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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수 Jun 14. 2024

C9. 테러리스트에게도 가족은 있는가?

  - 스티븐 스필버그, 〈뮌헨〉

C9. 테러리스트에게도 가족은 있는가? - 스티븐 스필버그, 〈뮌헨〉(2006)

요리하는 사람의 마음

   이 영화의 주인공 아브너(에릭 바나)의 취미이자 특기가 요리라는 사실은 예사롭지 않게 다가옵니다.

   요리를 하는 사람은 나 아닌 누군가가 내가 만든 요리를 맛있게 먹어 주는 데서 기쁨을 얻는 법이지 않습니까. 한 번이라도 스스로 요리를 해서 누군가를 대접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에 동의하지 않기는 아무래도 어렵지 않을까요.

   특별히, 그 누군가가 내 가족일 때 요리를 만든 사람의 기쁨은 비로소 가장 높은 곳에 다다른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듯합니다.

   그러니까 요리가 취미인 사람은 지극히 가정적이고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라는 등식이 우선은 성립한다고 보아도 큰 무리는 없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 모든 일이 대체로 그렇듯 예외는 분명히 있겠지만요.

   달리 말하면, 적어도 가족이 없는, 또는 만들지 않은, 그리고 가족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또는 소중히 여길 줄 모르는 사람이 세상에 널린 하고많은 일 가운데서 하필이면 요리를 자기 취미로 삼기란 흔치 않은 일일 듯합니다.

   물론 이것도 저만의 편견일 수 있겠지요. 어쩌면 편견이어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어쨌거나 그러할진대, 더욱이 이것이 취미를 넘어서서 자신 있게 내세울 만한 특기라면요? 그런 사람이라면요?

   이 영화 〈뮌헨〉은 바로 그렇듯 요리가 취미이자 특기인 사람이 졸지에 요인 암살을 임무로 하는 끔찍한 테러리스트의 길로 들어서서 빚어내는 이야기입니다.     


테러, 가족 파멸시키기

   따라서 어쩌면 결론은 처음부터 자명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누군가를 암살하는 행위는 그 누군가가 구성원인 어떤 한 가족을 물리적으로 파멸시키고, 동시에 정신적으로 무너뜨리는 일이기도 할 터이니까요.

   설사 그 암살의 명분이 아무리 거룩해도, 스스로를 튼튼한 가족애로 무장한 사람이 또 다른 가족을 한순간에 파멸시키는 일을 과연 온전한 정신, 온전한 마음 상태로 감행할 수 있을까요. 적어도 그 일을 언제까지나 거듭한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 아닐까요.

   아마도 그래서겠지요. 영화는 테러의 스펙터클에는 무심한 채 시종일관 테러의 주체들이 겪는 정신적인 고뇌와 변모하는 심리의 추이에 관심의 대부분을 기울입니다.     


그때의 테러

   당연히, 영화는 테러로 시작합니다.

   그 유명한 1972년 9월 5일의 뮌헨 테러―. 지금 ‘9·11’이 있다면 그때는 ‘뮌헨’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 바로 그 테러입니다.

   손기정 이후 대한민국 선수 그 누구도 아직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거는 경험이 없던 시절이지요.

   팔레스타인의 테러단체인 자칭 ‘검은 9월단’의 요원들이 무장한 채 뮌헨 올림픽 선수촌의 이스라엘 선수단 숙소에 무단 침입합니다. 그래 코치 2명을 사살하고, 선수 9명을 붙잡아 인질극을 벌인 끝에 결국 그 전원을 죽음으로 몰고 갔지요. 문자 그대로 ‘느닷없이’ 벌어진 대참사였습니다. 적어도 선수들 입장에서는요.

   한데, 이렇게만 말해놓으면 애꿎은 선수들과 그들을 살해한 테러범들이 선악의 구도로 너무도 선명히 갈려버려 그 테러 자체의 배경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 왜 그들은 그런 끔찍한 테러를 저지르기로 하였는지, 그에 대하여 차분히 냉정하게 살펴볼 여유를 잃기 십상입니다.

   어쩌면 2001년의 9·11은 바로 그 ‘여유’를 결정적으로 찾게 해 준 계기였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우리가 그 ‘여유’를 찾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던 셈입니다.     


그의 내면 풍경

   하지만 〈뮌헨〉은 테러의 배경에 대한 탐구나 성찰을 과녁으로 삼고 있지는 않습니다.

   기실 영화 자체가 사회과학이나 국제정치학의 태도로 그런 문제를 다루기에 적절한 매체도 아닐 것입니다.

   아마도 그래서겠지만, 이 영화는 테러의 행위가 그 주체의 내면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그러니까 그 주체의 영혼을 어떻게 변모시키거나 망가뜨리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 영화가 테러의 스펙터클에 깊은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은 필시 이 때문일 것입니다.

   이제 핵심은 당연히 주인공인 아브너의 내면 풍경입니다.

   이제 아브너는 이스라엘 정보국인 모사드의 전직 요원으로서 뮌헨 테러가 발발한 직후, 골다 메이어 이스라엘 총리한테서 직접 뮌헨 테러의 배후 인물들에 대한 보복 테러를 지시받고, 소수정예의 암살단을 꾸려 그 리더로서 활약합니다.

   하지만 이런 역사적인 사실, 또는 표면적인 이야기는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만일 〈뮌헨〉이 아브너가 이끄는 암살단의 활약상에 집중했다면, 그러니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선악 이분법으로 가르고, 이스라엘이라는 선이 팔레스타인이라는 악을 응징하는 과정을 보여 주는 데 힘을 쏟았다면, 〈뮌헨〉은 화려하면서도 맹랑한 스펙터클 액션 대작이 되었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이 영화는 전혀 그렇지가 않아서 놀랍습니다. 아니, 다행스럽습니다.     


나의 가족, 그들의 가족

   결정적인 것은 역시 가족입니다.

   아브너는 암살 계획을 수행하는 동안 내내 가족의 그림자를 의식합니다. 그것은 때로는 내 것이기도 하고, 때로는 테러의 표적이 되는 인물의 것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거의 망령과도 같이 아브너의 머리, 그의 의식을 짓누릅니다.

   왜냐하면, 아브너는 가족을 무엇보다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니까요.

   그의 이러한 면모는 파리에서 전화 폭탄을 이용하여 요인 암살을 감행할 때 잘못하여 그 딸이 아버지를 대신하여 죽게 될 뻔한 상황을 반전시키는 과정에서 제일 먼저 극적으로 드러납니다.

   그 순간 아브너의 머릿속은 자기 아내와 딸의 모습으로 가득 찹니다. 명분이야 어떻든 그의 테러로 다른 한 가족이 파멸하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지요.

   이 일을 시초로, 혹은 계기로 이스라엘 민족으로서 뮌헨 테러에 대한 복수를 해야 한다는 압도적인 명분의 무게는 차츰 줄어들기 시작합니다.

   그래도 총리의 지시로 한번 시작한 일을 중도에 멋대로 그만둘 수는 없는 일이지요. 예정대로 암살은 거듭되고, 이번에는 그 암살에 대한 보복으로서 또 다른 테러가 시작됩니다. 당연합니다. 피는 피를 부르는 법이니까요.

   더욱이 그 한가운데 놓인 인물들의 영혼이 차츰 피폐해져 간다는 것은 한층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마침내는 그 또 다른 테러가 아브너의 암살팀원들을 표적으로 삼게 되는 지경에까지 이릅니다. 그리고 그것이 구체적인 위협으로 다가왔음을 의식한 순간 아브너는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더는 외면할 수 없는 상태에 이릅니다.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

   결론은 간단합니다. 암살을 중단하는 것이지요.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결과입니다.

   그에게는 세상 그 무엇도 가족보다 더 중요하지는 않으며, 따라서 그는 자기 가족을 위험에 빠트리는 그 어떠한 기도(企圖)도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 위험을 강요하는 명분이 아무리 거룩하더라도 가족은 그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명분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아브너에게는 그렇습니다.

   마지막으로 아브너가 자기 아내와 딸이 있는 집으로 돌아갈 때 보복 테러의 위협과 가족의 안위에 대한 걱정에 휩싸인 그의, 곧 그 남편, 또는 그 아버지의 조바심은 고스란히 관객의 것이 되고 맙니다. 필연적인 감정이입입니다.

   어쩌면 바로 이 감정이입, 이 공감의 효과가 이 영화의 진짜 목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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