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의 영화 잡설(雜說)_249
CA1241. 맷 샤크먼, 〈판타스틱 4: 새로운 시작〉(2025)
미래와 과거가 공존하는 곳에 없는 것은 현재다. 그리고 그곳은 여기 이 지구가 아니고, 저곳은 거기 저 우주가 아니다. 그래서 ‘판타스틱’인 것. 마블만의 ‘닫힌’ 유니버스―. 몇 번째 지구인가? 새로운 시작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또 하나의 시작. 무한반복의 또 다른 출발. 죽은 주인공을 시치미 뚝 떼고 억지로 살려내어 안면 몰수하고 시리즈를 이어가는 예전의 저 ‘딱한’ 방식이 이제는 하등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
CA1242. 김태준, 〈84제곱미터〉(2025)
일련의 끔찍한 경험을 줄줄이 하고 나서 몸과 영혼이 모두 극도로 지쳐버린 강하늘(1401 노우성)은 어머니가 계신 시골 고향 집으로 내려간다. 심신이 영락한 자신을 받아주고 기운을 북돋워 줄 곳으로 어째서 그런 장소가 있어야만 할까. 아니, 어째서 그런 곳이어야 할까. 그렇다면 그런 곳이 없는, 또는 그런 곳조차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강하늘은 마지막 희망은 있는 사람이었으니, 결코 최악은 아니었던 셈이다. 층간소음 따위야 그를 괴롭히는 수많은 문제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고. 요컨대, 이 영화는 층간소음에 관한 서사가 아니다.
CA1243. 김성훈, 〈킹덤: 아신전〉(2021)
아무리 좀비 또는 괴물의 전파 경로를 추적해 들어가도 결국은 그 풀 ‘생사초(生死草)’의 기원까지 알아낼 방도는 없다. 그것은 그냥 있었다, 원래부터. 그건 어떤 실험 과정에서 생겨난 돌연변이가 아니다. 결국 본디부터 있었다고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이건 속절없는 서사의 한계다. 이에 대한 의미 있는 설명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돌이킬 수 없는 결정적인 국면으로 넘어가기 직전에 시신을 물속에 집어넣는 것은 치료 ‘방법’일 수는 있어도 치료 ‘약’은 아니다. 소설 《동의보감》에서, 또는 드라마 〈동의보감〉에서 허준은 말했다. 이 세상에 병이 있다면 이 세상 어디엔가는 반드시 그 치료제도 있다고. 그건 허준의 확신이자 신념이었다. 아신(전지현)이 절치부심 계획한 복수의 결과 조선 땅에 생사초가 퍼뜨려졌다는 것은 한갓 전파 경로의 규명에 지나지 않는다.
CA1244. 엘리아 카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1951)
비비언 리의 광기 어린 연기 앞에서는 말론 브란도나 칼 말덴조차도 그저 천덕꾸러기처럼만 보인다.
CA1245. 데이비드 핀처, 〈세븐〉(1995)
영화의 마지막이 범인 존 도우(케빈 스페이시)의 승리로 끝나는 듯하지만, 정작 그는 그 이전에 이미 자기 게임의 규칙을 어겼으므로 실격이다. 따라서 제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범인을 ‘사적으로’ 처단한 형사 데이비드 밀스(브래드 피트)는 진 것이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