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정수 May 12. 2024

2.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마라

  - 닉 카사베츠, 〈존 큐〉

2.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마라 - 닉 카사베츠, 〈존 큐〉(2002)

아버지의 마음

   자식을 향한 모정(母情), 곧 어머니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모를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한마디로 그것은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일 것입니다. 너무도 선연하지요. 그래서 우리는 그 의미를 숫제 즉물적으로 느낄 수조차 있습니다. 이쯤 되면 거의 절대적 명제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입니다. 잊어버리려야 잊어버릴 도리가 없지요.

   하지만 자식을 향한 부정(父情), 곧 아버지의 마음에 대해서라면 사정은 퍽 다릅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마음에 대해서는 그 성격을 딱 부러지게 한마디로 표현할 재간이 없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떤 식으로든 표현된 사례 자체를 찾기가 힘드니까요. 심지어 ‘부정’은 국어사전에도 실려 있지 않은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부정’은 단어 취급도 못 받고 있는 신세인 것입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애초 ‘어머니날’이었던 것을 ‘어버이날’로 고쳐 부른다거나, 어머니 노래에서 ‘어머니’를 ‘어버이’로 고쳐 부르는 식의 편법을 동원할 정도의 형편이니까 참 멋쩍고 딱하고 민망한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군색한 체면치레를 할 바에야 차라리 미국에서처럼 ‘아버지날(6월 세 번째 일요일)’을 따로 제정하는 게 어떨까, 싶기까지 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는 어떨까요?     


아들을 죽이려는 아버지

   잘 알려져 있다시피, 구약성경의 창세기 22장은 아들을 제 손으로 죽여야 하는 아버지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불러 이렇게 이르십니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내게 바쳐라.”

   정확한 성경의 표현은 이렇습니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2절).’

   번제(燔祭)는, ‘구울 번(燔)’자로도 미루어 알 수 있듯, 짐승을 통째로 구워서 희생물로 바치는 제사입니다.

   한마디로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 아닙니까. 세상에, 아비더러 제 아들을 죽여서 그 시체를 통째 구워 희생물로 바치는 제사를 올리라는 것 아닙니까. 몰인정 정도가 아니지요. 잔인하다 못해 엽기적인 처사입니다.

   다음 대목이 더 문제입니다. 성경의 묘사는, 아니 성경이 묘사하고 있는 아브라함의 태도는 하도 건조하고 무심하여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입니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3절).’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저를 사로잡는 의문은 ‘도대체 하나님께서는 어쩌자고 이런 명령을 내리시는 걸까?’가 아니라, ‘이 사람, 정말 이삭의 아버지 맞아?’입니다.

   평범한 보통의 아버지라면 마땅히 품었음직한 마음, 곧 하나님에 대한 의문 섞인 항의나 반발, 그리고 충격과 배신감, 또 아들에 대한 연민이나 눈물 따위 지극히 당연한 여러 가지 인간적인 감정에 대한 묘사를 성경은 깡그리 생략하고 있습니다.

   뿐입니까. 아버지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그야말로 무슨 짐승 잡듯이 칼로 숨통을 끊으려 하는 대목에 이르면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은 감정이라고는 없는 무슨 로봇이나 인조인간만 같아서 끔찍하기까지 합니다. 몸서리치지 않을 수 없는 장면입니다.

   물론 이 대목이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아브라함의 높은 믿음을 설명하려는 목적에 이바지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그래도 그 순간 아버지로서 아브라함의 마음이 정확히 어떠한 것인지를, 적어도 성경의 묘사만을 바탕으로 해서는, 도무지 알 길이 없다는 것만은 부정하기 힘든 사실입니다.

   부정(父情), 곧 자식을 향한 그 아버지의 마음에 대해서는, 유감스럽지만, 성경조차도 겨우 이런 지경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 대목은 우리에게 언제나 감동적이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의 복종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섭리 때문입니다.

   위기일발의 결정적인 순간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아브라함한테 이렇게 이릅니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마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을 대신하여 번제로 쓸 수컷 양 한 마리를 이미 따로 준비해 두셨던 것입니다.

   여기까지 이르는 동안 벌써 어지간히 식겁했던 우리는 이 대목에서 비로소 속으로 ‘그러면 그렇지!’ 하고 무릎을 치며, 기다렸다는 듯 일시에 밀려오는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립니다.

   이 영화 〈존 큐〉는 바로 그 자식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 곧 부정(父情)을 처음부터 일관되게 겨냥하고 있습니다. 감독은 이를 위해 이야기를 철저히 아버지 편에서 풀어나갑니다.

   심지어, 구약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이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 구조를, 거의 그대로 고스란히 빌려오기까지 합니다. 여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준비된 양

   영화가 시작하면 카메라는 타이틀 자막이 떠오르는 동안 왕복 2차선의 도로를 위험천만한 속도로 유유히 맹렬하게 질주해 가는 흰색 자동차 한 대를 보여줍니다.

   아니나 다를까, 한 젊은 20대 여성이 운전하던 이 자동차는 앞차를 추월하고자 중앙선 침범을 거듭하더니, 급기야는 거대한 트럭과 여지없이 충돌하고 맙니다.

   여기서 우리는 배경음악으로 종교적 성격의 장엄한 합창(‘아베마리아’)이 흐른다는 점과 카메라가 차 안의 후면경에 매달려 있는 십자가 목걸이를 분명하게 클로즈업으로 보여준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더불어 그 순간 예의 젊은 여성이 지어 보이고 있는 이상하리만큼 평화로운 낯빛도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요소지요.

   하지만 이 대목이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영화 중반부까지 끈기 있게 기다려야 합니다.

   요컨대, 그 젊은 여성은 ‘준비된’ 양인 것입니다.

   그 여성이 한갓 도구나 수단으로 쓰이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야기 속에서 그 여성이 맡은 역할이 그렇게 해석된다는 의미입니다.     


아들을 살리려는 아버지

   이어 영화는 은행 빚을 갚지 못해 자동차를 압류당할 만큼 경제적으로 어려운 궁지에 몰려 있는 한 흑인 노동자 가족을 보여줍니다.

   이 가족의 가장인 사내 존 퀸시 아치볼드(덴젤 워싱턴, ‘존 큐’의 ‘큐(Q)’는 퀸시(Quincy)의 머릿글자입니다)는 제철소에서 파트 타임 근무를 하는 임시직 종사자고, 그의 아내 데니스(킴벌리 엘리스)는 슈퍼마켓 점원입니다. 이 부부 사이에 열 살 난 아들 마이크(다니엘 E. 스미스)가 있습니다.

   영화는 머뭇거리지 않고 이 단출한 가족이 하루아침에 뜻하지 않은 불행의 구렁텅이로 곤두박질하는 딱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또래들과 야구 시합을 하고 있던 아들이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진 것입니다.

   그렇게 아무런 전조도 보이지 않은 채 한순간 느닷없이 쓰러진 아들을 안아 들고 허겁지겁 병원 응급실로 달려간 아버지 존 큐는 나중에 검사 결과를 듣는 자리에서 병원 측으로부터 충격적인 소리를 듣습니다.

   아들의 병명은 ‘심방중격결손증’이었습니다. 심장의 좌심방과 우심방 사이의 벽에 결손, 곧 구멍이 생겨 혈류가 새는 병으로, 당장 이식수술을 받지 않으면 안 되는 치명적인 상태였던 것이지요.

   문제는 총 25만 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수술비는 고사하고, 아들을 이식 대기자 명단에 올려놓는 데에만 필요한 보증금 7만5천 달러조차도 이 가난한 아버지에게는 도저히 조달할 가망이 없는 거액이라는 점이었습니다.(여기서 미국의 의료보험 체계에 대한 논의는 또 다른 지면이 필요한 사안입니다.)

   게다가 병원의 원무과장은 존 큐를 향해 이렇게 충고합니다. 조사해 본 결과 존 큐 가족의 재정 상태와 의료보험으로는 아들의 치료비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게 좋을 듯하다고요.

   야속하고도 잔인한 소리지만, 사실은 사실입니다. 이걸 어찌 부정하겠습니까. 존 큐도 잘 압니다.

   하지만 심장만 이식받으면 살 수 있는 아들의 죽음을 속수무책으로 앉아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아버지의 절박한 심정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또 살릴 수만 있다면 아 아버지가 못 할 일이 세상에 뭐가 있겠습니까.

   당연히, 아버지 존 큐는 그 7만5천 달러(25만 달러가 아닙니다!)를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기 시작합니다.


궁지에 몰린 아버지의 선택

   영화는 이제 이 아버지가 가재도구를 팔고, 기부금을 구하고, 방송국에 도움을 요청하는 따위 다양한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하여 ‘수술비가 아닌 보증금을’ 구하러 동분서주하는 모습을, 그리고 마침내는 당연히(!) 구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영화는 이제 그가 최후의 수단으로 아들을 담당하고 있는 심장전문의를 협박하여 응급실을 점거하는 대목으로 넘어갑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여느 인질극과는 성질이 매우 다릅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비로소 이 영화가 구약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 구조를 그대로 빌려왔다는 명확한 암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존 큐가 은행을 털거나, 강도 행각을 벌이거나 하지 않고 응급실 점거를 선택한 것도 이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설정입니다.

   범인이 도저히 들어주기 힘든 요구조건을 내걸고 경찰과 대치하며 벌이는 일촉즉발의 인질극은 영화에서 흔히 만나볼 수 있는 설정입니다. 존 큐도 졸지에 그런 종류의 인질범의 처지가 되어 경찰과 대치합니다.

   이때 문득 맨 첫 장면이 다시 등장합니다.

   이번에 카메라는 사망한 앞서의 그 젊은 여성 운전자가 손목에 차고 있던 팔찌를 보여줍니다. 여기서 그것이 본인 사망 시 자기 장기를 기증하겠다는 서약의 증표임을 알아차리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동시에 우리는 이 여성의 심장이 결국 존 큐의 아들을 살리게 되리라는 것까지도 벌써 헤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이 영화를 굳이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와 동일시해야만 할 근거가 있을까요? 물론 있습니다.     


어머니의 선언, 나는 크리스천입니다

   이 영화가 단순히 창세기 22장으로부터 이야기 구조만을 빌려온 것은 아닙니다. 주제마저도 빌려왔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가 언뜻 보아 대수롭지 않은 듯 묘사되는 두 개의 장면을 통하여 정작은 존 큐 가족이 독실한 크리스천임을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아들 마이크가 야구 시합 도중 쓰러진 날 오전, 존 큐 가족이 주일 예배에 참석하여 찬송가 411장 ‘예수 사랑하심은’을 정성껏 부르는 장면이고, 또 하나는 인질극을 벌이는 남편의 약점을 잡아낼 목적으로 투입된 전문 협상가 프랭크(로버트 듀발)가 원무과장과 더불어, 아들의 병실을 지키고 있던 존 큐의 아내 데니스를 찾아왔을 때 그 아내의 입 밖으로 창졸간에 튀어나온 대사입니다.

   존 큐의 아내 데니스는 냉정한 원무과장한테 눈물로 야속한 원망의 감정을 드러내며 욕설을 퍼부으려다 말고, 슬픔과 분노의 감정이 뒤섞인 비장한 어조로 이렇게 씹어 뱉듯이 선언하며 돌아섭니다.

   “But I’m a christian woman!”

   이 대사가 자막에는 종교성을 도드라지지 않도록 처리하려는 의도에서였는지, 그냥 “내가 참고 말지”라고 의역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 ‘내가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신한테 욕설을 퍼붓고 싶지만, 나는 크리스천이기 때문에 참는 것’이라는 취지를 명확히 살려서 번역해야 관객에게 그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요컨대 그들은 가난한 노동자 가족이면서 동시에 독실한 기독교인들이었던 것입니다.     


희생할 결심

   아브라함과 이삭 이야기를 염두에 둔다면 영화의 나머지는 뻔합니다. 그래서 감독이 집중적으로 부각하는 것은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아들을 살릴 심장이 신의 섭리대로 미리부터 준비되어 있는 상황을 전혀 모르는 아버지 존 큐는 마침내 자살을 감행하려 합니다. 그가 은행을 털지 않고 응급실을 점거한 이유가 밝혀지는 대목입니다.

   그는 인질극이 대개 어떤 식으로 끝난다는 것을 모를 정도로 우매한 사람은 아닙니다. 일종의 빅 픽처라고 해야 할까요. 그는 마지막 순간을 처음부터 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야흐로 존 큐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 아들 담당의 심장전문의를 시켜 자기 심장을 아들한테 이식해 주려는 것입니다. 자식을 살리고자 스스로 자신을 희생하려는 부정(父情)이 극한치에 이르는 순간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 혼몽한 의식 상태로 병상에 누워 있는 아들 곁에서 이 아버지가 유언처럼 당부하는 속삭임의 말이 눈물겹습니다.

   “엄마 말씀 잘 들어야 한다. 엄마는 네 최고의 친구야. 여자 친구는 공주처럼 잘 대해주거라. 무엇이든 하겠다고 결심했으면 꼭 실천하거라. 자기가 한 말에는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 담배는 절대 안 된다. 남들은 항상 친절히 대접하고, 누가 너를 믿어준다면 그 사람에게는 끝까지 신의를 지켜라. 못된 짓은 멀리하거라. 세상에는 좋은 일들도 많단다. 나는 언제나 네 곁에 있을 거다. 사랑한다.”

   경찰과 대치한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내가 아들을 묻는 게 아니라, 아들이 나를 묻어야 한다!”라고 눈물로 절규하는 이 아버지의 간절한 소망을 신이 과연 눈 감고 귀 닫아 끝내 저버리실 까닭이 있을까요.     


아버지의 마음으로

   이 영화가 그저 감동적인 부정(父情)을 그려내는 데 급급하여 결말을 완전한 해피엔딩으로 만들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입니다. 만일 그랬다면 이 영화는 정말 허황한 이야기가 되어버렸을지도 모르니까요.

   존 큐는 재판을 받고 당연히 일부 유죄판결을 받습니다. 어쨌거나 그는 분명히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가 호송차에 실려 떠나는 마지막 장면 위로 살며시 떠올랐다 사라지는, ‘for sasha’라는 짧은 자막 하나입니다.

   사샤는 이 영화의 감독 닉 카사베츠의 열네 살 난 딸의 이름이고, 그 아이는 이 영화가 만들어지던 당시 영화 속 존 큐의 아들처럼 심장이식수술을 받아야만 하는 중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죽어가는 자식을 향한 이 안타까운 아버지의 마음이 영화의 기본 바탕이 되어 있는 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감독이 시종일관 이 이야기를 아버지의 마음으로 풀어나가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로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로써 우리는 감독이 이 영화를 구약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저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 구조를 그대로 빌려옴으로써 아브라함의 경우처럼 죽어야만 하는 자식이 신의 섭리로 되살아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이 영화를 만들었음을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새삼 헤아려 보건대, 영문을 모르는 어린 아들의 깨끗하고 맑은 눈망울 앞에서 기어이 날카로운 칼을 집어 들던 순간의 아버지 아브라함도 실은 이런 마음이 아니었을까요.

   그러니, 이 영화의 진정한 의미는 필경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새겨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

이전 01화 1. 기사가 아닌 순례자의 여정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