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08. 가을, 벗을 찾아가는 이의 마음

- 정도전, 〈방김거사야거〉_6

by 김정수

H08. 가을, 벗을 찾아가는 이의 마음 / 鄭道傳(정도전), 〈訪金居士野居(방김거사야거)〉_6

이 시의 전문과 1차 번역문을 모아보면 이렇습니다.


秋陰漠漠四山空(추음막막사산공) / 가을의 그늘은 아득하고 온 산은 비어 있다

落葉無聲滿地紅(낙엽무성만지홍) / 소리 없이 떨어진 잎들은 땅에 가득히 붉다

立馬溪橋問歸路(입마계교문귀로) / 말을 시내의 다리께에 세우고 가는 길을 묻다

不知身在畵圖中(부지신재화도중) / 나 자신이 그림 속에 있음을 알지 못하다


여기서 짝수 구인 둘째 구와 넷째 구의 마지막 글자는 비슷한 발음의 ‘홍(紅)’, ‘중(中)’으로 운자(韻字)가 되겠습니다. 다만, 이 시의 경우는 첫째 구의 마지막 글자도 ‘공(空)’으로 운을 맞추었네요. 이런 경우를 가리켜 ‘首句入韻(수구입운)’이라고 합니다.

그저 한시(漢詩)―근체시(近體詩)―의 기본 규칙이라 여기고 가볍게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이렇듯 딱 맞는 운자를 찾아내어 해당 시 고유의 내적 정서와 논리 구조에 절묘하게 맞도록 한 편의 시를 써내는 일이 어디 쉽겠습니까. 놀랄 때가 많습니다. 아니, 때마다 감탄합니다.

이제 번역문을 다듬어볼까요.

한시(漢詩)에서는 대개 두 개의 구가 하나의 문장 단위를 이루기 때문에 앞의 두 구와 뒤의 두 구를 각기 서로 잇는 느낌으로 번역하겠습니다.

먼저, 첫째 구, 곧 기구(起句)로, ‘가을의 그늘은 아득하고(그윽하고) 온 산은 비어 있다’입니다.

우선 저는 여기서 ‘아득하고’를 손보고 싶습니다.

흔히들 ‘漠漠(막막)’을 ‘아득하다’라고 번역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아득하다’는 ‘멀다’의 느낌으로 먼저 다가오는 형용사입니다. 그래서 저는 어감을 조금 더 또렷하게, 또 정서적으로 조금 더 풍부한 느낌이 나도록 하기 위해서 ‘그윽하다’로 바꾸겠습니다.

그럼 ‘가을 그늘 그윽하고 온 산은 비었는데’ 정도가 되겠네요.

다음은 둘째 구, 곧 승구(承句)로, ‘소리 없이 떨어진 잎들은 땅에 가득히 붉다’입니다.

이 구는 토씨 정도만 다듬으면 될 것 같네요.

그럼 ‘소리 없이 떨어진 잎만 땅 가득 붉구나’ 정도로 할 수 있겠습니다.

다음은 셋째 구, 곧 전구(轉句)로, ‘말을 시내의 다리께에 세우고 가는 길을 묻다’입니다.

이 구는 ‘시내 다리께에 말 세우고 가는 길 묻자니’ 정도로 하겠습니다.

어딘가 조금 더 슬림해진 느낌이지요?

마지막으로 넷째 구, 곧 결구(結句)는 ‘나 자신이 그림 속에 있음을 알지 못하다’입니다.

이 구는 ‘알지 못했네, 나 자신 그림 속에 있는 줄을’ 정도로 하고 싶네요.

시인의 감정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간 느낌이지요?

이제 다 모아볼까요.


가을 그늘 그윽하고 온 산은 비었는데

소리 없이 떨어진 잎만 땅 가득 붉구나

시내 다리께에 말 세우고 가는 길 묻자니

알지 못했네, 나 자신 그림 속에 있는 줄을


역자에 따라서 첫째 구와 셋째 구의 마지막에는 쉼표를, 둘째 구와 넷째 구 마지막에는 마침표를 찍는 경우가 많지만, 저는 우리 현대시에서 쉼표나 마침표를 대체로 잘 안 쓰는 경향인 것을 감안하여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제목은 ‘김거사의 시골집을 방문하다’인데, 이 시는 화자가 김거사의 시골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끝났네요. 애초에는 화자에게 주요 여행 목적이었을 방문이 스스로 가을 풍경 속에 시나브로 젖어들다 보니 어느새 중요하지 않은 일이 되어버린 형국입니다.

그렇다면 제목도 다음과 같이 바꾸어보는 게 어떨까 싶네요.

김거사네 시골집 찾아가던 길에’라고요.

한결 낫지요?

시적인 느낌이 조금 더 진하게 나도록 시 전체를 다듬어보고 싶은 욕심도 있지만, 번역이라는 것이 어차피 완벽할 수는 없으니, 뒷날을 기약하고 이쯤에서 마무리하겠습니다.

참 아름다운 시입니다.

무엇보다도 시상(詩想)을 일으키고, 이어받고, 바꾸고, 마무리 짓는 ‘기승전결(起承轉結)’의 구조에 기초한 시상의 전개가 기막히게 절묘합니다.

우리는 이 시를 읽는 동안 화자가 벗의 집을 찾아간다는 애초의 목적마저도 화자 자신과 함께 문득 잊어버릴 정도입니다. 동시에 스산하면서도 그림 같이 아름다운 가을이라는 계절 특유의 저 진하면서도 싱그러운 감흥에 속절없이 빠져듭니다.

솔직히 저는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화가의 한 사람인 클로드 모네의 그림 〈아르장퇴유의 가을〉(1873)보다 이 시가 가을의 정경과 정서를 훨씬 더 아름답고 진하게 표현해내었다고 느낍니다.

예서 설명이, 아니, 말(言)이 더 필요할까요?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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