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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수 Jun 09. 2024

6. 위대한 유산, 구원의 현장

  - 샘 멘데스, 〈로드 투 퍼디션〉

6. 위대한 유산, 구원의 현장 - 샘 멘데스, 〈로드 투 퍼디션〉(2002)

최상의 부자 관계

   이 영화는 아들이 아버지를 회상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처음부터 대놓고 ‘어떤’ 부자(父子)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다며 선언하고 들어가는 셈이지요. 적어도 겉으로는 분명히 그렇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영화는 시종일관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저 부자지간의 이야기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가장 모범적인 부자 관계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입니다. 이렇게 단정할 수 있는 근거는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아들 예수님의 ‘순종’이 어떤 성격의 것인가, 하는 데 놓여 있습니다.

   흔히 예정된 십자가 사건을 앞에 두고 예수님께서 홀로 피땀을 흘리시며, 이 잔을 그냥 지나가게 해주십사, 하고 간절히 기도하시던 모습이나, 십자가에 못박히신 채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고 고통스럽게 절규하시던 모습을 예수님의 인성이 발현된, 혹은 인간적인 고뇌가 표현된 극적인 사례들로 꼽곤 하지요.

   그러나 이는 결국 아들로서 아버지를 향한 마땅한 고뇌의 표현에 지나지 않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는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해야 하는 아들의 고뇌인 셈입니다. 예수님의 신성(神性)이나 그에 대한 신뢰가 이런 인성(人性)의 측면에서 더욱 강화된다는 것은 부정하기 힘듭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것이 아들로서 예수님의 성격이 지닌 어떤 순도(純度)를 보증하는 근거이기도 하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고뇌의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면 예수님의 순종은 어쩌면 허황한 한바탕의 해프닝으로 평가절하되었을지도 모르지요.

   요컨대 이는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명령이 순종할 만한, 또는 순종해야만 하는 것이라는, 어떤 당위성을 보증해 주는 구실을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아버지의 명령이 옳았다는 사실이 이로써 확증되는 셈이지요.

   여기서 예수님의 고뇌는 하나의 엄연한 검증 절차의 지위를 얻습니다.

   그러니까 아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명령이, 단지 그것이 아버지의 명령이니까 아들로서 무조건 따른다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옳기에, 또 옳다는 것을 그 고뇌의 검증 과정을 통하여 분명히 인식하셨기에 마침내 순종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고뇌의 과정을 허락하셨다는 사실이 참 소중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최상의 부자 관계라는 것은 바로 여기에 근거한 견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로드 투 퍼디션〉은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를 하면서 정작은 다름 아닌 이 ‘순종’이라는 주제를 탐구하는 영화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최악의 부자 관계

   영화에 국한할 경우, 제가 알고 있는 최악의 부자 관계는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대부〉(1972)에 나오는 아버지 비토 콜레오네(말론 브란도)와 그의 막내아들 마이클 콜레오네(알 파치노)의 관계입니다.

   오해가 없어야 합니다. 〈대부〉 3부작은 마피아를 미화한 영화가 아닙니다.

   적이 보낸 킬러의 손에 하나뿐인 금지옥엽(金枝玉葉) 같은 딸을 잃은 대부 마이클 콜레오네가 아무도 없는 곳에서 홀로 쓸쓸히 최후를 맞이하는 제3편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려 보십시오.

   설사 앞의 두 작품에서 명배우 알 파치노의 매력과 카리스마에 휘둘려 도덕적인 부패와 죄의식의 냄새를 짐짓 외면하는 데 성공했다 할지라도 우리는 끝내 복수와 살인과 음모와 비리의 종착역이 어디인가를 확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영화의 주제를 자본주의 미국의 부패한 성장사와 가부장 이데올로기에 대한 준엄한 비판으로 새기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것도 표면적인 주제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대부〉 1편의 후반부에는 극 전개상 마땅한 설정이면서도 아주 기이한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반대파가 보낸 하수인의 총에 맞아 쓰러진 뒤 상당한 시일 동안 사경을 헤매다 간신히 살아난 제1대 대부 비토 콜레오네(말론 브란도)가 후계자로서 조직 운영의 전권을 맡은 막내아들 마이클(알 파치노)한테 마피아 대부로서 갖추어야 할 처세 원칙에 대해 조언을 해주는 장면이 바로 그것입니다. ‘친구를 가까이하되 적은 더 가까이하라’라는 명언이 나왔던 바로 그 장면 말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조언의 내용이 아니라, 그 조언이라는 행위 자체입니다. 지금 아버지는 자기 자리를 막내아들한테 물려주면서 장차 그 자리를 온전히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서사(敍事)의 흐름에서 이 장면은 매우 자연스럽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조금만 냉정하게 뜯어보면 이것이 얼마나 이상한 장면인지를 금세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물려주는 행위 자체와 물려주려는 것, 곧 유산의 정체에 대한 성찰이 이 대목에는 깡그리 생략되어 있는 까닭에 그렇습니다.

   영화 속의 그 누구도 아들이 아버지의 자리를 물려받는 행위의 의미에 대해서, 그리고 그 유산의 정체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서 스스로 의심하지도 않고, 누군가에게 의문을 제기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대부〉 3부작의 기본적인 주제와 관련시킨다면, 이 유산 상속의 성격은 너무도 자명합니다.

   곧, 이 영화는 이야기 구조 전체를 통하여 바로 이 행위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이 아들의 인생행로 자체를 고스란히 영혼의 파멸 과정에 대응시킴으로써 영화는 우리에게 이 비판이 얼마나 준엄한 것인지를 가르쳐줍니다.

   아버지의 자리를 그저 물려받기만 한 아들은 오로지 조직의 안위를 위하여 1편에서는 매제(妹弟)를 살해하고, 2편에서는 친형님을 살해하고, 3편에서는 딸을 잃고 폐인의 몰골이 되어 고독한 최후를 맞습니다. 아들을 이 지경으로 파멸시킨 것은 결국 아버지입니다.

   그 옛날, 이 막내아들한테 마피아 조직의 대부로서 이행해야 할 책무를 가르치던 순간 아버지는 악마의 자리에 있었던 셈입니다. 그러니까 마이클은 바로 악마한테 순종한 셈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순종과는 너무도 다르지요. 이보다 더 고약한 부자 관계를 저는 달리 알지 못합니다.     


최악의 관계를 최상으로 회복하기

   〈로드 투 퍼디션〉도 마피아 패밀리에 속한 한 아버지와 그의 어린 맏아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의 시공간적 배경은 금주법과 알 카포네로 유명한 1930년대의 미국인데, 바로 그다음 시기인 4, 50년대의 미국을 배경으로 한 〈대부〉와 이 영화는 여러 면에서 다르다는 것이 제 판단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결정적인 것은 아버지 마이클 설리번(톰 행크스)이 아들 마이클 설리번 주니어(타일러 리 헤클린. 이 사람은 최근에 미드인 〈슈퍼맨 & 로이스〉시리즈에서 슈퍼맨으로 나왔던 바로 그 배우입니다)한테 마피아 조직원이라는 자신의 정체를 비밀로 하고 있다는 설정입니다.

   그러니까 이 아버지는 처음부터 아들이 자신과 같은 존재가 되기를 원치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조직범죄를 자기 어린 아들의 장래 직업으로 소망하는 정신 나간 아버지가 세상천지 어디에 있겠습니까.

   분명히 그는 마피아 조직원으로서 주로 살인이라는 방법을 써서 문제를 처리하는 일종의 해결사 노릇을 하는 흉악한 인물인데도 평소의 그는 더없이 점잖고 권위적인 아버지의 풍모를 갖추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충실한 신앙생활을 하는, 혹은 그러한 자기 모습을 가족한테 보여주려 애쓰는 인물로 영화 속에 묘사되고 있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어떤 상황이 닥쳐왔을 때 어김없이 예배당을 찾아가 기도합니다. 이 기도의 내용이 그 아들의 장래와 관련이 있으리라는 짐작은 이제 터무니없는 것이 아닙니다.

   이 아버지는 아들이 자신의 자리를 결코 물려받아서는 안 된다는 점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쯤 되면 이것은 거의 신념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세상의 모든 아들은 아버지를 거역하게 마련입니다. 아버지의 어떠함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라기보다는 단지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거역하게 되는 것이지요. 아니, 바로 아들이기에 아버지의 어떠함을 용인하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부자 관계에서 이 대립은 거의 운명적입니다. 이 영화에서도 마찬가지요.

   그런데도 이 대립과 거역의 과정을 통해서조차 아들이 필경은 아버지를 닮고 만다는 것은 그야말로 인생의 아이러니입니다. 그래서 이 ‘아버지 닮기’가 끝내 아버지에 대한 순종으로 귀결되는 것은 어쩌면 필연적인 현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는 전통적인 테마(마틴 스콜세지의 2003년 작 〈갱스 오브 뉴욕〉이 바로 이런 테마를 다룬 영화였지요)가 아직도 계속 효력을 발휘하는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게다가 이 영화는 아들이 어쩌다 그만 아버지가 살인하는 장면을 엿봄으로써 그 아버지의 정체를 알게 된다는 뚜렷한 계기마저 설정해 놓고 있습니다. 당연히,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배신감은 몹시 짙고 깊습니다. 이제 아버지와 아들은 순식간에 최악의 관계로 치닫습니다.

   게다가 이 사건이 빌미가 되어 그들 일가족은 범죄 사실이 탄로 날 것을 두려워한 조직의 손에 몰살당할 위기로까지 내몰립니다. 영화의 몸통은 나머지 가족(아내와 둘째 아들)을 모두 잃고 단둘만이 살아남은 이 부자의 복수와 도피 과정에 고스란히 할애됩니다.

   물론 이 과정을 통하여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를 깊이 이해하게 된다는 설정은 아무래도 상투적인 느낌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이 이해가 〈대부〉에서처럼, 위험에 빠진 아버지를 보호하려는 본능적인 감정에 굴복한 아들이 아버지의 어두운 면까지 포함한 모든 것을 받아들이게 된다는 식의, 사뭇 일방적인 이해(理解)나 수용(受容)과는 성격이 매우 다르다는 점은 역시 독특합니다.

   이 이해와 수용의 끝에서 아들은 아버지의 자리를 물려받지 않기로 합니다. 이 점과 관련하여 영화의 마지막 대목은 꼼꼼하게 뜯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버지의 위대한 유산, 그 구원의 현장

   가족을 죽인 자들에 대한 복수를 끝낸 뒤 아들을 데리고 새 정착지에 도착한 아버지는 바닷가의 집 안에서 홀로 아들이 뛰노는 창밖 풍경을 고즈넉이 내다보다가 예기치 못하게 그만 조직이 보낸 킬러한테 총을 맞고 쓰러집니다.

   이때, 죽었거나 막 죽어가는 자들의 사진을 찍는 게 취미이자 또 다른 직업이기도 한 이 해괴하고도 엽기적인 킬러는 쓰러져 고통스럽게 버둥거리는 아버지를 향해 기다렸다는 듯이 카메라 렌즈를 들이댑니다.

   순간, 마침 뒤에서 나타난 아들이 킬러가 카메라를 잡느라 한쪽에 잠시 내려놓은 총을 몰래 집어 들고 그것으로 킬러를 겨냥합니다.

   수상한 낌새를 느끼고 돌아선 킬러는 자신을 겨냥한 총구를 보고서도 전혀 당황하지 않습니다. 외려 아주 여유롭고 노회한 표정으로 이 어린 아들한테 손을 내밀며 그 총을 자기한테 달라고 말합니다.

   그걸 보고 죽어가던 아버지는 아들을 향해 안간힘을 다하여 고개를 젓습니다. 이것이 이 영화 전체를 통틀어 가장 핵심이 되는 장면입니다.

   이제 기묘한 착각, 또는 오해가 일어납니다.

   물론 관객으로서는 아버지의 이 행위가 지금 아들이 총을 쏘지 못하도록 하려는, 곧 살인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하려는 뜻임을 알아차리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제정신이라면 세상에 어떤 아버지가 아들한테 사람을 죽이라고 시킬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정작 아들이 이 행위를 킬러한테 총을 건네주지 말고 쏘라는 뜻으로 새겨들었다는 사실은 나중에 밝혀집니다.

   아들은 망설이던 끝에 결국 방아쇠를 당기지 못하고 맙니다. 오히려 킬러 쪽이 아버지가 마지막 힘을 그러모아 쏜 총에 맞고 쓰러지지요. 아들은 죽어가는 아버지한테 다가가 차마 쏠 수 없었노라고 눈물로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들은 조금 전 아버지가 자신을 향해 고개를 저은 것을 킬러한테 순순히 총을 내주지 말고 그를 쏘라는 뜻으로 알아들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아들은 아버지의 뜻대로 총을 쏘지 못했습니다. 자기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았던 것이지요. 아버지는 그게 너무너무 다행스럽지 않았을까요. 모르긴 몰라도, 그 순간 아버지는 마음속으로 진심 어린 감사 기도를 드렸을 것입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그 무엇도 아닌 아들의 영혼이었던 것입니다.

   마침내 아버지는 따뜻하고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오히려 아들한테 미안하다는 한마디를 남기고는 살며시 눈을 감습니다. 이것이 참 평화로운 죽음이었으리라는 것은, 십자가 위의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다 이루었다!”라고 하시며 눈을 감으셨던 것처럼, 그가 자신이 늘 기도하던 가장 중요한 소망이 이루어졌음을 확인한 다음에야 맞이한 최후이기 때문에 매우 타당한 추측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어지는 장면은 이 아들이 아버지의 진정한 뜻을 깨닫고, 그러니까 그 뜻이 옳다는 것을 인식하고, 마침내 거기에 순종하기로 결심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아버지에 대한 복수 따위, 마음 쓰지 않기로 한 것이지요.

   아들은 도피 중인 그들 부자한테 도움을 베풀어 주었던 시골 농부의 집에 자신을 의탁하여 그 뒤로 두 번 다시 ‘총을 잡지 않고’ 살았다며 담담히 고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요. 앞서 언급했듯이, 이 영화는 뒷날 이 아들이 아버지를 회상하는 내용입니다.

   천신만고 끝에 최악이 될 뻔한 부자 관계가 최상의 부자 관계로 거듭난 셈입니다. 한 생명, 한 영혼의 구원입니다. 이것이 그 아버지의 진정한 뜻이었습니다.

   이로써 아들은, 아들의 영혼은 파멸의 나락으로 굴러떨어질 운명에서 구원된 것입니다. 아버지의 유산은 이 순간 ‘위대한’ 유산이 되었습니다. 이는 그 아버지가 늘 기도로 간절히 소망하던 일이었을 것입니다. 한 영혼을 구원하려는 신의 섭리, 그것이 구현되는 또 하나의 현장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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