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Cinema Aphorism_202

- 나만의 영화 잡설(雜說)_202

by 김정수

CA1006.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두 교황〉(2019)

“자비는 다이너마이트 같아서 담을 폭파시킵니다.” “교회가 더 이상 이 세상의 일부가 아닌 것 같습니다.” 변화(change)냐 타협(copromise)이냐. 추기경은 변화한 것이라고 말하고, 교황은 타협한 것이라고 말한다. 변화는 곧 타협이라는 것. 이건 마치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대립과도 같은 느낌이다. 그 어느 쪽도 잘못이라고 규정할 수는 없다. 전통을 강고하게 지키려 하면 할수록 진정으로 중요한 것을 무시하게 될 가능성도 덩달아 높아진다. 이 과정에서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멀어진다. 교회의 존재 이유와 가치에 대한 성찰의 필요성. “죄악은 상처지 얼룩이 아닙니다. 치료받고 아물어야 합니다.” 교리가 신념이 되는 순간.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혼밥’을 하는 교황과 추기경. 반복되는 파격은 더는 파격이 아니다. 가장 힘든 일이 주님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라는 교황의 고백.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 확신이 오래 지속되면 의심이 된다. 그래서 교황의 말대로 ‘영적인 보청기’가 필요한 것일까. 회의나 의심이 거듭되다 마침내 확신이 되는 것과 확신이 거듭되다 마침내 의심이나 회의가 되는 것. 어느 쪽이 더 종교적일까. 작은 즐거움이 중요하다. 기도하는 동안 담배 피우는 것은 안 되지만, 담배 피우는 동안 기도하는 것은 된다. 농담 외우기도 훈련 과정이라면, 유머가 있다는 것은 많은 유머의 사례를 기억하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또는 기억하기 위한 노력이 선행되었다는 뜻일 터이다. 교황이 자기답게 살려고 하면 사람들이 싫어하고, 추기경이 자기답게 살면 사람들이 좋아한다. 이 퍼스낼리티의 차이. 독일, 아르헨티나, 그리고 로마, 바티칸. 장벽을 세우지 말고, 다리를 놓아라. BUILD BRIDGES NOT WALLS. 우리는 우리 자신이 신이 아니라 인간임을 직시해야 한다. “인생은 정적(靜的)이지 않다.” 따라서 변화도 타협도 결국은 불가피하다. 그것이 어떤 변화, 어떤 타협인지가 중요할 따름이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또는 죄에 대해서 눈감았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목소리가 더는 들려오지 않기 때문에, 주님의 목소리를 더는 들을 수 없기 때문에 사임한다는 교황의 고백, 그 눈물겨운 진정성. 누군가가 자기 어깨에 얹힌 짐을 내려놓으면, 누군가는 그 짐을 짊어져야 한다. 짐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겨가거나, 저쪽에서 이쪽으로 옮겨올 뿐이다. 짐의 속성은 ‘이동’이다. 탱고와 피아노. 그리고 월드컵.


CA1007. 박훈정, 〈낙원의 밤〉(2021)

죽음을 제외하고 그 나머지 모든 것을 잃고 홀로 남은 남과 여. 그들은 서로에게 살아가는 의미 또는 동기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어쩌면? 하지만 그들에게는 어느 쪽으로든 ‘계산해야 할 것’이 있었다. 또는 생겼다. 그가 그 한 번의 사적 복수를 완벽하게 수행했더라면 뭐가 달라졌을까. 어째서 그는 그 목표 인물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놓지 못했던 걸까. 이것은 단순한 실수일까, 풀지 못할 미스터리일까, 거역할 수 없는 그만의 운명일까. 문제는 이 영화의 주제가 복수가 아니라 ‘계산’이라는 것. 복수는 개인의 의지로 그만두거나 멈출 수 있지만, 계산은 아무도 그만둘 수도, 멈출 수도 없다. 이 테마를 다루었다는 것이 이 영화의 새로운 점이다.


CA1008. 존 크래신스키, 〈콰이어트 플레이스〉(2018)

영화가 시각 장애를 다룰 때와 청각 장애를 다룰 때의 차이. 또는 빛(깔)이 아니라 소리를 다루는 방법. 그토록이나 청각에 예민한 ‘그것들’은 어째서 음악을 포함하여 온갖 소음이 가득 찬 지구라는 행성으로 쳐들어온 것일까. 우주 전체를 통틀어 가장 많은 ‘소리(音)’를 만들어내는 종족인 인류가 사는 곳으로. 침묵이 인간에게 끼치는 해악과 소리가 그것들에 끼치는 해악, 둘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치명적일까. 소리가 금기가 되어버린 세상에서 청각장애인이 갖는 유리(有利)에 대한 지극히 즉물적인 고찰의 낯섦 또는 새로움.


CA1009. 존 크래신스키, 〈콰이어트 플레이스 2〉(2021)

이제 더는 아버지가 없는 그 가족에게 어째서 새로이 아버지 격의 다른 사내(킬리언 머피) 캐릭터를 덧붙인 것일까. 왜 굳이 그래야만 했던 것일까. ‘그것들’의 존재 자체에 대한 탐구 또는 탐사가 더 깊이 나아가지 않은 것은 무엇을 노린 설정일까. 근치(根治)가 아닌 대증요법(對症療法)의 서사. 물론 ‘그것들’을 인간이 삶에서 직면하는 불가해한 운명에 대한 상징으로 해석할 수는 있겠지만, 이건 지나치게 문학적인 성격의 접근이다.


CA1010. 이원태, 〈악인전〉(2019)

아마도 〈범죄도시〉(2017, 강윤성) 시리즈를 제외하고는 마동석이 가장 마동석답게 나온 영화가 아닐까. 이는 김무열과의 조합에서 빚어진 결과이기도 하다. 이 조합의 조화로움은 〈범죄도시 4〉(2024, 허명행)에서의 조합보다 한결 더 조화롭다는 것이 내 평가다. 강력계 형사와 조폭 두목, 또는 ‘짭새’와 ‘양아치’ 깡패 사이의 결탁과 연대의 버디 무비. 나쁜 놈 하나가 더 나쁜 놈 하나를 잡는 것이 아니라, 나쁜 놈 둘이 더 나쁜 놈 하나를 잡는 이야기. 선악의 선명한 구분 따위 없어진 지 오래지만, 같은 목표 아래 이질적인 두 인물이 한 팀이 되어 움직이는 서사의 매력은 여전하다. 아마도 인간 세상에 정의롭지 않은 패거리가 끊임없이 양산되는 것도 이 매력에 속절없이 매혹되는 본능 또는 DNA가 인간에게 내재해 있는 탓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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