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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수 Jun 21. 2024

C10. 매혹과 충격의 아비규환

  - 두기봉, 〈흑사회〉

C10. 매혹과 충격의 아비규환 - 두기봉, 〈흑사회〉(2005)

장가휘 vs 와타리 테츠야

   영화의 초반부, 작은 거룻배 한 척이 물에 떠 있습니다. 그 배 위의 상황입니다.

   장가휘가 양가휘 앞에서 한없이 매섭고 반항적인 눈빛으로 백옥처럼 희디흰 중식용 숟가락을 접시 위에다 짓눌러 부서뜨리더니, 그 파편들을 가루약 복용하듯 거친 동작으로 제 입에 털어 넣고 우두둑, 우두둑 씹어 먹습니다.

   이 장면에서 저는 후카사쿠 킨지의 야쿠자 영화인 〈의리의 무덤〉(1975)에서 와타리 테츠야가 조직의 보스 앞에서, 죽은 자기 여자의, 역시 백옥처럼 희디흰 뼛조각을 입에 넣고 우두둑, 우두둑 씹어 먹던 흉맹한 장면을 속절없이 떠올렸습니다.

   이 둘 다, 목적이 무엇이든, 자기 윗사람을 그런 도발적인 행위를 통하여 심리적으로 압도하려는 아랫사람의 속셈과 의지를 극적으로 표현하고 시위하는 장면입니다. 수컷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이 광기처럼 치솟아 휘몰아치는 장면이지요.

   〈흑사회〉의 이 장면에서, 자기 아랫사람의 카리스마에 압도당한 기색을 어떻게든 숨기려 안간힘을 다하는 윗사람의 곤혹스러운 내면을 연기하는 양가휘의 표정은 그야말로 압권입니다.

   관객을 매혹하는 것은 아름다운 얼굴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 순간 새삼 뼈저리게 깨달으며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매혹적인 합의

   영화의 전반부, 중화권 최대의 마피아 범죄조직인 삼합회를 구성하는 패밀리 보스들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어둑한 실내는 창을 통해서 가까스로 스며드는 빛으로 한 귀퉁이만이 희붐하게 드러나 있을 뿐이고요. 필름 누아르의 전형과도 같은 조명인데, 한눈에도 매우 이상한 장면입니다.

   어떤 기준으로 배치되었는지 알 수 없는 탁자가 몇 개 놓여 있고, 노인들이 한둘씩 혹은 셋씩 그 탁자들을 하나씩 차지하고 띄엄띄엄 앉아 있습니다.

   영화의 내용을 무시하고 본다면, 여기는 어디 식당이나 찻집이라고 해도 하등 이상할 게 없는 장소입니다. 조금 과장하면, 어느 변두리 동네의 경로당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찌 보면, 그저 나이 지긋한 명예퇴직자들이나 마땅한 소일거리가 없는 동네 어르신들이 한가로이 마실 와 있는 풍경에 지나지 않아 보이는데, 실은 조직의 차기 보스를 선출하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는 자리입니다.

   이를테면, 권력투쟁의 최종 국면이라고 하면 될까요. 바야흐로 조직의 미래를 결정하는 중대한 현장입니다.

   한데, 신기하게도 마피아 영화의 고전인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대부〉(1972)에 나오는 풍경과는 사뭇 다른, 제법 격렬한 토론의 과정이 펼쳐집니다.

   당연히, 첨예한 의견 대립의 상황이므로 쉽게 결론이 나지 않습니다.

   이때 문득, 가장 원로 격으로 보이는 인물인 왕천림이 입을 엽니다. 하지만 뜻밖에도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토론의 내용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제안입니다.

   “일단 차나 함께 마십시다.”

   이 한마디를 기점으로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 거짓말 같은 침묵 속으로 빠져듭니다. 이 토론과 침묵의 대립이 빚어내는 긴장과 이완의 효과가 너무나 절묘합니다.

   이어 다소 감상적인, 그러면서도 한없이 서정적인 기타 선율이 나지막하게 흐르면서 화면에는 한동안 중국의 노인들이 차분하게 함께 차를 나누어 마시는 모습이 꿈결처럼 펼쳐집니다.

   허우 샤오시엔의 베니스 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인 〈비정성시(非情城市)〉(1989)에서 문청(양조위)의 가족들이 함께 모여 조용히 음식을 나누어 먹던 저 그지없이 서정적인 풍경을 떠오르게 하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토론은 이 기묘한 휴지부를 경계로 마법 같은 합의에 도달합니다. 매혹되지 않고는 버티기가 참 어려운 장면입니다.     


충격적인 목격

   영화의 후반부, 이제 조직의 차기 보스로 선출된 임달화가 그 권위에 괘씸하게 도전하는 되바라지고 맹랑한 양가휘를 결국 돌로 쳐 죽이는 장면이 펼쳐집니다.

   나란히 강기슭에 자리 잡고 앉아 낚싯대를 드리운 두 사내, 그들 앞에 놓여 있는 잔잔한 강물, 두 사람을 호위하듯 그들 뒤에 펼쳐져 있는 숲, 그리고 그지없이 푸르고 맑은 하늘―. 그야말로 당나라 때 남종화(南宗畵) 풍의 대가였던 왕유(王維)의 산수화를 떠오르게 하는 풍경입니다.

   한데, 이 서정적인 장면이 곧이어 끔찍한 살인의 현장이 되리라고 감히 그 누가 짐작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양가휘가 이제는 조직의 보스로 확정된 임달화에게 무례하게 과도한 요구를 해댈 때도 그 임달화의 얼굴에 떠오른 사뭇 온화해 보이는 미소는 양가휘의 망발에 조마조마하던 우리를 그래도 설마 하는 심정으로 묶어 둡니다.

   살인은 이 속절없는 방심에 바로 뒤이어 느닷없이 자행됩니다.

   이 장면에서 임달화는 양가휘를 문자 그대로 끝장냅니다.

   임달화가 커다란 한 통의 수박만 한 돌덩이를 두 손으로 머리 위까지 한껏 들어 올려 양가휘의 두개골을 무자비하게 내려치는 이 장면은 흡사 크지쉬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살인에 관한 짧은 필름〉(1988)에서 주인공 사내가 택시 운전기사를 돌덩이로 내리쳐 죽이던 그 잊지 못할 장면 그대로입니다.

   한쪽은 다소 우발적인 듯하면서도 실은 지극히 고의적인 살인이고, 다른 한쪽은 매우 우발적인 듯하면서도 실은 지극히 운명적인 살인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지요.

   하지만 이 장면이 저를 충격한 것은 이 살인의 느닷없음이나 끔찍함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이 장면을 임달화의 어린 아들이 그 아버지의 뜻과는 다르게 결국 목격하고야 만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살인을 저지르는 현장을 목격한 아들! 떳떳하지 못한 아버지의 정체를 마침내 알게 된 아들!

   관객 또한 이 순간 아버지의 살인 장면을 이 아들의 눈으로 목격하는 충격에 고스란히 사로잡히고 맙니다.

   물론 예기치 못한 순간에 아버지의 정체를 알게 되는 아들의 이야기는 드물지 않습니다. 〈대부〉에서 막내아들 알 파치노는 영화가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마피아 보스인 아버지 마론 브란도의 정체를 다 알고 있었던 아들이었고, 셈 멘데스의 〈로드 투 퍼디션〉(2002)은 결국 어린 아들이 아버지 톰 행크스의 어두운 정체를 알게 되고야 마는 이야기였지요.

   하지만 〈흑사회〉의 이 장면은 단순히 아들이 아버지가 어떤 위인이며,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를 알려 주는 한갓 에피소드의 차원에 머물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그 깨달음의 충격을 뛰어넘는 지극히 즉물적인 충격이 뒤따릅니다.

   다시 말하면, 이 묘사의 즉물성이 저한테는 몹시 큰 충격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도 즉물적이어서 이 충격은 영화가 완전히 끝나고 자막이 다 올라갈 때까지, 아니, 그 뒤로도 한동안은 그 강도가 거의 그대로 유지될 정도였지요. 적어도 저한테는 그랬습니다.

   자동차 안에서, 지금 막 사람을 죽인 아버지의 옆자리에 앉은 이 어린 아들의 얼굴에 떠올라와 있는 표정의 참혹함을 도대체 어떤 형용사로 묘사할 수 있을까요.

   돌이켜보건대, 한 편의 영화에서 이토록 보는 사람에게 온전한 정신으로는 도저히 버티기 힘들 만큼의 즉물적인 괴로움을 안겨주는 장면이 또 있었는지, 기억의 갈피를 아무리 헤집어 보아도 좀처럼 찾아낼 수가 없습니다.

   이 순간 우리는 모두 명실상부한 목격자가 됩니다. 곧, 아버지가 살인을 저지르는 장면을 목격한 아들이 되는 것이지요. 아주 고통스러운 감정이입의 순간입니다.

   글쎄요,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저 ‘원초적인 장면’이 가져다주는 충격을 여기에 견줄 수 있을까요. 이 장면을 ‘목격’하면서 저는 그만 그 아들의 앞날이 걱정스러워 견딜 수 없는 심정이 되고 말았습니다.     


철학적인 인서트

   다음은 앞서와 똑같은 장면입니다.

   맥락만 바꾸어서 거꾸로 말하면, 이는 고스란히 ‘자신이 살인을 저지르는 장면을 아들에게 들킨 아버지의 이야기’가 됩니다.

   이 대목에는 문득 등장하는 두 개의 똑같은 인서트가 있습니다. 바로 원숭이 가족 장면입니다. 어미 원숭이가 새끼 원숭이를 품에 안고 있는 모습이 바로 그것입니다.

   아마도 이 문제의 인서트 앞에서 관객은 두 부류로 나뉘지 않을까요.

   하나는 아들의 충격에 감응하는 관객이고, 또 하나는 아버지의 충격에 감응하는 관객입니다. 아니, 어쩌면 이 두 가지 충격에 동시에, 또는 순차적으로 감응한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네요.

   저는 이 장면에서 감독은 아버지의 살인 행위를 목격한 아들의 심정보다는, 자신의 살인 행위를 아들한테 들킨 아버지의 심정을 더 무겁게 여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증거가 바로 이 원숭이 가족 인서트인 것이지요. 매우 드물게 보는, 놀랍도록 유니크한 인서트입니다.

   자기 아버지가 살인을 저지르는 장면을 목격한 충격에 숲을 가로지르며 미친 듯이 달아나는 이 아들을 그 아버지가 필사적으로 따라잡을 때 그 아버지 임달화의 낭패스러운 심정을 이 짧은 인서트 두 개가 충분히 설명해 준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이 장면에 앞서서 이미 나온 바 있는, 저 아버지 임달화가 푸근하게 미소 띤 얼굴로 자상하게 자기 어린 아들에게 손수 음식을 만들어 먹이던 장면과 이 장면 사이의 대비에서 이 심정의 낭패스러움은 여지없이 극대화됩니다.

   어린 새끼 원숭이를 품 안에 고이 안아 보호하는 그 어미 원숭이의 심정, 그리고 아들이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깊은 정신적, 심리적 충격을 받았으리라는 것을 충분히 헤아렸음에도 그 아들을 어떻게든 지키고 보호하고 싶은 그 아비의 절망적인 심정―.

   이 두 개의 심정은 바로 이 순간 이 인서트를 통하여 절묘하게 서로 결속합니다. 아무리 제 기억 속 깊은 곳을 애써 뒤져봐도 저는 이보다 더 철학적인 인서트를 달리 떠올리지 못하겠습니다.


   이 두기봉의 〈흑사회〉는 한마디로 매혹과 충격의 일대 아비규환으로 들끓는 영화라는 것이 제 감상입니다. 이 매혹과 충격은 감동과는 성격이 사뭇 다른 것입니다. 이에 필적할 만한 매혹과 충격을 관객에게 선사하는 다른 영화의 사례를 저는 달리 알지 못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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