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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수 Jun 16. 2024

7. 신이 그들을 세상 속으로 내보내신 까닭은?

  - 촐탄 슈피란델리, 〈신과 함께 가라〉(2002)

7. 신이 그들을 세상 속으로 내보내신 까닭은? - 촐탄 슈피란델리, 〈신과 함께 가라〉(2002)

자유를 얻고 난 뒤의 기독교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어머니 헬레나의 영향과 개인적인 신비 체험을 계기로 선포했다는 저 A.D. 313년의 ‘밀라노 칙령’은 흔히 기독교인들이 신앙의 자유를 얻어 기독교가 장차 세계를 제패하는 데 긍정적인 기여를 한 조치로 이해되곤 하지요.

   그러나 실은 꼭 그렇게만 볼 것은 아닙니다. 이는 익히 알려진 사실이기도 하지요.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무엇보다도 기독교 공인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존의 4인 공동 통치제를 종식하고 유일 황제 체제를 구축하고자 벌인 여러 차례의 내전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한 뒤, 사분오열된 민심을 수습할 목적으로 여러 종교에 대한 신앙의 자유를 허용한, 일종의 정치적 결단이기도 하였습니다.

   요컨대, ‘밀라노 칙령’은 기독교에만 국한된 특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와 그 밖의 종교들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고자 시행했던 여러 가지 정책이나 통치술을 미루어 보면 금세 알 수 있는 사정입니다.

   그러니까 그가 신앙인이기 이전에 정치가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곤란하다는 뜻입니다. 정치의 맥락을 제거해 버리고 당시의 사태를 마주하면 그 본질, 그 정체의 절반밖에는 볼 수 없을 테니까요.

   문제는, 그렇게 전격적으로 공인된 이후 기독교가 총체적인 영적 안일에 빠져들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수도원의 탄생

   핍박이 사라지니 부패가 시작되었습니다.

   수많은 순교와 박해의 난관을 뚫고 천신만고 끝에 겨우 신앙의 자유를 얻었는데, 도대체 이게 웬일입니까. 설마, 감격의 출애굽을 함으로써 그 오랜 노예 생활에서 벗어나 마침내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자유를 얻은 이스라엘 민족이 기다렸다는 듯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우상 숭배를 시작했던 그 고약한 전철을 다시 밟으려는 것입니까?

   이 얻음과 잃음의 대차대조표가 참 엄정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에너지 보존 법칙’의 원리가 어김없이 적용되고 관철되는 국면이라고 하면 지나친 과장일까요? 하긴 이 법칙 자체마저도 본디는 신의 섭리에 속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바로 그 시기에 이처럼 속수무책인 전락(轉落)의 국면을 기독교 신앙의 순수성을 회복함으로써 극복해 보려는 시도의 일환으로 생겨난 것이 바로 ‘수도원’이었습니다. 따라서 수도사들이 청빈과 순명과 정결을 모토로 삼은 것은 당연한 일 아니었을까요.

   그러니 어쩌면 이 수도원이야말로 뒷날에 있을 종교개혁의 원형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수도원의 정체성이나 그 역사적 기원, 또는 그 성립의 맥락에 대한 검토 따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장 자크 아노의 〈장미의 이름〉(1989)에서처럼 수도원 내부 공간을 이야기의 무대로 설정해 놓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수도원 밖으로, 세상 속으로

   영화는 독일 어느 외딴 지방의 한 쇠락해 가는 수도원이 처한 딱한 형편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게다가 이 수도원은 늙은 원장 한 사람에 젊은 수도사 세 사람이 그 구성원의 전부입니다. 이 정도만으로도 이 수도원의 사정이 어떠하리라는 것이 환히 들여다보이는 형국 아닙니까.

   무엇보다도 이 젊은 수도사들이 문제입니다.

   한눈에도 그들은 수도원이라는 보호막, 그 안전한 온실 속에서 자라는 화초 같은 존재들임이 뚜렷합니다. 언제 문을 닫아도 이상해 보이지 않는 영락한 수도원이 지금까지 그들에게는 안전한 보호막이었을 만큼 그들은 한마디로 위태롭고 연약하기 짝이 없는 ‘마지막 잎새’ 같은 몰골입니다. 그야말로 세상 물정 모르는 철없는 샌님들이지요.

   한데, 영화는 그런 그들을 미적거리지 않고 바로 수도원 밖으로, 곧 세상 속으로 내보내는 것으로 본론을 시작합니다. 아니, 그들은 거의 쫓겨나는 느낌입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수도원 원장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세 명의 수도사는 자신들의 정신적인 지주이자 지도자인 보호자를 하루아침에 잃어버린 것입니다. 졸지에 어버이를 잃고 고아가 된 어린아이와 같은 불쌍한 신세가 된 것이지요. 물론 원장은 유언을 남겼습니다. 수도원을 떠나라고요.

   한데, 이 유언은 조금 이상합니다.

   대개 원장이 세상을 떠나 그 자리가 공석이 되면, 새로운 원장이 파견되어 와 수도원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 상례 아니겠습니까. 한데, 원장은 남은 세 수도사들에게 떠나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이는 아예 수도원의 문을 닫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유언을 감안할 때 아마도 이 수도원은 그 운영 주체인 모(母) 교단이 더는 이 수도원을 유지할 여력도 의지도 없는 형편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게다가 이 수도원이 소속되어 있는 교단은 매우 소수의 희귀 교단인 듯합니다.

   이 수도원이 문을 닫음으로써 이제 세상에 ‘유일하게’ 남은 같은 교단 소속의 이탈리아 수도원에 의탁하라는 것이 원장의 유언이었으니까요.

   동시에 이는 원장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그 세 명의 수도사한테 새로운 보금자리를 구해준 셈이기도 합니다. 살길의 제시지요. 얼마나 고마운 배려입니까.

   당연합니다. 원장은 누구보다도 그들을 잘 아는 보호자로서, 또 어버이로서 그들이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처럼 걱정스러웠을 테니까요. 원장은 마지막 순간까지 보호자로서 제 할 도리를 다한 것입니다.

   이제 셋밖에 남지 않은 그들에게 선택의 여지가 달리 있을 턱이 없습니다.

   속절없이 그들은 ‘교리 규범집’을 들고 원장의 뜻을 좇아 정든 수도원을 뒤로하고 길을 떠납니다. 수도원 밖으로, 곧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함께하여 주소서

   하지만 이 세 수도사는 틀림없이 몹시 당황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궁금했을 것입니다. 신이 자신들에게 왜 이런 시련을 주시는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왜 하필 지금, 이런 식으로? 당연히 그렇지 않았겠습니까. 어쩌면 이것은 그들이 난생처음 겪게 되는 시련일 테니까요.

   이 느닷없는 여정이 영화의 몸통입니다. 여기서부터는 영락없는 로드무비입니다.

   동시에 이는 어디까지나 ‘신과 함께’ 가는 여정입니다. 수도사들의 여정에 신이 동행하지 않는다는 사태는 아무래도 상상하기 어렵지요. 떠나기에 앞서 그들이 신께 자신들과 함께해 주십사, 기도하지 않았을 턱이 없으니까요. 이는 원장의 마지막 기도 제목이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원장이 그 최후의 순간 신 말고 누구에게 그들을 맡길 수 있겠습니까. ‘신과 함께 가라’라는 명령형 제목이 가슴을 칩니다.

   따라서 이 영화가 겨냥하는 과녁은 그들이 이 여정을 통하여 갑자기 자신들에게 시련을 주신 신의 뜻, 그 섭리에 대한 어떤 깨달음에 도달하는가, 하는 것일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물론, 이뿐이라면 그리 새삼스럽지는 않습니다.

   특별히 반(反) 기독교적인 메시지를 담으려는 의도가 아닌 한, 그들이 ‘어찌 되었든’ 우여곡절 끝에 목적지인 이탈리아의 수도원에 도착하는 것으로 영화가 마무리되리라는 예측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 내용입니다. 이게 독특합니다.     


세 가지 시험, 세 가지 유혹

   이제부터 영화는 세 수도사가 각기 다른 성격의 유혹들(!)에 차례로 노출되는 상황을 보여줍니다. 마치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에 차례로 시험을 당하셨던 예수님처럼 그들은 각자 자신만의 시험을 겪게 됩니다.

   신께 평생을 바치기로 서약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을 법한 전형적인 시험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시험들은 어쩌면 그들을 위하여 신이 마련한 커리큘럼일 것입니다. 수도사가 셋이니, 시험도 셋입니다.

   하나는, 육친에 대한 애정입니다.

   또 하나는, 학문과 관련된 명예욕입니다.

   마지막 하나는, 이성애입니다.

   따지고 보면, 이 세 가지 모두가 청빈과 순명, 그리고 정결의 모토에 어긋나는 방해 요소들입니다. 영화가 묘사해 보여주는 그들 각각의 성정에 비추어 볼 때 이 세 가지 시험은 그야말로 맞춤형입니다.     


흑역사 커리큘럼

   하지만 영화는 그들이 시험을 당당히 이겨내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거꾸로 영화는 졸지에 세상 속에 내던져진 그 ‘순진한’ 수도사들이 그 느닷없는, 또는 신의 뜻으로 예비된 시험들에 모두 한 차례씩 굴복하고 마는 연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데 주력합니다.

   당연합니다. 적어도 ‘아직은’ 그들에게 시험을 이길 힘이 있을 턱이 없으니까요.

   마치 그들은 시험을 당하기 위해서 수도원을 나선 게 아닌가 싶은 정도입니다.

   물론, 그들은 끝내 다시 본연의 자리에 돌아와 섭니다.

   시험은 훈련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니까요. 그러니까 일종의 연단(鍊鍛)입니다.

   곧, 시험의 목적은 그 시험을 겪는 사람의 파멸이 아닌 것입니다. 피시험자가 그 유혹을 넘어서서 한 단계 더 높은 믿음의 자리로 올라서도록 돕기 위한 신의 ‘계획’이지요. 이 과정 자체가 섭리입니다.

   따라서 뜻하지 않은 시험의 유혹을 거친, 그러니까 후줄근히 ‘당한’ 그들은 이미 예전의 그들이 아닙니다.

   물론 표면적으로야 그 시험이 그들에게는 장차 숨기고 싶은 흑역사일 수 있겠지요. 하지만 인간이 흑역사를 통하여 성숙해진다는 것 또한 진리 아니겠습니까.

   물론 예수님께서는 광야의 시험을 당당히 이겨내셨지만, 어쨌거나 그런 시험의 과정을 거치고 나신 뒤에야 마침내 십자가를 지시는 길로 나아가신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고 어른이 되다

   문득, 진작에 그들을 위한 사려 깊은 원장의 기도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이쯤에서입니다. 그들에게 적절한 시험을 주시어서 낯선 수도원에 가서도 그들이 주눅 들지 않고 잘 적응하여 더욱 성숙한 수도사로 거듭날 수 있도록 도와주십사, 하는 기도 말입니다. 너무나 마땅한 기도입니다.

   어디에서나 그렇듯이, 오래도록 익숙해진 곳을 떠나 낯설고 새로운 환경에 놓이게 된 사람은 그곳 토박이들의 텃새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심신의 어려움을 겪게 마련 아니겠습니까.

   그걸 이겨낼 힘은 대개 적절한 시험과 시련을 거치는 과정에서 생기는 법이지요. 마치 근육이 단단해지는 것이 운동을 통한 고통스러운 근 자체의 파열 과정을 거치면서인 것처럼요. 땅도 비가 온 뒤에야 더욱 단단히 굳어지는 법 아닙니까.

   그들에 대한 이런 원장의 걱정 근심을 신이 모를 턱이 있겠습니까.

   따라서 어쩌면 수도사로서 그들의 진정한 삶은 바야흐로 이제부터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이제 더는 ‘순진하지’ 않거든요. 신의 섭리에 따라 일련의 시험을 겪는 과정을 통하여 그들은, 성경 말씀대로, 드디어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고’ 어른이 된 것입니다.

   흔히 신약성경 고린도전서 13장을 그 4절에서 7절까지에 나오는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라는 유명한 말씀 탓에 일명 ‘사랑장’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지만, 실은 이어지는 11절의 말씀이 제게는 개인적으로 더 인상적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이 말씀은 미국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싱클레어 루이스의 기독교 풍자 소설 《엘머 갠트리》를 원작으로 하여, 리처드 브룩스 감독이 남녀 주인공 역에 버트 랭커스터와 진 시몬즈를 캐스팅하여 만들었던 동명의 영화 〈엘머 갠트리〉(1960)의 마지막 장면에서 버트 랭커스터가 냉소적인 뉘앙스의 대사로 읊었던 유명한 말씀이기도 하지요.

   모르긴 몰라도, 낯선 수도원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하는 그 세 수도사에게 이 시험, 이 흑역사의 경험은 분명 귀한 자산이 될 것입니다.

   바로 이 성장이 ‘신과 함께’한 여정, 그 섭리의 결과 아니겠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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