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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수 Jun 08. 2024

經(경)8. 나랏일 하는 이의 자격

- 구유용아자 기월이이 가야 삼년 유성 / 《논어》 〈자로편〉 제10장

經(경)8. 나랏일 하는 이의 자격 - 苟有用我者(구유용아자) 朞月而已(기월이이) 可也(가야) 三年(삼년) 有成(유성) / 《論語(논어)》 〈子路篇(자로편)〉 제10장

   이 문장 ‘苟有用我者(구유용아자) 朞月而已(기월이이) 可也(가야) 三年(삼년) 有成(유성)’은 《論語(논어)》 〈子路篇(자로편)〉 제10장의 공자님 말씀입니다. 따라서 당연히 ‘子曰(자왈)’로 시작하지요.

   끊어 읽기는 ‘구유/용아자 기월/이이 가야 삼년 유성’으로 하면 되겠습니다.

   여기서는 맨 앞의 ‘苟(구)’자와 ‘朞月(기월)’, 그리고 ‘而已(이이)’ 정도만 주의하면 되겠습니다.

   우선 ‘苟(구)’자는 기본 의미가 ‘구차하다’지만, 여기서처럼 문장의 맨 앞에 놓일 때는 ‘진실로’나 ‘만일’로 새겨야 할 경우가 많다는 점을 기억해 두면 좋습니다.

   ‘朞月(기월)’에서 ‘朞(기)’는 ‘돌’이나 ‘1년’을 뜻하는 글자인데, 이처럼 ‘달 월(月)’자를 붙여서 ‘朞月(기월)’, 또는 ‘해 년(年)’자를 붙여서 ‘朞年(기년)’ 따위의 모양새로 쓰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朞月(기월)’, ‘朞年(기년)’, ‘朞(기)’가 다 똑같이 ‘돌’이나 ‘1년’이라는 의미인 것이지요. ‘朞(기)’자 하나로도 ‘돌’이나 ‘1년’이라는 뜻을 드러내기에는 충분한데도 굳이 이렇게 관습적으로 두 글자로 썼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물론 ‘朞月(기월)’의 경우, 글자 그대로 풀이하자면 ‘1년의 달들’이니, 결국 ‘1년 12달’, 그래서 곧 ‘1년’의 의미가 된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어쩐지 동어반복 같은 느낌이긴 하지요? 한문에는 이런 경우가 제법 많다는 걸 알고 있으면 당황하지 않고 대처할 수 있습니다.

   ‘而已(이이)’는 문장 맨 끝에 놓이는 일종의 종결사(終結辭)로, ‘而已矣(이이의)’의 모양새로도 쓰입니다. ‘~뿐이다’나 ‘~따름이다’라고 새기면 되지요. 굳이 한 글자 한 글자 새기려고 애쓰지 말고, 하나의 숙어처럼 뭉뚱그려 기억해 두면 요긴하겠습니다.

   하지만 이 문장에서는 ‘而已(이이)’ 뒤에 ‘可也(가야)’가 와 있으니까 이 ‘也(야)’에서 문장을 끊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물론 이 ‘可也(가야)’를 ‘괜찮으니’, ‘좋으니’, ‘가하니’ 따위로 번역해서, 끊지 않고 그 뒤까지 이어서 전체를 한 문장으로 만드는 경우가 많기는 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문장의 마침표에 해당하는 글자라 할 수 있는 ‘也(야)’가 있을 경우 여기에서 한번 끊어서, 그러니까 마침표를 찍어서 문장을 둘로 나누는 것을 선호하는 편입니다. 그래야 문장이 늘어지는 느낌을 피할 수 있지 않나 싶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을 감안하여 전체 문장을 번역해 보면 다음과 같은 정도가 되겠네요.

   ‘만일 나를 쓰는 이가 있다면 1년뿐이라도 좋다. 3년이면 이룸이 있으리라.

   맨 앞의 ‘만일’은 ‘진실로’라고 해도 문의(文意)를 크게 해치는 느낌은 아닙니다. 저는 이 문장이 ‘~면’이라는 조건문이라서 이에 더 어울리는 느낌의 단어인 ‘만일’을 선택한 것일 뿐입니다.

   ‘쓰는’은 ‘쓸 용(用)’자를 그대로 옮긴 것으로, 여기서는 ‘등용(登用)’의 의미입니다. 저는 굳이 한자어인 ‘등용’을 쓸 필요가 있을까 싶어서 우리말로 ‘쓰는’이라고 옮긴 것입니다.

   다음의 ‘나 아(我)’는 이 문장 자체가 공자님 말씀이니까 당연히 공자님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겠지요.

   이 ‘苟有用我者(구유용아자)’는 ‘有~者’ 구문으로, 보통 ‘~인 자가(것이) 있다’ 정도의 모양새로 번역하면 되겠고요.

   마지막으로, 맨 뒤에 있는 ‘有成(유성)’의 ‘成(성)’은 여기서 ‘성공(成功)’보다는 ‘성취(成就)’의 의미에 가깝지 않나 싶습니다. 하여 앞서 ‘쓸 용(用)’자의 경우처럼 우리말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이룸’이라고 옮겨본 것입니다.

   공자님 시대에는 선거라는 제도는 물론이고 그 개념조차 없었으니, 당연히 모든 관직이나 공직은 선출직이 아니라 임명직이었겠지요. 그래서 ‘당선(當選)’이 아니라, ‘등용(登用)’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자리 또는 직위에 올라서 해야 하는 일, 곧 나랏일의 성격은 오늘날의 경우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을 것입니다.

   공자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가, 곧 어떤 나라의 제후가 자신을 나랏일 하는 중요한 벼슬자리에 등용하여 준다면, 자신은 1년 정도면 여러 가지 면에서 그 나라를 충분히 안정시킬 수 있다고요.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터무니없이 오만하다고 핀잔이나 들었겠지요.

   하지만 이것은 공자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신뢰할 만하지 않습니까.

   공자님이라면 정말 한 나라를 안정시키는 데 1년이면 충분하지 않았을까요. 적어도 나라가 번영으로 나아갈 발판 정도는 부족함 없이 마련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백성들이 큰 걱정 없이 평안히 살아갈 수 있을 만큼 평화롭고 넉넉한 태평성대가 이루어지는 데 3년이라는 기간은 필경 모자람이 없는 기간일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공자님의 이 말씀은 나랏일을 하는 자리에 오를 사람은 적어도 그 정도 역량은 갖춘 사람이라야 한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공자님처럼 능력 있고, 뜻이 있고, 어떻게 백성이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나랏일을 할 것인가에 대한 뚜렷한 청사진을 진작에 마련해 두고 있는 유능하고 반듯하고 어진 사람이 아니라면, 감히 온 백성의 운명을 좌우할 나랏일을 맡아서는 안 된다는 뜻이기도 하겠지요.

   이는 동시에 공자님 같은 사람에게 나랏일을 맡길 정도로 인재를 볼 줄 아는 뛰어난 안목이 제후에게 있어야 한다는 뜻도 될 것입니다. 나아가 그런 인재를 쓰려는 굳센 의지도 있어야겠지요. 오늘날이라면 인사권자와 유권자에게 이런 안목과 의지가 있어야 한다는 의미 아니겠습니까. 사사로운 이해관계나 감정에 기대어 아무나 쓰거나 뽑아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朞月而已(기월이이) 可也(가야)’인 사람이 우리에게는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나랏일을 한다면 ‘三年(삼년) 有成(유성)’일 테니, 얼마나 좋습니까. 상상만 해도 행복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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