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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수 Jun 30. 2024

9. 악을 피하려는 거대한 기획 혹은 망상

  - M. 나이트 샤말란, 〈빌리지〉(2004)

9. 악을 피하려는 거대한 기획 혹은 망상 – M. 나이트 샤말란, 〈빌리지〉(2004)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신약성경 고린도전서 13장의 말씀처럼 사랑은 믿음보다도 소망보다도 더 윗길이니, 그 사랑을 위해서라면, 그 사랑만으로 충만한 세상을 위해서라면, 아니, 세상을 그 사랑만으로 충만케 하기 위해서라면 진실은 얼마든지 은폐하거나 호도해도 괜찮은 것일까요. 더욱이 통제라는 수단을 동원해서 말입니다.

   과감하게 요약 규정하자면, 〈빌리지〉는 일단의 사람들이 통제라는 수단으로 사랑만이 충만한 사회를 이루고 유지하려는 거대한 기획 혹은 망상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선과 악의 대립과 균형

   주지하다시피 세상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무수한 대립 개념(물)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소리와 침묵, 냉기와 온기, 바다와 육지, 여자와 남자, 음과 양……. 이들은 모두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하여 이 대립 개념(물)들은 자신의 존재 의의를 상대에게 빚지고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상대가 없다면 나도 없지요.

   선과 악의 관계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둘은 언제나 ‘대립’이라는 기반 위에서 ‘균형’을 이룹니다. 혹은 이루어야 한다고 말해야 할까요. 어쨌거나 세상은 이 균형 위에 성립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서로 대립 관계를 이루는 쌍방 가운데 어느 한쪽이 균형을 무너뜨릴 만큼 지나치게 우세할 경우, 그 균형에 기반한 세상이 혼란에 빠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 것입니다.

   인간이 ‘필요악(必要惡)’이라는 고약한 개념을 도입한 것도 따지고 보면 결국 이 탓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도대체 악이라는 것이 왜 ‘필요’하겠습니까.

   선의 의의(意義)가 악을 통해서야만 비로소 보증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불쾌하고 불편하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똑같이, 악의 악스러움을 확증해 주는 것 또한 바로 선입니다. 선이 서슬 푸르게 살아 있지 않으면 악의 악스러움은 당장에 모호해집니다. 선과 악의 경계가 흐려지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윤리적인 무감각이 생겨납니다. 이 무감각을 흔히 ‘타락(墮落)’이라고 하지요?

   하지만 아무리 세상이 ‘균형’의 원리에 기반을 두고 운행되고 있다 하더라도, 균형의 쌍방 가운데 어느 한쪽이 지나치게 우세하여 균형을 깨트리는 사태가 벌어질 때 그 ‘어느 한쪽’이 악이기보다는 선이기를 바라는 것이 인지상정 아닐까요. 선의 우세로 말미암은 혼란이라면 우리는 얼마든지 감수할 용의가 있습니다.

   따라서 문제는 악이 우세할 경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도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천재지변과 같은 단순한 재난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이고 확실한 악 혹은 악의(惡意)가 참담하고 처참한 비극의 원인이 되었을 때, 이 악의의 대상이 된 당사자의 가슴 속에서 세상에 대한 신뢰가 한 순간에 균형을 잃고 무너지는 것을 누가 감히 막을 수 있겠습니까.     


악의에 상처 입은 사람들의 공동체

   여기, 바로 그러한 악의에 사랑하는 가족과 혈육을 졸지에 희생당하여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참담한 경험을 한 상처 입은 사람들의 비밀스럽고 독립된 공동체, 그리고 그들의 삶이 있습니다.

   이 공동체는 그들이 세상의 악의로부터 스스로를 철저하게 유폐시킴으로써 오로지 사랑만으로 충만한 작고 완벽한 사회를 건설하여 자손만대 이어가고자 하는 거대한 기획의 일환입니다.

   그만큼 세상의 악에 대한 그들의 환멸과 절망이 깊었던 것이지요.

   여기까지는 수긍할 수 있습니다. 누구라도 그런 무자비하고 불가해한 악의에 노출된 적이 있다면, 그 원수 같은 세상에 어찌 한시인들 더 머무르고 싶겠습니까.

   따라서 상징적인 차원에서 그들의 유폐는 일종의 자살로 규정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그들만의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택한 수단이 엄격한 통제라는 점입니다.

   영화는 이 통제가 두 가지 차원의 것임을 보여줍니다.     


공간의 통제와 심리의 통제

   하나는, 공간 차원의 통제입니다.

   그들 삶의 터전은 아주 외딴 곳에 자리 잡은 일정한 넓이의 땅입니다. 친절하게도 영화는 자막으로 그곳이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의 어느 곳임을 명시해 줍니다.

   그 땅 주변은 두터운 숲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 땅과 숲이 만나는 지점은 자연스레 두 지역을 나누는 경계가 되어 있고요. 그들 삶의 터전은 그 숲이라는 띠를 방패막이 삼아 세상과 격리되어 있는 셈입니다.

   또 하나는, 심리 차원의 통제입니다.

   인간은 신체의 구속을 견디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이는 신체의 구속이 범죄자에게 가하는 형벌의 가장 주요한 형태의 하나로 굳건히 정착해 있는 것으로만 미루어 보아도 알 수 있는 문제지요.

   감옥에서 탈출하는 과정이 소재인 영화가 주는 감동의 깊이는 신체 구속의 답답함과 고통의 크기에 비례합니다.

   흔히 관객은 그 탈출의 주체가 단지 탈출의 주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의 죄의 유무 여부와는 무관하게 그에게 감정이입이 되어 그 탈출에 마음으로 동조하게 됩니다.

   가까이는 프랭크 다라본트의 〈쇼생크 탈출〉(1995)이 그러했지만,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탈출의 주체로 나왔던 저 돈 시겔의 〈알카트라스 탈출〉(1979) 또한 그 탈출의 주체가 되는 인물이 정말로 죄인인지 아닌지의 여부는 관객에게 명확히 알려주지 않은 채로 시종일관 탈출 과정 자체에만 강박적이고 미니멀리즘적으로 집중했지요.     


거짓말을 수단으로 한 통제

   신체의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고 싶은 욕망은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인간의 강렬한 본능일 것입니다. 그러니 숲이라는 허술하기 짝이 없는 장벽으로 완벽한 통제를 기대하기는, 당연히 어렵지 않을까요.

   그들이 ‘거짓말’이라는 부차적인 수단을 동원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허위라고 해도, 사기라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이 거짓말에 따르면, 그들의 터전을 둘러싸고 있는 숲속에는 무시무시한 괴물이 살고 있습니다. 그들의 진짜 목적은 그 괴물에 대한 공포의 조장입니다. 따라서 실질적인 장벽은 숲이 아니라 공포라고 해야 맞습니다.

   이쯤 되면, 허위나 사기를 넘어서 차라리 협박이지요.

   더욱이 이 거짓말은 그들이 숲을 침범하지 않아야 숲의 괴물도 그들의 터전을 침범하지 않는다는 일종의 신사협정 비슷한 상호협약의 수준으로까지 세련되게 다듬어놓은 것입니다. 여기에 괴물하고 관련하여 붉은색을 금기로 설정한 디테일에, 핼러윈 이벤트를 연상시키는 괴물 퍼포먼스까지 곁들입니다.

   이렇듯 두 가지 차원의 통제를 통하여 그들은 그들 공동체의 기원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하는 그들의 2세들을 세뇌함으로써 그들 공동체의 항구적인 유지를 기도하고 있는 셈입니다.

   아니,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 자신은 물론 그들의 후손들까지도 세상의 악으로부터 지켜낼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것이 그들 공동체의 정체요, 그들 기획의 진면목입니다.

   하지만 이 정체가 전모를 드러내는 것은 종반부에 이르러서입니다.

   이 영화의 감독이 영화사적으로 충격 반전의 묘미를 새삼 일깨워준 〈식스 센스〉의 M. 나이트 샤말란이라는 사실이 중요해지는 것은 이 대목에서입니다.     


재검토를 위한 반전

   그러나 샤말란 감독 영화의 반전이 지닌 진정한 묘미는 이야기 전체에 대한 재검토를 강력히 종용하는 데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반전이 얼마나 충격적인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빌리지〉도 그렇습니다.

   마침내 전모를 드러낸 그들 공동체와 기획의 정체에 근거하여 전체 이야기를 재검토했을 때 비로소 확연해지는 의미가 핵심이지요.

   여기서 우리는 그들 기획에 대한 마음의 동조 여부와는 무관하게 두 가지 문제점과 속절없이 맞닥뜨립니다.

   하나는, 그들의 기획이 진실의 은폐에 기반하고 있는 한 언젠가는 실패하리라는 점이고, 또 하나는, 악은 선과 함께 인간 본성의 양면을 이루는 관계이므로 인위적인 방식으로는 결코 근절할 수 없으리라는 점입니다.

   여기에 막강한 자본력이라는 변수가 더해지지만, 당연히 자본도 영원한 것은 못 됩니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그들의 기획은 분명 일종의 망상입니다. 그런데도 그 망상이 한심하기보다는 애처로운 것은 선으로 악을 이기기보다는 차라리 피하고 싶은 마음이 우리에게도 틀림없이 있는 탓 아닐까요. 아무리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것이 신의 말씀이요 명령이요 독려라도 말입니다.


충분히 고민하고 선택하라

   선과 악의 관계, 그리고 그 선과 악 자체와 관련한 인간의 본성을 이렇게 설정해 놓으신 것이 신의 섭리라면, 아마도 신은 인간이 선과 악 사이에서 고민을 충분히 제대로 하기를 바라셨던 게 아닐까요. 그러니까 신은 악뿐만이 아니라, 선도 인간이 충분한 고민 없이 섣부르게 선택하기를 바라지 않으셨던 게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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