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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수 May 19. 2024

3. 신의 빅 픽처

  - M. 나이트 샤말란, 〈싸인〉

3. 신의 빅 픽처 - M. 나이트 샤말란, 〈싸인〉(2002)

기로에 선 성직자

   영화에 흔히 등장하는 성직자들 가운데 제 기억 속에 지우기 힘든 선명한 인장(印章)을 새겨넣은 첫 인물은 로널드 님의 〈포세이돈 어드벤처〉(1978)에서 젊은 날의 진 해크먼이 연기했던 저 패기에 넘치는 행동주의자 리버렌드 스코트 신부입니다.

   물론 저는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본 것이 아니라, 오래전 어린 시절에 자그마한 흑백 텔레비전 화면으로 처음 보았습니다. 한데도 그 엄청난 규모의 스펙터클은 드라마틱한 이야기와 더불어 시각적으로 저를 압도하기에 충분했지요.

   그랬음에도 제 기억에는 이 영화가 당시로서는 최첨단의 온갖 특수효과들을 총동원한 한 편의 거대한 재난영화가 아니라, 온전히 한 성직자의 믿음, 또는 신앙에 관한 영화로 남아 있습니다. 많은 사연과 테마가 복잡하게 뒤얽혀 있었는데도 그랬습니다. 단 한 장면 때문입니다.

   망망대해 한가운데 무자비한 폭풍우로 맥없이 뒤집힌 거대한 여객선 안에서 피로와 굶주림에 지친 일단의 사람들을 이끌고 탈출로를 찾아 헤매던 스코트 신부는 마침내 자신의 목숨을 내놓지 않을 수 없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 직면합니다.

   이제 거의 다 왔는데, 조금만 더 가면 구조대의 손길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하필이면 여기서! 순간 그는 하늘을 우러러 원망 조로 절규합니다.

   “이게 정말 당신이 원하시는 것입니까?”

   그는 거의 분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그는 갈데없는 성직자인 것을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의 애처로운 눈빛을 일별한 뒤 그는 마침내 스스로를 희생하기로 마음먹고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죽음의 깊은 골짜기로 제 몸을 기꺼이 내던집니다. 이 희생을 딛고 남은 사람들이 마지막 고비를 무사히 넘겨 구조되는 것이 영화의 결말이지요.


구조가 아니라 구원

   이 대목에서 저를 진정으로 감동케 한 것은 그 희생의 거룩함이 아니라, 찰나와도 같은 선택의 순간 젊은 신부가 솔직히 드러내 보인 저 지극히도 인간적인 고뇌의 모습이었습니다.

   아무리 그가 성직자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날카롭게 의식했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선택의 문제 아니겠습니까. 그 순간 다른 누구도 아닌 반드시 그가 희생해야만 할 이유는 없을 터이니까요.

   구조가 확실하지 않은 상황일진대, 어쩌면 그러지 않는 편이 남은 사람들을 위해서는 오히려 더 합당한 처사일 수도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한 치 앞도 내다보이지 않는 암담한 상황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지를 신이 아닌 인간이 어찌 감히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한데, 여기서 그는 스스로 희생을 선택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자신의 소명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밖에는 달리 설명할 방도가 없지 않을까요.

   마치 그 옛날 십자가를 앞에 두었던 예수님처럼 그 또한 선택의 기로에서 인간적인 고뇌의 과정을 거쳤다는 점이 제게는 참 소중합니다. 그 어린 시절의 저에게도 그것은 명백히 ‘구조’가 아니라 ‘구원’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스코트 신부를 따르던 사람들은 ‘구조된’ 것이 아니라 ‘구원된’ 것입니다.     


신의 섭리라는 시각

   그 뒤로 기회가 생겨 1978년작 〈포세이돈 어드벤처〉를 다시 볼 때마다 저는 그 대목에서 어김없이 감동하곤 하였습니다. 설령 세월의 때가 묻어 순도는 낮아질지언정, 저한테 그것이 〈포세이돈 어드벤처〉에서 가장 감동적인 대목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렇더라도 감동은 어디까지나 영화를 보는 그 당장의 것입니다. 영화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떨어져 나오면 아무래도 생각은 달라집니다. 다른 각도에서 영화를 바라보게 되는 것이지요.

   이때 역시 초점이 되는 것은 비극의 여객선 포세이돈 호에 신부가 승선하게 된 데에는, 어떤 ‘예정’에서든, 몇몇 ‘추려진’ 또는 ‘선택된’ 사람들의 인도자로서 그를 낙점하신 신의 섭리가 작동하고 있었으리라는 통찰과 믿음입니다. 말하자면 신의 ‘빅 픽처’인 것이지요.

   설사 이것이 도식적인 사고라 할지라도 이 생각을 멈출 도리는 없습니다.

   동시에 이는 곧 영화 속의 상황 전체를 조감(鳥瞰)하는 태도로서 더없이 효과적이라는 점도 부정하기 힘듭니다. 특히 종교적인 테마와 관련하여 중요한 기로에 선 성직자가 등장하는 영화일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이런 시각에서 〈싸인〉은 대단히 적절하고도 독특한 사례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두 개의 미스터리

   영화는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 근교의 외딴 곳에 사는 한 사내가 어느 날 ‘미스터리 서클’(1946년 영국에서 처음 발견된 이래 아직도 그 원인이 과학적으로 명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으니, 말 그대로 ‘미스터리’인 서클입니다)이 자신의 옥수수 농장에 거대하게 만들어져 있는 상황과 느닷없이 마주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물론, 이 사내가 그래함 헤스(멜 깁슨)라는 이름의 전직 신부(정확히는 성공회 신부)이며, 그 시점으로부터 6개월 전에 사랑하는 아내를 교통사고로 잃었고,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여 신앙을 버리고 성직을 그만두었다는 정보는 시간이 조금 더 흘러야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이처럼 ‘두 가지 미스터리’에 직면해 있는 문제적 인물이라는 사실입니다. ‘미스터리’란 원인불명의 모든 사태에 손쉽게 갖다 붙이는 말 아닙니까. 마치 UFO(미확인비행물체)처럼요.

   이 사내에게, 그가 지금 막 맞닥뜨린 미스터리 서클은 과학적으로 원인불명인 사태이고, 6개월 전 그의 아내에게 갑자기 닥쳐온 비명횡사(非命橫死)는 종교적으로, 또 실존적으로 원인불명의 사태입니다. 당장은 이렇게 구분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따라서 방송에서 뭐라 호들갑스럽게 떠들어대어도, 또 그것이 실제 외계인의 침입으로 빚어진 가공할 사태라는 점이 밝혀져도, 미스터리 서클 따위는 그에게 별로 중요한 사안이 못 됩니다. 그는 여전히 아내의 죽음이라는 더 거대한 미스터리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그가 너무도 견고히 포박되어 있어서 다른 어떠한 사태도, 그러니까 외계인조차도 그를 아내의 죽음이라는 문제로부터 좀처럼 떼어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정서, 심리, 정신, 영혼의 상태로 6개월 동안을 그는 성직조차도 내팽개친 채 동생과 함께 두 아이를 데리고 칩거하듯 외딴 농장에서 세상과 격리된 삶을 살아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쯤 되면 더는 부연 설명이 없이도 우리는 그의 내면적 상황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습니다. 바야흐로 그는 신에게 화가 나 있는 것입니다. 어째서 사랑하는 아내가 죽어야만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도대체 신이 무슨 까닭으로 아내의 목숨을 거두어가셨는지를, 그러니까 아내의 죽음에는 신의 어떠한 섭리, 어떠한 빅 픽처가 그 배경에 놓여 있는지를 그는 아직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파악하지 못했으니, 어찌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그가 지난 6개월 동안 이 해독 불가의 미스터리로 엄청난 심리적 고통과 정신적 고뇌의 나날을 보내었으리라는 짐작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 섭리를 이해할 수만 있다면 일생을 신을 섬기는 데 바칠 각오로 성직자의 길에 투신한 그가 설사 아내의 죽음보다 더한 불행인들 받아들이지 못할 까닭이 없습니다.

   맞습니다. 이해할 수만 있다면, 그래서 믿을 수만 있다면, 그 먼 옛날의 아브라함처럼 사랑하는 아들조차도 기꺼이 제물로 바칠 수 있는 것이 신앙인이요 성직자입니다.

   하지만 그는 바로 이 믿음 위에 굳건히 서서 버텨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 딜레마가 지금 그가 빠져 있는 영혼의 고뇌와 고통의 본질입니다.     


신의 섭리로서의 싸인, 혹은 빅 픽처

   그렇다면 역시 초점을 신의 섭리에 맞추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신의 뜻인가?’

   영화가 중간중간 그의 아내가 당한 불의의 교통사고 현장을 플래시백으로 삽입하여 보여주는 것도 결국은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그래함 헤스가 미스터리 서클과 외계인의 침입이라는 사태를 아내의 죽음이라는 사태와 끊임없이 연결하여 생각해보고 있음을 암시하는 장치이기도 합니다.

   옳습니다. 지금도 그는 끊임없이 신의 섭리를 찾고 있는 것입니다.

   영화의 끝부분에서 우리는 모든 상황의 앞뒤가 톱니바퀴처럼 거의 수학적으로 척척 맞아떨어져 가는 광경을 매우 ‘미스터리한 느낌’으로 목도하게 됩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하나하나 해석하게 되지요.

   아들이 천식 환자인 것은 폐가 막혀 외계인의 독가스를 흡입하지 못함으로써 죽지 않게 하려는 배려였고, 동생(호아킨 피닉스)이 힘만 센 마이너리그 야구선수였다가 은퇴한 것은 그 엄청난 방망이 휘두르는 솜씨로 아들을 사냥하려는 외계인을 때려눕히기 위한 사전 준비였습니다. 죽던 순간 아내가 남편한테 남긴, 방망이를 휘두르라고 하던 그 뜬금없는 한마디조차도 이 위기 상황에서 야구선수 출신인 동생이, 아주 적절하게, 강력한 힘으로 방망이를 휘두름으로써 외계인을 때려 눕혀 아들을 구하도록 하려는 사전 포석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모든 것이 오래전부터 바로 이 순간을 위하여 하나하나 치밀한 ‘플랜’ 하에 예비되고 있었던 것이지요.

   마침내 그는 신의 섭리, 그 미스터리한 빅 픽처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신앙을 회복합니다.

   물론 이런 식의 해석은 어쩌면 도식적인 것으로 폄하될 여지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삶이란 그 다양하고 복잡한 국면들의 인과관계를 명확히 파악하고 나면 본질적으로 도식적인 것이 아닐까요.

   신의 경륜으로 보면 인간의 삶이 도식적인 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태일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그 관계망을 총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삶의 복잡함을 단순히 불가해하다고, 또는 불가사의하다고 치부하고, 거대한 신의 섭리를 소견 좁게 오해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어쨌거나 결국 이 영화에서 ‘미스터리 서클’은 그 아내의 죽음과 더불어 이 전직 성직자 사내를 겨냥한 신의 ‘싸인(Signs)’, 곧 ‘빅 픽처’의 한 구성요소라고 규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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