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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수 Jun 23. 2024

8. 죄수가 아닌 소녀들의 탈출기

  - 피터 뮬란, 〈막달레나 시스터즈〉(2002)

8. 죄수가 아닌 소녀들의 탈출기 – 피터 뮬란, 〈막달레나 시스터즈〉(2002)

탈출의 욕망

   이 영화는 ‘수난기(受難記)’이자 동시에 ‘탈출기(脫出記)’입니다.

   하지만 이 탈출의 주체는 죄수(罪囚)가 아니라 소녀들이고, 탈출의 장소는 감옥이 아니라 수녀원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는 그 수녀원이 감옥과 같은 곳이며, 소녀들은 거기에서 죄수와 같은 대접을 받고 살았다는 뜻이 됩니다. 탈출의 욕망 또는 소망을 자극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탈출의 욕망이나 소망은 죄수만의 전유물이 아닐 것입니다.

   어떤 폐쇄 공간에 갇혀 신체의 자유를 압류당한 모든 인간은 본능적으로 탈출의 욕망과 소망에 시달리게 되어 있는 법 아니겠습니까. 하물며 거기에서 죄수와 같은 대접을 받았다면 더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이때 본인들 스스로 자신의 죄인 됨을 얼마나 깊이 인식하고 있는가 하는 점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죄인이라는 인식과 갇혀서 자유를 잃은 상태의 괴로움은 서로 별개의 사태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스스로 죄인이라고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 한들 갇힌 상태가 행복할 까닭은 없을 테니까요. 죄인이기에 스스로 묵묵히 견딜 수는 있겠지만요.

   설사 그들이 그곳에 수용되는 것을 자발적으로 선택했다고 할지라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자유에 대한 갈망은 그만큼 맹목적이고 무서운 것 아닐까요.     


중세가 아닌 1960년대

   이쯤에서 역사적 지식에 근거한 우리네 상식의 감각이 발동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입니다. 이 감각은 영화 속 시대 배경을 당연히 ‘중세’쯤으로 짐작하게 합니다.

   하지만 어처구니없게도 이 영화에 나오는 수녀원은 20세기, 그것도 1960년대 아일랜드에 실재했던 가톨릭 계통의 여성 수용 시설입니다.

   그곳에 ‘갇힌’ 10대 소녀들의 수난과 탈출의 이야기가 이 영화의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문제의 소녀들이 어떤 연유로 그 수녀원에 수용되었는가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감옥이란?

   ‘감옥(監獄)’의 일반적인 의미는 ‘죄인을 감금해 놓는 곳’입니다. 문제는 그 감금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왜 죄인을 가두어 놓아야 하는가?

   죄인을 가둔다는 것은 그럼으로써 죄인을 죄인이 아닌 사람들한테서 떨어뜨려 놓는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당연히 이는 죄인이 아닌 사람들을 위한 조치일 것입니다. 이것이 격리의 명분일 테지요.

   여기에서 권력과 이성의 결탁을 읽어낸 사람은 미셸 푸코입니다. 그 성과인 《광기의 역사》에서 푸코는 이 격리의 성격이 얼마나 문제적인가를 밝히고자 다음과 같은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을 인용합니다.

   ‘제 이웃을 감금한다고 인간이 스스로의 건전성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감옥의 기원은 고대의 이집트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지요.

   하지만 사형과 강제노동을 포함한 체벌이 형벌의 주요 형태였던 근세까지 감옥은 단지 형벌을 시행할 때까지 죄인을 달아나지 못하도록 잡아두는 구실을 하는 장소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물건으로 치면 일종의 보관이지요. 감금 자체가 형벌은 아니었던 셈입니다.

   곧, 감금이 대한민국 행형법 제1조의 내용처럼 ‘죄인을 격리 수용하여 교화하는 것’이 목적인 명실상부한 형벌의 지위를 얻은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입니다.

   어쨌거나 소녀들이 갇혔다면, 그것은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는 뜻이 됩니다.     


수녀원이냐, 감옥이냐?

   하지만 수녀원은 감옥이 아닙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런데도 영화 속에서 문제의 수녀원은 분명히 감옥과 같은 구실을 합니다. 소녀들은 영락없는 죄인 취급을 받고요.

   외출 금지는 물론이고, 하루 종일 강제노역에 시달리는 것으로도 모자라 시도 때도 없이 수녀들한테 잔혹하게 폭행당합니다. 게다가 섬뜩하게도 그 폭행들은 모두 신앙의 이름으로 자행됩니다.

   그래도 소녀들은 이렇다 하게 항변조차 할 길이 없습니다. 중세도 아닌 1960년대의 아일랜드에서 벌어진 일이라고는 도대체가 믿기지 않는 일입니다.

   그렇듯 수녀원에서 소녀들이 수난을 당하는 정경은 흡사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의 수용소에 갇힌 유대인들을 연상시킬 정도입니다.

   소녀들이 과연 그런 대접을 받아 마땅한 극악무도한 죄를 저질렀는가가 궁금해지는 것은 이 대목에서입니다.     


버려진 소녀들

   소녀들은 감옥이 아니라 수녀원에, 그것도 제 부모들의 손에 이끌려, 수용되었다기보다는 차라리 위탁된 신세입니다. 아니, 버려진 것이지요.

   극한 수난을 견디다 못해 수녀원에서 탈출하여 따뜻한 가족의 품을 찾아 집으로 돌아갔던 한 소녀는 오히려 아버지의 손에 다시 수녀원으로 끌려와 냉혹하고 가차 없이 버려집니다.

   가족한테서조차 버림받은 아이들이 갈 데가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니 도대체 소녀들은 어떤 죄를 저지른 것일까요.

   여기서 이 영화의 또 하나의 주제가 드러납니다. 어쩌면 이쪽이 더 중요한 주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죄는 오로지 ‘여자이기에’ 의미를 얻는 죄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이상(李箱)의 시 〈오감도〉를 흉내 내어 표현해 보면 이렇게 됩니다.     


   제1의 소녀는 결혼도 하지 않은 몸으로 출산을 하였다는 이유로 수녀원에 보내졌다고 그리오.

   제2의 소녀는 특별히 예쁜 외모를 이용하여 거리에서 외간 남자들과 숙덕거렸다는 이유로 수녀원에 보내졌다고 그리오.

   제3의 소녀는 사촌 오빠한테 강간당한 사실을 발설하여 집안 망신을 시켰다는 이유로 수녀원에 보내졌다고 그리오.

   ……


   이 목록은 제13의 소녀까지 일사천리로 읊어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덧붙이면 끝입니다.     


   그들은 모두 무섭다고 그리오.   


   아닌 게 아니라, 소녀들은 하나같이 공포에 질려 있습니다. 이 공포는 인생에 대한 절망조차도 사치라고 느껴질 만큼 극심한 것입니다. 소녀들은 절망조차 마음껏 누리지 못합니다.     


용감한 소녀들

   하지만 다시 한번 강조하건대, 이 영화는 엄연히 ‘탈출기’입니다. 감히 탈출을 실행에 옮기는 용감한 소녀들이 주인공인 것이지요.

   그들을 주인공으로 선택했다는 점에서 비로소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의 의도가 드러납니다. 이 영화의 진정한 주제는 바로 여기에 관련되어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용감한 두 소녀는 그야말로 용감하게 탈출을 시도합니다.

   하지만 이 탈출에서 빛나는 것은 치밀하고 용의주도한 계획과 계산이라기보다는 과감함과 용기입니다.

   일단 용감하게 탈출을 감행하니, 그 두 소녀 앞에는 바깥세상이 거짓말처럼 활짝 열립니다.

   그 탈출 과정의 긴장감과 박진감은 할리우드 전쟁 영화들에서 익히 보던 것으로, 거의 나치 수용소에서 탈출하는 연합군 포로들의 그것을 연상시킬 정도입니다.

   영화의 마지막, 이제 직업도 얻고, 나름대로 독립의 근거를 마련한 한 소녀가 단정하게 꾸민 머리채를 지나가던 수녀들 앞에서 반항적으로 마구 흐트러뜨려 보이는 장면의 카타르시스는 대단합니다.     


신의 섭리가 지시하는 방향

   종교란 인간의 진정한 해방을 지향하는 것일진대, 아이로니컬하게도 인간은 바로 그 종교의 이름으로 인간을 억압합니다. 해방의 원리가 그토록 쉽사리 억압의 원리로 둔갑한다는 것은 단순히 유감의 차원을 넘어 공포스럽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역사는 그런 억압의 방식으로는 결코 인간을 교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준엄하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언제나 인간을 억압함으로써 바로잡을 수 있다고 믿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가장 쉬운 방법이라고 느껴지는 탓이지요. 실은 가장 쉽게 느껴진다는 바로 이 점이 함정일 터인데도 말입니다.

   이는 고스란히 가부장제의 함정이기도 합니다. 푸코는 정확하게 분석했던 셈입니다. 가부장제는 여성을 억압함으로써 스스로를 영원토록 유지할 수 있다고 착각한 것입니다. 이 착각이 얼마나 끈질긴 것인지, 문제의 수녀원은 21세기를 목전에 둔 1996년에 와서야 비로소 폐쇄되었습니다.

   그래도 이 어렵고 긴 과정을 통하여 우리는 신의 섭리가 우리에게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을 지시하는지 넉넉히 미루어 헤아릴 수 있지 않을까요.

   예수님의 수난을 극사실주의적으로 그린 잔혹극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2004, 멜 깁슨)를 지지했던 로마 교황청은 2002년도 베니스 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인 이 영화에 대해서는 가톨릭을 왜곡했다는 이유로 비난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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