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59. 최적의 납량특집 독서 체험

- 히가시노 게이고, 《가공범》

by 김정수

B59. 최적의 납량특집 독서 체험 / 《가공범》 -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 김선영 옮김 / 북다

글이 쉽게 읽히는 정도를 가리키는 ‘가독성(可讀性)’이라는 용어가 있지요?

그러니까 어떤 책을 가리켜 가독성이 좋다거나 가독성이 높다고 말한다면 그 책은 내용이 어렵지 않으면서도 재미있고, 또 문장이 유려해서 잘 읽힌다는 뜻이 되겠지요.

어쩌면 책이 지녀야 할 덕목들 가운데서 가독성이 가장 중요한 덕목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잘 읽히지 않는 책을 읽는 것은 재미없는 영화를 보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이 아닐까 싶거든요.

이 가독성의 챔피언을 뽑으라면 저는 단연 히가시노 게이고를 첫손가락에 꼽겠습니다.

그의 소설들은 한번 읽기 시작하면 나도 모르는 새 어느 순간부터 가속도가 붙어서 조금이라도 더 오래 즐기기 위해서는 어느 지점에서든 짐짓 독서를 중단해야 할 정도입니다.

예컨대, 같은 추리소설 또는 미스터리소설이라도 그 결이 매우 다른 미야베 미유키의 경우는 적어도 가독성이라는 기준에서는 히가시노 게이고보다 한 걸음 정도 뒤에 놓인다는 것이 제 생각이요 느낌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도 가독성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만한 작가지만, 기본적으로 결이 많이 다르지요.

무엇보다도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을 읽는 것은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과 매우 흡사한 체험이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의 소설이 시각적인 성격이 강하여 영상으로 옮기기에 매우 적합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극장에서 자기 자리에 꼼짝하지 않고 앉아 러닝 타임 내내 스트레이트로 죽 재미있는 영화 한 편을 정신없이 집중해서 보는 것처럼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은 한번 시작하면 멈추지 않고 내리읽게 된다는 뜻입니다.

스마트폰으로 영화를 볼 때처럼 언제든지 중단했다가 다시 볼 수 있는 경우와는 그 성격이 사뭇 다른 체험인 것이지요.

물론 이는 기본적으로 가독성의 덕분입니다.

하지만 가독성만이라면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이 그렇게까지 매력적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제가 꼽고 싶은 그의 매력적인 장점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그의 소설이 휴머니즘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조금 과장해서 인간 존중의 정신이라고 하면 될까요.

추리소설 특유의, 저 사건의 진상을 캐어 들어가는 치밀하고 논리적인 과정이 빚어내는 지적 쾌감에 바로 이 휴머니즘이 결합되어 있다는 점이 저는 귀합니다.

그 덕에 그의 소설이 천박하거나 잔인하거나 기괴하거나 엽기적이거나 지리멸렬한 수준으로까지 그 격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또 하나는 그가 ‘주제넘게’ 문학적인 야심을 섣불리 드러내는, 또는 넘보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추리소설 또는 미스터리소설 전문작가답게 그는 자신의 소설들이 겨냥하고 있는 독자 대중의 범주를 함부로 바꾸거나 터무니없이 넓히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물론 《편지》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과 같은 살짝 예외적인 느낌이 나는 작품들도 있기는 하지만, ‘주제넘은’ 차원으로까지 나아간 것은 아니라고 저는 평가합니다.

지난 몇 해 동안 그의 소설이 학점으로 치면 B+ 정도에 머무는 느낌이어서 다소 아쉬웠는데, 이 《가공범》은 그의 작가 데뷔 40주년을 기념할 만한, A0나 A+를 받기에 손색이 없는 작품이어서 매우 다행스럽고 반갑다는 것이 제 독후감입니다.

당연히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이 서사의 기본 줄기이고, 그 살인이 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가 밝혀지면서 그에 종횡으로 얽힌 인물들의 다양한 사정(事情)들이 드러나는 구조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이 소설도 기존의 작품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더불어 제목이 어째서 ‘가공범(架空犯)’인지, 그 의미를 마지막 순간 명료하게 알려준다는 점도 마찬가지지요.

하지만 히가시노 게이고 소설에서 이런 기본적인 ‘낯익은’ 특징들은 약점이 아니라 장점의 구실을 한다는 것도 그만의 신기한 특장이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매우 익숙한데도 전혀 따분하지 않으니까요.

마법 같은 장점입니다.

예, 지금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가공하리만큼 무더운 이 여름을 잠시라도 견디기 위한, 아니, 잊기 위한 ‘납량특집’으로서 최적의 독서 체험이 아닐까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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