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터 웨버,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C8. 예술가였던 하녀의 이야기 – 피터 웨버,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2004)
하녀가 예술가일 수 없었던 시대
예술은 창작 주체인 예술가만의 전유물일까요? 예술가로 공인된 사람이 아니면 평생 예술 따위는 해보지도 못한 채 눈을 감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요?
과거에는 아무나 예술을 할 수 없었던 시절이 분명히 존재했습니다. 적어도 17세기 네덜란드에서 ‘하녀’는 예술을 할 수 없었지요.
타고난 예술적 재능이 있건 없건, 하녀라는 신분이 그 당사자를 예술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막았던 것입니다. 원천 봉쇄(源泉封鎖)라고 하면 될까요.
덕분에, 아마도 숱한 하녀들이 타고난 자신의 예술적 재능에 대해서 그 존재 여부나, 그 정체를 미처 인지하거나 인식하거나 파악하거나 판별하거나 확인해 보지도 못한 채 하염없이 나이만 먹어갔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필경은 운명적으로 자신의 재능을 말끔히 사장(死藏)시킬 수밖에 없었겠지요.
어쩌면, 그들은 예술작품이나 예술가와 접촉할 기회조차 차단당한 채 그저 소모적이기만 한 허드렛일을 하느라 평생을 깡그리 허비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는 그 고약한 시대에 하녀라는 신분으로도 감히 예술을 할 수 있었다고 그 구체적인 증거까지 들이대며 주장하는 기이한 영화입니다. 그것도 하녀만의 방법으로요.
위대한 화가의 모델
이 영화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17세기 네덜란드의 화가인 얀 베르메르 반 델프트의 그림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에서 영감을 받아 작가 트레이시 슈발리에가 쓴 동명의 소설이 원작입니다.
E. H. 곰브리치가 자신의 명저 《서양미술사》에서 ‘렘브란트 다음 세대의 거장들 가운데 위대한 화가’라고 일컬은 이 베르메르의 삶에 대해서는 유감스럽게도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가 없는 형편입니다.
따라서 이 영화의 이야기는 거의 전적으로 창작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겠습니다.
창작이니까 당연히 이 영화는 한 인물의 전기(傳記)라고 할 수 없겠지요. 곧, 베르메르는 이 영화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는 제목에서부터 이미 확연히 드러나 있는 사실이기도 하지요.
그렇습니다. 이 영화는 베르메르의 그림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의 모델이었던 혹은 그렇게 추정되는 한 ‘소녀’의 이야기입니다.
재능을 알아보는 안목
영화는 이 소녀(스칼렛 요한슨)가 베르메르(콜린 퍼스)의 집에 하녀로 들어오면서 시작합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소녀는 여자이면서 동시에 하인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소녀가 이중적인 신분의 족쇄에 묶여 있는 존재라는 사실이 핵심이지요. 따라서 이 영화는 ‘소녀’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녀’의 이야기라고 해야 좀 더 맞겠습니다.
여기에 이 소녀가 하녀로서 으레 겪을 법한 차별 대우와, 자신과 비슷한 신분의 남자를 상대로 한 로맨스가 곁들여지지만, 영화의 몸통은 어디까지나 예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라는 그림을 베르메르가 이 소녀를 모델로 삼아 완성하기까지의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이 소녀가 예술적 재능을 타고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베르메르는 일급의 예술가답게 이 소녀한테 남다른 재능, 특별히 미술의 재능이 숨겨져 있음을 단박에 알아차립니다.
알려진 대로, 베르메르는 과작(寡作)의 화가로서, 대부분 집 안의 인물들을 모델로 삼아 어찌 보면 심드렁한 일상의 한 부분을 포착, 그 빛과 색채의 미묘한 결을 단순하고 소박하게, 그러면서도 치밀하게 묘사한 화풍(畫風)으로 유명합니다.
곰브리치가 그의 그림을 ‘인물이 들어 있는 정물화’라고 규정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지요. 그는 인물마저도 정물로서 그린 화가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그가 이 소녀만큼은 정물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또 아무런 소품들도 없이 그 인물 자체만으로 캔버스를 가득 채워서 그렸습니다. 왜냐하면, 소녀는 하녀가 아니라 예술가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술가인 베르메르는 소녀를 같은 예술가로 대접한 셈이라고 한다면, 지나치게 앞질러 간 해석일까요.
그림의 탄생 기원
베르메르의 주변에는 작품을 돈으로 환산한 가치로 밖에는 생각할 줄 모르는 장모, 귀금속 중독증에 빠진 아내, 차라리 악동이라고나 해야 어울릴 ‘어미 닮은’ 딸들, 그리고 음탕하고 탐욕스러운 후원자와 같은 온통 비루하고 속물적이기만 한 인물들 일색이었습니다.
그런 베르메르의 눈에 이 하녀, 또는 소녀가 단연 군계일학(群鷄一鶴)과 같은 존재로 비친 것은 너무도 마땅한 일이겠지요.
아닌 게 아니라, 소녀는 하녀로서 주인님의 화실을 청소하느라 창문을 열어야 할 때도 광량(光量)이 그림에 미칠 영향을 고려할 줄 알았고, 까닭 모르게 답답해 보이는 캔버스에서 특정 소품을 제거함으로써 구도의 문제를 손쉽게 해결하는 예술적 감각 또한 탁월한 바가 있었습니다.
그런 남다른 감각의 발휘가 타고난 예술적 재능의 발로임을 알아본 것은 어디까지나 베르메르의 안목이었지요.
하여 베르메르는 마침내 후원자의 주문에 응하는 차원이 아닌, 자신만의 영감에 떠밀려서, 또는 자극을 받아서 자발적으로 소녀를 그리고자 합니다. 이것이 이 영화가 보여주는, 또는 해석하고 상상하는 그림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의 탄생 기원입니다.
영감의 원천
하지만 영화는 베르메르의 붓질이 아니라, 소녀가 주인인 베르메르한테 어떻게 영감의 원천 구실을 하였는지를 보여주는 데 시종일관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따라서 흡사 문제의 그림은 베르메르 단독의 예술품이 아니라, 소녀와 공동작업을 함으로써 만든 일종의 합작품인 것만 같습니다.
어느 대목에서는 소녀가 베르메르에게 그 그림을 그리도록 사주(使嗾)하지 않았나 싶을 정도지요. 이 과정에서 베르메르는 그저 소녀가 지닌 예술적 재능의 대리인 노릇만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 느낌마저 드니까요.
그러니, 시나브로 베르메르와 소녀 사이에 흐르게 되는 미묘한 연모의 정과 연대감은 너무도 당연한 결과가 아닐까요.
물론, 그들의 감정은 당연히 결실을 보지 못합니다. 단순히 신분상의 차이 탓만이 아닙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에게 예술가였기 때문입니다.
하녀가 아닌 예술가
이제는 소녀의 정체가 더는 모호하지 않습니다.
소녀는 자신의 신분에 어울리는, 또 자기 신분에서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예술을 수행한 것입니다. 이 점에서는 위대한 화가 베르메르조차 한갓 조력자에 지나지 않았던 셈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는 느낌입니다.
따라서 그림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는 베르메르의 작품이 아니라, 소녀의 작품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라는 그림이 시작되고 완성되기까지의 국면에서 소녀는 한갓 하녀가 아니라, 한 사람의 어엿한 예술가였던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