷없이 이렇게 여쭈어봅니다.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이에 예수님께서는 한 어린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결단코’라는 단서가 섬뜩하게 가슴을 저미고 듭니다. 그리고 동시에 따스하게 가슴을 적시고 듭니다.

   이것이 이 영화가 끝내 밝혀놓지 않은 마지막 비밀일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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