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정수 Jun 29. 2024

C12. 가공할 임신, 말하는 따귀

  - 두기봉, 〈흑사회2〉(2006)_2

C12. 가공할 임신, 말하는 따귀 - 두기봉, 〈흑사회2〉(2006)_2

가공할 만한 임신의 풍경

   〈흑사회2〉는 아버지와 아들, 부모와 자식, 그리고 무엇보다도 대를 잇는다는 의미와 관련하여 그야말로 가공할 만한 임신의 풍경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그 자체가 유별나게 특별한 사실인 것은 아닙니다. 임신이 한쪽에는 기쁨이 되고, 다른 한쪽에는 공포가 되는 정황은 이미 로만 폴란스키가 〈악마의 씨〉(1968)에서 여실히 보여준 바 있고, 리처드 도너의 〈오멘〉(1976)에서도 임신은 그 무엇보다도 공포스러운 사건이었지요.

   물론 〈흑사회2〉는 공포영화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저는 이 영화의 맨 마지막 시퀀스, 곧 고천락이 자기 여자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의 풍경보다 〈악마의 씨〉와 〈오멘〉에 나오는 임신의 풍경이 더 무섭다는 느낌은 들지 않습니다.

   아니, 그 두 영화에서보다 〈흑사회2〉에 나오는 임신의 풍경이 훨씬 더 무시무시하게 느껴집니다. 적어도 저한테는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훨씬 더 즉물적이고 현실적인 느낌이기 때문입니다.

   임신했다는 여자의 말을 듣고는 애써 기쁜 척하며 그 여자를 포옹할 때 고천락의 얼굴에 떠오른 것보다 더 깊은 근심과 살벌한 공포에 젖은 낯빛을 저는 본 기억이 없습니다.

   어쩌면 그 순간을 두기봉은 공포영화를 찍는 기분으로 연출하지 않았을까 싶기까지 합니다. 이 점에서 〈흑사회2〉의 마지막 장면은 온전히 공포영화의 클리셰를 따른 셈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마치 임권택 감독이 〈천년학〉(2007)에서 새로 지은 조재현의 집으로 실성한 여자 오승은이 그를 찾아온 장면을 공포영화의 느낌으로 찍었던 것처럼요.

   고천락은 그 순간 스스로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그러나 이제 더는 피할 수 없게 된 ‘무저갱(無底坑)’, 곧 악마가 벌을 받아 떨어진다는 저 ‘밑바닥 없는 구렁텅이’로 굴러떨어지는 심경이 아니었을까요.

   스스로 가장 벗어나고 싶었던 추하디추한 악의 세계 속으로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기 아들이 곤두박질치게 될 운명임을 알아버린, 아니, 실은 늘 인식하고 있었던 아비가 도대체 그 순간 그 아들을 위하여 어떤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일종의 신탁(神託)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는 느낌입니다.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는데도 끝내는 그 운명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었던 비운의 인물 오이디푸스, 그리고 그의 저 징글징글하리만치 가혹했던 신탁을 떠올려 보십시오.

   이 장면에서 〈흑사회2〉는, 그리고 고천락은 고전 비극의 지위, 그리고 그 주인공의 지위를 얻는다, 라고 하면 지나친 과장, 또는 추켜세움일까요.


무엇인가를 말하는 따귀, 그 승자와 패자

   이준익의 〈님은 먼 곳에〉(2008)는 누가 뭐라고 해도 ‘따귀’의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어찌 되었든 이 마지막 ‘따귀’의 순간을 향해 모든 잔가지를 거의 신경질적으로 깡그리 쳐대며 줄기차게 달려가지요. 이 따귀가 없다면 〈님은 먼 곳에〉는 아무것도 아닌 영화다, 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는 느낌입니다.

   한데, 이 따귀는 이상합니다. 그토록 줄기차게 거듭 따귀를 쳐대는데도 정작 그 따귀를 맞는 사람은 아무 저항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순간, 이 따귀를 치는 행위의 줄기찬 반복보다도 이 따귀를 맞는 사람의 무저항이 훨씬 더 중요하며, 핵심이 되는 액션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컨대, 〈님은 먼 곳에〉가 이 따귀를 치고 맞는 행위를 가지고 무엇인가를 말한다면, 그것은 때리는 행위가 아니라, 맞는 행위를 통해서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이 순간 따귀를 때리는 쪽의 심정은 하등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이 순간 그렇게 따귀를 때리고 싶은 수애의 심정을 이해 못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터이니까요.

   하지만 그 심정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따귀를 치는 행위가 상대에게 정서적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점이 중요한 것이지요.

   똑같은 이유에서 맞는 쪽의 심정도, 다른 해석의 여지는 있지만, 결코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니, 때리는 쪽의 심정만큼이나 맞는 쪽의 심정도 전광석화처럼 단박에 이해되며, 동시에 공감이 갑니다.

   이토록 일방적으로 가해지고, 일방적으로 수용되는 따귀의 장면을 저는 다른 어떤 영화에서도 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 마지막 말은 〈흑사회2〉를 보고 나면 철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쪽은 일방적으로 때리고, 다른 한쪽은 일방적으로 맞기만 하는 이런 따귀의 장면이 〈흑사회2〉에서도 보란 듯이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따귀 장면만으로 따진다면 〈님은 먼 곳에〉는 〈흑사회2〉에 빚을 지고 있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는 느낌입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실제로 빚을 졌는지 아닌지의 여부를 굳이 따질 필요가 있을까요? 그저 저는 이 두 장면의 기이하리만큼 즉물적인 일치가 몹시도 신기하며 놀랍다는 고백을 하려는 것일 뿐입니다.

   고천락은 우용의 뺨을 치고, 치고, 또 칩니다.

   동시에, 우용은 고천락의 따귀를 맞고, 맞고, 또 맞습니다.

   한데, 이 따귀의 결과는 〈님은 먼 곳에〉와 정반대입니다. 어쩌면 정반대가 아니라, 똑같다고 말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 같지만, 일단 저는 정반대라고 규정하고 싶습니다.

   이 따귀가 빚어낸 승패의 결과를 따지면 〈님은 먼 곳에〉는 때린 쪽, 곧 수애가 승자고, 〈흑사회2〉는 맞은 쪽, 곧 우용이 승자이기 때문이지요.

   다시 말하면, 〈님은 먼 곳에〉는 때리는 것으로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영화고, 〈흑사회2〉는 맞는 것으로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영화입니다.

   〈님은 먼 곳에〉에서 수애는 따귀를 때림으로써 무엇인가를 말하고, 〈흑사회2〉에서 우용은 따귀를 맞음으로써 무엇인가를 말합니다.

   〈님은 먼 곳에〉에서 관객을 향해 무엇인가를 말하는 사람은 수애고, 〈흑사회2〉에서 관객을 향해 무엇인가를 말하는 사람은 우용입니다. 여기에 영화의 주제, 또는 메시지가 걸려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하지만 그 말, 또는 가르침의 무게는 〈흑사회2〉 쪽이 훨씬 더 많이 나갑니다. 〈님은 먼 곳에〉는 그래도 그 따귀의 순간 뭔가 해소되는 느낌이 들지만, 〈흑사회2〉는 그 따귀의 순간 거꾸로 뭔가 꽉 막히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님은 먼 곳에〉는 그 따귀의 순간 끝나는 영화고, 〈흑사회2〉는 그 따귀의 순간 비로소 무엇인가가 시작하는 영화라고요.

   다시 말하면, 〈흑사회2〉는 그 따귀의 순간 시작되는 그 무엇인가가 바로 핵심인 영화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마지막 순간 고천락의 거듭되는 따귀를 아무런 저항 없이 맞기만 함으로써 고천락을 압도하는 우용의 표정은 그야말로 압권입니다.

   고천락은 임달화의 부하들을 자기 휘하로 거두어들이고, 임달화를 처치함으로써 삼합회의 회장 자리에 오르는 승자가 되지만, 결국 우용에게 따귀 몇 대를 침으로써 지고 만 것입니다.

   그리고 이 패배는 그 아들이 장차 맞이해야 하는 운명에까지도 영향을 미칠 만큼 결정적인 것입니다.

   〈대부〉 3부작에서 자기 자식들을 자기와는 다른 삶을 살도록 만들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지만, 결국 실패하고 쓸쓸한 최후를 맞았던 알 파치노를 생각하면, 저는 임달화의 아들이 걱정스러웠던 만큼이나 고천락과 그 아이(아들인지 딸인지는 아직 모릅니다)의 장래가 걱정스러워 못 견디겠습니다.  *

매거진의 이전글 C11. 이별과 결탁의 기하학, 그리고 선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