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정수 May 31. 2024

C7. 가족, 지금의 파탄과 그때의 파탄

  - 미카엘 하네케, 〈히든〉(2006)

C7. 가족, 지금의 파탄과 그때의 파탄 - 미카엘 하네케, 〈히든〉(2006)

영화의 세 가지 범주

   세 가지 종류의 영화가 있다고 말해보면 어떨까요.

   하나는, 보는 것만으로 충분한 영화입니다.

   또 하나는, 보고 나서 그 영화에 관한 글들을 찾아 읽어야 하는 영화입니다.

   마지막 하나는, 보고 읽는 것만으로도 부족하여 결국 손수 그에 관한 글을 써야만 하는 영화입니다.

   영화의 내용 자체가 얼마나 난해한가의 여부를 떠나서 대개의 영화들은 이 세 가지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한데, 드물게도 이 세 가지 범주를 벗어나는 영화가 있습니다.

   보고 나서도, 읽고 나서도, 심지어 쓰고 나서도 뭔가 미진한 느낌이 계속 남아서 좀처럼 그에 관한 생각을 멈출 수 없게 하는 영화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영화 〈히든〉이 그 아주 드문 사례에 해당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적어도 저한테는 그렇습니다.

   그러니, 이 글은 바로 그 미진함을 조금이나마 면해보려는 한 가지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기이한 도입부

   〈히든〉처럼 기이하게 시작하는 영화가 달리 또 있을까요. 적어도 저는 얼른 떠올리지 못하겠습니다.

   이 영화의 첫 장면은 흥미롭지도, 다이내믹하지도, 끔찍하지도, 아름답지도, 에로틱하지도, 매혹적이지도 않습니다. 스펙터클은 당연히 아니지만, 그렇다고 딱히 공포나 미스터리의 느낌도 역시 아니지요. 관객의 눈길을 한순간에 휘어잡는 효과 따위에는 처음부터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선언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입니다.

   한 마디로 너무나 평범합니다. 아니, 차라리 심드렁하리만치 맨송맨송하다고나 해야 할까요. 어떻게든 묘사해 보려고 해도 특별히 묘사할 것이 없어서 금세 곤혹스러워집니다.

   영화가 시작하면, 어느 구석에서도 이렇다 할 특색이 엿보이지 않는 프랑스의 어느 주택가 골목 풍경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듭니다. 카메라는 골목 이쪽에 미동도 없이 가만히 있으면서 그저 골목과 직각으로 맞닿는 저쪽의 주택 건물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뿐입니다.

   아니, 이것도 정확한 묘사는 아닙니다. 카메라가 도대체 무엇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지 콕 집어 말할 수 없을 만큼 카메라와 피사체 사이의 거리가 너무나 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실은 그 피사체 자체가 정확히 무엇인지를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특정할 방도가 없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관객으로서는 도무지 어디에, 또는 무엇에 눈길을 두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럽습니다.

   화면 안에서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이따금 그곳을 지나가는, 역시 이렇다 할 특색 없는, 평범한 행인들의 모습뿐입니다. 카메라는 결코 그 행인들의 동선을 따라서 움직이지도 않습니다. 숫제 그럴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게다가 언제 끝나나 싶을 만큼 하염없는 롱테이크입니다.

   대개 영화는 아무리 난해한 예술 영화, 또는 심각한 작가주의 영화라 할지라도 이런 식으로 무엇인가를 ‘무작정’ 보여주지는 않습니다. 적어도 제 기억이나 안목에서는 그렇습니다.

   화면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관객은 대개 어느 부분을 겨냥하여 거기에 시선을 맞추어야 할지 큰 어려움 없이, 본능적으로 금세 파악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프레임을 구성하여 찍지요. 그래서 그 부분을 중심으로 나머지 화면 전체를 살피게 됩니다. 아니면, 그 나머지를 무시하고 그 부분에 집중하지요.

   다시 말해서, 이 영화의 첫 장면은 마땅히 주의해서 보아야 할 어떤 것을 결정하는 데 관객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간 퉁명스러운 게 아니지요.     


흔해 빠진 스릴러?

   저는 처음에 이것을 이 영화의 미학적 기조(基調)를 관객에게 알려 주는 장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히든〉은 감독이 보여주는 것만을 보아야 하는 영화가 아니라, 관객이 스스로 능동적이고 자발적으로 화면 속에서 보아야 할 것을 결정해야 하는 영화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하지만 영화는 이런 제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이내 알려 주었습니다.

   머잖아 밝혀지지만, 이 화면은 누군가가 찍어서 이 영화의 주인공 부부에게 보내온 비디오 속의 장면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비디오 속의 주택은 이 부부의 집이었고요. 그러니까 누군가가 그 집을 캠코더로 촬영하여 그 테이프를 이들에게 보내온 것입니다.

   이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부터 이야기는, 흡사 이제 막 내리막 코스에 접어들기 시작한 롤러코스터처럼, 기다렸다는 듯 갑자기 술술 풀려나가기 시작합니다. 아니, 그러는 듯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내막이 너무도 뻔하기 때문입니다.

   익명의 누군가가 남의 집을 몰래 촬영하여 그 테이프를 그 집주인 내외한테 보내왔다면 도대체 그 의도가 무엇이겠습니까. 협박 아니면 경고, 또는 어떤 원한에 대한 앙갚음의 예고 따위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게다가 그 누군가는 비슷한 내용의 테이프를 거듭해서 더 보내옵니다. 그러다 마침내는 한술 더 떠서 끔찍한 그림이 그려진 엽서까지 보내오기에 이릅니다.

   그렇다면 그 테이프는 필경 이 부부에게 원한을 품은 누군가의 소행일 것이고, 따라서 영화의 나머지는 당연히 그 원한의 정체를 밝힘과 동시에 그 원한을 품고 있는 누군가를 추적하여 잡아내는 과정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이 영화는 흔해 빠진 스릴러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잘못된 질문, 잘못된 답

   하지만 이 헤아림, 짐작, 추론이 다 틀렸다는 것을 영화는 우리에게 곧 깨우쳐 줍니다.

   이제부터 영화는, 범인을 잡는 수사 과정이 아니라, 이 테이프를 받은 주인공 부부 가운데 남편(다니엘 오떼유)이 이 테이프와 엽서의 끔찍한 그림을 접함으로써 과거의 기억 속으로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드는 과정을 집요하게 추적해 보여주는 데 몰두합니다.

   여기에서 박찬욱의 〈올드 보이〉(2003)에서 오대수(최민식)를 상대로 이우진(유지태)이 강조했던 교훈이 떠오르는 것은 속절없는 귀결입니다. 요컨대 ‘잘못된 질문을 던지면 잘못된 답을 얻을 수밖에 없다’라는 교훈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테이프를 보내왔느냐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진짜 핵심은 그 남편이라는 한 인간의 내면 풍경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이 영화의 주제에 대한 해석의 방향이 두 갈래로 나뉩니다.    

 

파탄 나는 가족

   이제 영화는 이 남편에게, 그가 자신의 어린 시절, 그러니까 영화 속 시간으로부터 40여 년 전인 1961년, 알제리 독립운동 과정에서 프랑스 경찰의 손에 부모를 학살당한 한 알제리 소년을 모함하여 그 소년을 비극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던 어두운 과거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 당시의 광경을 반복하여 꿈에서 볼 정도로 이 문제에 대하여 남편은 극심한 심리적 강박에 시달립니다. 이 점에 착목하면 〈히든〉은 우선 죄의식에 관한 영화가 되고, 그렇다면 문제의 테이프도 현실에 존재하는 구체적인 누군가가 아니라, 이 죄의식이 만들어 낸 허상이라는 식의 초현실적인 해석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또 하나의 방향은, 남편의 내면 풍경이 아니라, 이 느닷없는 사태가 야기한 결과에 무게중심을 두는 것입니다.

   남편은 그 끔찍했던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혀 점점 신경증적으로 변해가고, 아내(줄리엣 비노쉬)는 그런 남편을 이해할 수도, 감당할 수도 없어 괴로워합니다.

   게다가 사춘기의 외아들은 바야흐로 자기 부모님이 겪고 있는 심리적 혼란을 틈타 바깥으로만 나돌고, 마침내 아이다운 날카로운 감수성과 과장된 상상력으로 엄마의 불륜을 의심하는 지경까지 이릅니다.

   멀쩡했던 가족이 하루아침에 걷잡을 수 없도록 엉망진창이 되어가는 형국입니다.     


관객의 마음 불편하게 하기

   물론 그 밑바닥에는 40여 년 전에 파탄 난 또 다른 가족의 끔찍한 불행의 사건이 무슨 원죄의 기억처럼 놓여 있지요.

   그렇다면 〈히든〉은 어쨌거나 분명히 가족의 파탄에 관한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적어도 명목상으로는요.

   한데,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또 보고 나서도 처음과는 달리, 멀쩡했던 프랑스인 가족이 졸지에 파탄 나는 과정보다 그보다 훨씬 더 먼저 결정적인 파탄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어졌던 저 알제리 소년의 가족 쪽에 자꾸만 마음이 쓰여 편치가 않았습니다.

   이렇듯 관객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데 미카엘 하네케 감독은 늘 그래왔던 것처럼 이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로 전혀 주저하지도, 망설이지도, 조심스러워하지도, 미안해하지도 않습니다. 능청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지독하리만치 냉정한 쪽입니다. 이런 냉정함도 영화 예술에서는 분명 귀한 덕목의 하나가 아닐까요.  *     

매거진의 이전글 C6. 얘들아, 자신만의 색깔을 찾으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