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기봉, 〈흑사회2〉_1
C11. 이별과 결탁의 기하학, 그리고 선거 - 두기봉, 〈흑사회2〉(2006)_1
삼합회 회장이 아닌, 아버지의 최후
임달화가 이런 무기력한 최후를 맞이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그라면 결코 자기 부하에게 배신 따위를 당할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요. 적어도 〈흑사회〉에서 그가 보여준 리더십과 카리스마는 그런 ‘빈틈’을 허용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만큼 〈흑사회〉에서 그는 압도적인 존재감을 내뿜는 인물이었지요.
하지만 〈흑사회2〉에서 그는 이 모든 예상을 뒤엎고 배신당합니다. 그리고 죽습니다. 그것도 자신이 결정적으로 자기 아들을 망치고 말았다는 사실을 절망적으로 확인하면서요.
필사적으로 달아나는 아들과 차 안에서 허망하게 맞아 죽는 아버지가 스크린 좌우로 갈라지는 이 가혹한 장면은 〈흑사회2〉의 지향점을 그야말로 기하학적으로 선연하게 보여줍니다.
한데, 이 장면은 어딘가 이상합니다.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대부〉(1972)에서 알 파치노의 누이인 샬리아 타이어의 남편이 패밀리를 배신한 대가로 차 안에서 목이 졸려 죽는 참경을 불가항력으로 오버랩시키는 이 장면에서 임달화가 보여주는 저항은 믿기 힘들 만큼 소극적입니다.
그는 자신으로부터 달아나는 아들의 모습을 아픈 마음으로 목도하며 거의 자포자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쩌면 임달화는 이 순간 죽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혹은 스스로 아들을 망친 벌을 받아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배신하고 고천락의 하수인으로 변모한, 그러니까 고천락의 품속으로 투항한 부하들 손에 가차 없이 무자비한 타격 세례를 받아 죽어가면서도 끝내 아들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합니다.
그것은 위해를 당하는 상황에서 어떻게든 목숨을 부지하려는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조차 고의로 짓눌러버린 사람의 표정입니다. 너무나 깊은 절망에 빠진 나머지 간절히 죽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다면 천하의 임달화가 어째서 그렇듯 무기력하게 당하고만 있었겠습니까.
따라서 〈흑사회2〉에서 임달화의 최후는 일종의 자살입니다. 적어도 미필적 고의에 의한 자살이지요. 그는 스스로 자신의 죽음을 방조한 셈이니까요.
그 순간 임달화는 갱조직의 보스라는 자리에서 비로소 아버지의 자리로 이동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임달화는 그 순간 삼합회의 회장이 아니라, 자기 아들의 아버지로서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저항하지 않은 것이지요.
그런데도 이 이동은 그 아들에게 인지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너무나 비극적입니다.
임달화의 아들은 어쩌면 아버지의 이 이동, 또는 회심(回心)을 영원히 모를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 회심을 세상에서 그 누가 알아채고 이 아들에게 전해주겠습니까. 이보다 더 비극적인 부자 관계가 또 있을까요.
이번에도 어김없이 저는 이 아들의 장래가 〈흑사회〉에서와는 또 다른 의미에서 너무나 걱정스럽습니다.
소박한 삶에 대한 포부, 그 전락의 기표
〈흑사회2〉가 고천락이 자기 여자한테 미래의 포부를 들려주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그러나 그 포부는 삼합회 회장 자리에 대한 욕심이 아닙니다. 거대한 정치적 야욕도 아니며, 예술적 야망의 표출은 더더욱 아니지요.
그의 포부는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님과 함께’(남진, 〈님과 함께〉) 아들딸 낳고 행복하게 살아가겠다는, 또는 ‘아주 작고 예쁜 집에 창문 너머로 보이는 모든 것에 너의 손길이 느껴지고 새하얀 식탁 위엔 너의 예쁜 손으로 만들어낸 음식을 올려놓고 있’(박진영, 〈니가 사는 그 집〉)는 삶에 대한, 소박하기 그지없는, 그러나 어쩌면 가장 이루기 힘든 소망입니다.
그의 자식들은 고천락의 말 그대로 변호사나 의사가 되어 이 사회에 누구보다도 튼튼히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아버지와는 ‘달라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장면에서 고천락은 어쨌거나 자기 존재의 근거를 부정하고 있는 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가 드러내는 포부는 자기 존재의 근거를 내려놓지 않고는, 아니, 내다 버리지 않고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니까요.
그가 삼합회에 어떻게든 발을 담그고 있는 한 이 소박한 삶은 결코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임은 앞서 임달화의 비극적인, 그러나 필연적인 최후가 여실히 증명해 줍니다.
따라서 어떤 종류의 것이든 고천락의 ‘전락(轉落)’은 이 장면에서부터 이미 예정된 것임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전락’을 향해 달려가야 하는 운명을 짊어지고 있는 캐릭터인 셈입니다.
우리가 〈흑사회2〉를 본다면 그것은 결국 바로 이 전락을 확인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 고천락의 포부 자체가 곧 전락의 기표인 셈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렇게 〈흑사회2〉는 그 처음과 끝을 ‘전락’이라는 테마를 고리로 삼아 절묘하게 엮어놓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사지 절단의 이데올로기, 또는 자기 배반을 종용하는 삶의 양식
보스가 보스다운 권위와 카리스마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조직이라는 것이 대개 그렇듯, 온갖 구질구질한 일들을 다 아랫사람들, 곧 부하들이 대신 수행해 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데, 〈흑사회2〉에서 고천락은,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없어 보이는데도, 이 영화 전체를 통틀어 즉물적으로 가장 참혹한 작업을 손수 감행하는, 매우 드물게 보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대부〉에서 알 파치노가 아버지 말론 브란도를 암살하려는 음모에 연루된 인물들을 손수 처리할 때처럼 아주 절박한 상황이 아니라면, 보스나 보스에 준하는 지위에 있는 자가 굳이 자기 손에 피를 묻히는 무리수를 둘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어쩌면 그래서는 안 된다고까지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는 최고 지휘관이 결코 전투의 선봉에 서지 않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을 테니까요. 자칫하다가는 조직 전체가 위험해질 수도 있습니다.
물론 〈흑사회2〉에서 고천락이 임달화의 부하들을 자기 휘하로 투항시키려고 그 가운데 한 명을 시범 케이스 삼아 문자 그대로 ‘작살내는’ 순간은 결코 그 자신이 위험에 처할 만한 정황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는 굳이 스스로 칼을 들어 그 임달화 부하의 신체를 《장자(莊子)》에 나오는 저 해우(解牛:소 잡기)의 달인 포정(庖丁)과 같은 솜씨로 그야말로 가축 도살하듯 토막토막 끊어냅니다. 문자 그대로 사지 절단의 가공할 퍼포먼스입니다.
하지만 이걸 가리켜 대놓고 ‘잔인한’ 장면이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조금 망설여지는 구석이 있습니다.
아무리 봐줘도 이 장면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장편소설 《태엽 감는 새》에서 몽고인이 멀쩡히 살아 있는 일본군 병사의 신체에 칼을 들이대 그 가죽을 이혜민 감독의 〈신용문객잔〉(1992)에 나오는 저 신기의 칼잡이 주방장과 맞먹는 날렵한 솜씨로 깔끔하게 벗겨내는 장면만큼 참혹하지는 않습니다.
심지어 미시마 유끼오가 단편소설 〈우국(憂國)〉에서 단단히 마음먹고 묘사해 보인 저 구토(嘔吐) 유발의 할복 장면이 전시(展示)하던 피비린내 나는 살벌함에도 못 미친다는 것이 제 평가입니다. 영화로 쳐도 이보다는 제임스 완의 〈쏘우〉(2004)가 훨씬 더 끔찍하지요.
그러니까 두기봉이 이 장면에서 의도하고 있는 것은 ‘잔인함’의 과시(誇示)가 아닙니다.
고천락은 여기서 최후의 한 방, 결정적인 카운터펀치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한 것입니다. 임달화처럼 대단한 인물의 부하들을 자기 휘하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과연 얼마만 한 협박의 강도가 필요한가를 그 순간 고천락은 명확히 인식한 것입니다.
더불어, 그런 고강도의 협박은 자기 손으로 직접 하지 않으면 구현해 내기 어려우리라는 점 또한 빈틈없이 계산한 것이지요. 따라서 당연히 그 협박의 마지막 단계는 반드시 고천락 자신의 몫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장면은 고천락의 잔인함을 보여주는 장면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임달화의 카리스마가 그만큼 압도적인 것임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이라고 평가해야 할 것입니다.
제가 임달화의 부하라도 이 장면에서 고천락이 마지막 순간 감행하는 잔인무도한 사지 절단의 퍼포먼스(게다가 그 토막 낸 신체를 갈아서 소시지처럼 만들어 개에게 먹이는!)가 없었다면 차라리 맞아 죽는 한이 있어도 결코 임달화를 배반하지는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부하들은 고천락의 그 가공할 만한 만행에 그만 기가 질려버린 것입니다.
또, 이 장면에서 우리는 고천락이 영화 초반부에 표명했던 저 합법적이고 소박한 삶에 대한 포부와 소망이 결국은 이루어지지 않으리라는 운명적인, 그래서 더욱 안타까운 예감을 동시에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순간 고천락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자기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결코 가까이해서는 안 될 피를 끝내 자기 손에 묻힐 수밖에 없는 거대한 운명 앞에서 절망하고 있는 표정, 바로 그것입니다.
어쩌면 그는 이때부터 이미 영화의 마지막 순간 결국 자신에게 닥쳐올 그 도저히 벗을 길 없는 운명의 족쇄를 예감하고 받아들일 준비를 하기 시작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지옥 같은 순간이 끝난 다음, 고천락이 부글부글 끓는 전골 그릇을 가운데 두고, 이제는 자기 보스를 배신하기로 마음을 다스린 임달화의 부하들과 함께 둘러앉아 건배를 나눌 때, 그의 얼굴에 떠올라와 있는 표정이 마침내 큰일을 해냈다는 홀가분함이나 어려운 고비를 넘겼다는 안도감 따위와는 무관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또 다른 결탁의 기하학
뒷골목의 조무래기 패거리가 아닌 다음에야, 조직의 규모가 커지면 아무리 불법이 본질인 갱단이라도 속절없이 제도권과 결탁할 필요에 직면하기 마련입니다. 어쨌거나 궁극적으로는 그들 또한 제도권에 든든히 뿌리내리기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햇빛을 싫어하는 흡혈귀라면 모를까, 아무렴 영원한 음지가 소망일 까닭은 없는 일이지요.
또, 그들의 목표가 돈이요, 그들이 어쨌거나 사업 확장을 통해 수익의 극대화를 꾀하지 않을 수 없는 자본주의 체제에 몸 담고 있는 한 이는 피할 수 없는 귀결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마침내 고천락도 임달화의 뒤를 이어 삼합회의 회장 자리에 앉는 순간, 이 결탁의 국면에 진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직은 더 커져야 하고, 그러려면 사업의 규모를 확장해야 합니다. 따라서 당연히 제도권 진입을 꾀하지 않을 수 없지요.
여기서 놀라운 장면이 펼쳐집니다. 삼합회 회장의 상징물인 ‘용두봉(龍頭棒, 혹은 용두곤(龍頭棍))’을 제도권, 곧 공안 책임자로부터 건네받는 것도 어처구니없는 설정이지만, 여기에 더하여 고천락은 제도권과 삼합회 사이의 장기적인 결탁의 상징으로 두 세력의 공생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일종의 ‘비법’까지 제안받습니다.
아니, 제안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전수라고나 해야 어울릴 듯한 이 비법의 전달 과정은 흡사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주인공 파우스트가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영혼을 팔아넘기는 과정을 거울에 비춘 것처럼 고스란히 뒤집어 놓은 듯한 형국이어서 놀랍습니다.
이는 앞서 자기 부하들의 손에 죽어가는 임달화와 그의 아들이 화면 좌우로 갈라졌던 구도와는 또 다른 의미에서 절묘한 기하학적 대구를 이룹니다. 감독 두기봉의 기하학 감각이 다시 한번 빛나는 순간입니다.
아마도 제가 오우삼의 〈적벽대전:거대한 전쟁의 시작〉(2008)을 보기 전에 〈흑사회2〉를 보았더라면 제 생각은 이쯤에서 멈추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적벽대전〉을 먼저 보고 나서 〈흑사회2〉를 보았습니다.
하여 〈적벽대전〉에서 유비로 나왔던 배우 우용이 〈흑사회2〉에서 바로 이 거울에 비친 역상(逆狀)으로서 메피스토펠레스, 곧 문제의 공안 책임자로 나왔다는 사실(물론, 〈흑사회2〉에서 공안 책임자로 나왔던 배우 우용이 〈적벽대전〉에서는 유비로 나왔다고 말해야 순서상 맞겠지만요)을 대수롭지 않게 보아 넘길 수 없었습니다.
《삼국지》에 나오는 모든 인물을 통틀어 어쩌면 가장 인간적이면서도 동시에 가장 정치적인 인물일 유비와, 무서운 결기의 새로운 보스 고천락을 결탁의 장으로 무시무시하게 끌어들이는 이 괴물 같은 공안 책임자 ‘시’―.
이 두 인물을 한 배우가 연기했다는 사실을 저는 도저히 범상하게 보아 넘길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순간 삼합회의 차기 회장인 고천락은 노회한 정치가인 유비한테 보기 좋게 당한 것입니다. 혹은 유비의 정치적 술수에 넘어가고 만 것이지요. 바야흐로 이 지점이 〈흑사회2〉가 마침내 고도의 정치성을 획득하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순간 고천락이 당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가 유비의 따귀를 때리는 쪽인데, 그 따귀를 맞는 유비는 결코 단 한 차례의 반격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에게 물리적인 공격을 전혀 가하지 않고 승리를 얻는 기술―. 이것이 바로 진짜 정치 아닐까요.
이 순간 〈흑사회2〉는 암흑가의 영역에서 정치의 영역으로 옮겨온 것입니다.
따라서 〈흑사회3〉이 나온다면, 그 영화는 아마도 암흑가의 이야기가 될 수는 없지 않을까, 하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선거방식에 대한 고찰
〈흑사회2〉를 보는 것은 동시에 선거방식에 대한 고찰의 기회이기도 합니다.
마지막 순간 우용은 고천락에게 임기가 2년으로 제한되어 있는 삼합회 회장 선거를 선출 방식에서 가족이 대대로 물려받는 승계의 방식으로 바꾸라고 제안합니다. 그래야 정국이 안정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를테면, 과거 로마가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바뀌었던 것과 같은 식의 혁명적인 변화를 요구한 것입니다. 일종의 ‘왕정복고’라고 하면 될까요.
이렇게, 조직 전체를 장악할 수 있는 우두머리의 카리스마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삼합회와 같은 폭력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두머리를 어떤 방식으로 결정하는 것이 좋겠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거나, 문제를 제기하는 영화를 저는 달리 알지 못합니다.
여기서 〈흑사회2〉는 마침내 ‘선거제도’에 관한 영화가 됩니다.
가라타니 고진의 역저인 《일본정신의 기원》에서 제가 가장 흥미롭게 읽었던 것은 그가 일본인의 정신 분석을 감행한 대목이 아니라, 바로 선거제도에 관한 그의 아이디어를 제시한 부분이었습니다.
그는 기쿠치 칸(菊池寬)의 단편소설 〈투표〉를 예로 들면서, 어떤 조직의 우두머리를 뽑을 때 후보자 복수 추천의 과정을 거쳐 일정한 수의 후보자가 정해지면, 그 후보자들을 대상으로 제비뽑기를 하면 된다는 아주 간단한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그렇습니다. 핵심은 ‘제비뽑기’입니다.
가라타니 고진의 의견대로라면, 마지막 단계에서 실행하는 이 제비뽑기야말로 모든 선거 과정이 필연적으로 수반하게 마련인 후유증, 예컨대 여러 파벌 사이의 대립이나 알력과 같은 불행한 사태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유일한 계책입니다.
선거 결과에 대한 불복을 방지하는 데 제비뽑기를 뛰어넘는 방식은 없다는 것이지요.
제 생각에 제비뽑기는 삼합회와 같은 폐쇄적인 조직에서는 더더욱 효과적이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결국은 사람이 하는 일이니, 제비뽑기 과정 자체에 끼어들 수 있는 모종의 비리 또한 그 가능성이 전혀 제로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그래도 공정하게만 이루어진다면 제비뽑기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선거방식이라는 데 저는 상당히 공감이 갑니다.
또, 그래야 선거 주체인 왕천림과 같은 원로급 인물이 임달화에게 살해당하는 따위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왕천림을 계단 아래로 밀어 떨어뜨려 죽이는 순간 임달화는 이미 파멸의 문턱을 넘어선 것입니다.
이렇게 따지면, 결국 〈흑사회〉와 〈흑사회2〉의 비극은 고스란히 불합리한 선거제도가 빚어놓은 결과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듯 선거제도에 관한 영화로 〈흑사회2〉를 읽는 것 또한 무시하기 싫은 매우 흥미로운 독법의 하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닌 게 아니라, 〈흑사회〉와 〈흑사회2〉의 영어 제목은 공히 ‘Election(선거)’입니다. *
(다음 글에서 이와는 조금 다른 시각으로 이 영화를 한 번 더 들여다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