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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수 May 17. 2024

C5. 스토리텔링 된 것은 춘향전인가, 방자전인가?

  - 김대우, 〈방자전〉(2010)

C5. 스토리텔링 된 것은 춘향전인가, 방자전인가? - 김대우, 〈방자전〉(2010)

사랑 이야기

   《춘향전》이 지닌 사랑 이야기로서의 본질을 훼손한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방자전〉도 기본적으로는 사랑 이야기입니다. 아니, 《춘향전》보다 훨씬 더 지독한 사랑 이야기지요. 지독하기에 《춘향전》이 당시의 조선 사회에 가했던 비판보다 〈방자전〉이 당시의 조선 사회에 가하는 비판이 훨씬 더 깊고 날카롭습니다.

   다시 말하면, 한결 더 냉소적이고 풍자적이며, 그것이 겨냥하는 과녁도 다채롭습니다. 이 비판이, 다름이 아니라, 어쩌면 가장 보편적인 주제라고도 할 수 있는 사랑 이야기의 바탕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춘향전》의 비판이 그랬던 것처럼, 〈방자전〉의 비판도 그에 대하여 관객으로서 느낄 수 있는 공감의 폭이 매우 깊고 넓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춘향전의 힘

   《춘향전》 스토리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두 주인공인 성춘향과 이몽룡의 사랑이, 서로의 신분 차이에도 불구하고, 순애보(殉愛譜)스러운 진정성을 갖추고 있다고 사람들이 믿기 때문일 것입니다.

   글로 읽든, 판소리로 듣든, 영화로 보든, 《춘향전》에서 춘향과 몽룡의 사랑이 정략이나 계산이나 허위나 허영 따위가 끼어든 가짜이리라고는 아무도 믿지 않을 것입니다. 심지어는 행여 가짜라고 의심하고 싶어 하는 사람조차도 없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춘향전》 스토리가 그걸 접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감동이나 쾌감은 오롯이 춘향과 몽룡의 사랑이 지닌 진정성이라는 매력에서 나오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둘의 사랑이 어떤 불순한 목적을 지닌 가짜고 쇼라면 《춘향전》 스토리는 진작에 폐기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을 것입니다.

   따라서 《춘향전》 스토리가 지닌 힘은 춘향과 몽룡의 사랑이 지닌 진정성을 전제로 한 것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방자전의 힘

   〈방자전〉의 힘도 《춘향전》의 그것과 똑같은 근원에서 나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방자전〉에서는 사랑의 당사자가 ‘춘향과 몽룡’에서 ‘춘향과 방자’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방자전〉 스토리의 매력 또한 춘향과 방자의 사랑이 지닌 진정성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는 셈이지요.

   하지만 〈방자전〉에서는 이 사랑의 진정성에 대하여, 무신경한 관객이라면 자칫 의심할 수도 있는 몇 가지 장치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스토리가 전체적으로 훨씬 더 세련되고, 풍요롭고, 교묘해졌습니다.

   이 장치에 현혹되어 춘향과 방자의 사랑이 허위고 가짜라고 믿거나, 아니면,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외면하는 순간 우리는 속절없이 〈방자전〉의 본질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동시에 〈방자전〉은 이도 저도 아닌 이상한 코믹 에로 사극이 되어버립니다.     


액자식 구조

   〈방자전〉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형식상의 특징은 이른바 ‘액자식 구조’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장안 건달 세계의 일인자’로 알려져 있는 방자(김주혁)가 ‘통속소설의 일인자’로 평가받고 있는 색안경 쓴 사내(공형진)에게 털어놓는 자신과 춘향(조여정) 사이의 사랑 이야기가 이 영화의 몸통이기 때문입니다.

   방자가 남에게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은 일차적으로 그 자신이 글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마 방자 자신이 글을 읽고 쓸 줄 알았더라면 자기 힘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 들지 않았을까요. 물론 글을 알아도 글을 쓰는 솜씨는 사람마다 천차만별일 테니, 자기보다 글을 더 잘 쓰는 사람에게 맡기려 할 수는 있겠지요.

   여기서 첫 번째로 궁금한 것은, 당시에 글을 쓸 줄 아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을 텐데, 방자는 왜 하필 ‘소설’ 쓰는 사람에게 이 일을 맡기려 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사랑 이야기라는 점을 제외하면, 〈방자전〉의 또 한 가지 핵심 주제가 바로 여기에 얽혀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어째서 방자는 굳이 소설 쓰는 사람에게 자기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겨달라고 부탁한 것일까요? 소설은 기본적으로 허구 아닙니까. 그렇다면, 방자는 지금 바야흐로 자기 이야기를 소설로, 또는 소설스럽게 각색해주기를 원하고 있는 것 아닐까요? 이는 충분히 개연성 있는 추론일 것입니다.

   요컨대, 방자는 자기 이야기가 ‘있는 그대로’ 세상에, 또는 후대에 전해지기를 바라지 않는 것입니다.  

   

승리의 기록과 패배의 기록

   《춘향전》은 엄혹한 신분제 사회인 조선시대에, 확고부동한 신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기생의 딸인 춘향과 양반집 자제인 몽룡의 사랑이 기어이 부부관계의 모양새로 이루어지는, 당시의 현실을 엄밀히 고려하면, 매우 황당무계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야기 그 자체로는 분명한 ‘승리’의 기록입니다. 둘의 사랑은 어쨌거나 첫째로 신분제의 벽을 이겨냈고, 둘째로 탐관오리의 학정을 이겨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순간 암행어사 출두 장면이 《춘향전》의 하이라이트이자 클라이맥스인 까닭도 그것이 모두가 기다리던 ‘승리’의 장면이기 때문입니다. 이론의 여지가 없는 해피 엔딩이지요.

   한편 〈방자전〉은, 적어도 방자가 진술한 내용만으로는, 영화 속 색안경 낀 소설가가 정확하게 규정한 대로 ‘하인의 억울한 사랑 이야기’로서, 분명한 패배의 기록입니다. ‘억울한’ 이야기가 어찌 ‘승리’의 기록이 될 수 있겠습니까.

   아닌 게 아니라, 〈방자전〉에서 방자와 춘향은 신분제의 벽도 넘어서지 못했고, 탐관오리의 학정도 물리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춘향은 몽룡(류승범)의 만행으로 몸을 다쳐 정신마저 온전치 못한 상태입니다.

   심지어는 방자가 소설가에게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고 있는 그 순간까지도 방자와 춘향은 몽룡이 보내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쫓기고 있는 신세입니다. 언제 쥐도 새도 모르게 제거될지 알 수 없는 위태로운 처지인 것입니다.

   ‘숙종대왕 즉위 초’가 시대 배경이므로 조선의 신분제가 폐지되기까지는 아직도 많은 세월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니까 몽룡이 그들을 제거하려는 뜻을 접지 않는 한, 방자와 춘향은 머지않아 비극적인 최후를 맞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성격상 일종의 ‘추노(推奴)’인 셈인데, 조선시대에 추노는 포기된 적이 없지 않습니까. 하긴, 그토록 집요했기 때문에 신분제가 5백 년이나 유지될 수 있었겠지요.     


각색, 또는 스토리텔링

   그럼 이 패배의 억울하고 가슴 아픈 이야기를 방자는 왜 굳이 기록으로 남기려 하는 것일까요? 하지만 이 의문은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입니다.

   영화의 마지막 순간 방자는 자기 이야기를 다 듣고 방자를 주인공으로 한 ‘억울한’ 사랑 이야기를 쓰겠다는 색안경의 소설가에게 손사래를 치며 스스로 고백합니다. 아니, 부탁합니다.

   “아름답게 써주셔야지요.”

   그러고는 더 나아가 스스로 각색의 지침을 제시하여 주기까지 합니다.

   “춘향이가 어느 단옷날 그네를 타다가 이도령을 만나서 한눈에 사랑에 빠지는 겁니다. 그리고 도련님은 한양에 가서 장원급제를 하시고, 춘향이는 잘 기다리다가 서로 백년해로한다는 이야기로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로 그 《춘향전》의 이야기입니다.

   당연히, 방자의 이야기를 이미 다 듣고 나름대로 집필 방향을 머릿속에 정리해 두고 있던 소설가는 그러는 방자를 선뜻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아니, 정 그렇게 원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굳이 왜……?”

   이에 대한 방자의 깊은 회한 섞인 짧은 답이 의미심장합니다.

   “못 이룬 거니까.”

   그리고 방자는 쓴웃음을 짓더니, 멍하니 앉아 있는 춘향의 두 볼을 양손으로 고이 감싸며 이렇게 덧붙입니다.

   “해주고 싶어서요.”

   그러니까 방자는 가슴 아프고 억울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행복하고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남기고 싶은 것입니다. 아니, 춘향에게 선물해 주고 싶은 것이지요.

   바로 여기가 춘향에 대한 방자의 사랑이 갖고 있는 진정성이 빛을 발하는 지점입니다.

   물론, 이미 정신이 온전치 못하게 된 춘향이 방자의 이런 사랑을 알 턱이 없으며, 나아가 방자의 뜻대로 각색된, 그러니까 전문가의 손으로 스토리텔링 작업을 거친 그 ‘아름다운’ 이야기가 책으로 나온들 그걸 읽을 수 있을 리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방자의 의도는 핵심 과녁이 사라진 매우 허망한 일, 곧 허사가 되는 셈입니다. 그런데도 방자는 기어이 이 일을 감행하려 합니다. 왜요?

   여기서 이 까닭을 춘향에 대한 방자의 애틋한 사랑 때문이라고만 하는 것은 절반의 정답에 지나지 않습니다.     


신분제의 울타리

   〈방자전〉은 시종일관 신분제와 당시 양반 관료 사회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과 정서로 가득 차 있습니다.

   같은 시기에 과거에 급제한 이몽룡과 변학도가 대궐에서 과거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내시들 앞에 나란히 선 채로 푸대접을 받는 장면이 그 전형적인 사례입니다. 이 장면에서 양반은 아무런 권위도 없고, 하나도 멋지지 않습니다. 도무지 우러러볼 만한 구석은 없이 그저 한심스럽기만 합니다.

   더욱이 이 영화는 그런 감정을 여러 인물의 말과 태도를 통하여 기회 있을 때마다 몇 번이고 거듭하여 가감 없이 노출하기를 서슴지 않습니다.

   특히 방자를 비롯하여 신분이 낮은 일군의 사람들이 지닌 감정은 매우 부정적이어서, 그들은 양반을 근본적으로 믿지 못하겠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내뱉습니다.

   이런 설정만으로도 벌써 신분제 몰락의 단초가 넉넉히 엿보인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몰락은 어쨌거나 한참 뒷날의 일입니다.

   엄혹한 신분제가 사회체제를 유지하는 힘으로 엄연히 작동하고 있는 동안만큼은 적어도 방자와 춘향의 패배는 운명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도무지 이겨서 승리할 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춘향이나 방자 모두 이 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무신경한 관객한테 둘의 사랑에 담긴 진정성을 자칫 의심케 할 수도 있을 장치나 단서들, 곧 춘향이 방자와 잠자리를 같이 했으면서도 버젓이 몽룡과 동침을 한다거나, 방자의 마음에 상처를 입힐 것이 뻔한데도 춘향이 대놓고 몽룡과의 결혼을 추진한다거나, 몽룡을 따라서 떠나려는 춘향을 그냥 놓아주려는 방자의 미심쩍은 태도를 위시한 몇 가지 설정과 장면들이 다 그런 인식에서 나온 것임은 이쯤에서 분명해집니다.

   요컨대, 방자와 춘향은 신분제라는 울타리의 한계나 제한, 또는 속박 안에서 자신들의 사랑을 끝까지 유지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을 찾은 것입니다. 그것이 마치 신분제에 투항하여 비겁하게, 또는 나약하게 사랑을 포기하거나 차선으로 미루는 듯 보이는 것은 어디까지나 오해받기 딱 알맞은 외피일 뿐이지요.

   그렇게 투항한다고 방자와 춘향의 마음에서 양반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 곧 증오나 환멸, 혐오와 같은 감정들이 깡그리 사라졌다고 볼 근거는 어디에도 없기 때문입니다.     


패배냐, 승리냐

   엄연히 신분의 차이가 있는데도 방자한테 몽룡은 일종의 연적(戀敵)이기도 합니다. 결코 지고 싶지 않은 상대지요.

   춘향을 ‘양반의 여자’라고 말하는 소설가한테 방자는 정색하며, 춘향은 원래부터 ‘자기 여자’였다고 도저하게 선언합니다. 그러니까 이 사랑에서 방자는 물러나거나 지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방자는 무슨 수를 쓰든, 반드시 춘향과의 사랑을 성취하고 싶어 합니다. 신분제의 울타리 안에서 결국은 패배할지라도 춘향을 포기할 수는 없는 방자입니다. 방자는 ‘간절히’ 이기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방자가 소설가에게 자신과 춘향의 사랑 이야기를 소설로 쓰게 하려는 까닭은 당연히 ‘이기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위에서 언급한 정답의 나머지 절반입니다.

   방자가 최종적인 유일한 승리의 방책으로 마침내 ‘소설’을 선택한 것은 매우 서글프면서도 아주 합리적인 발상입니다.

   현실적으로는 방자와 춘향의 패배가 기정사실이라고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은 아닐 것입니다. 이 비좁은 조선 땅에서 낮은 신분의 그들이 언제까지 목숨을 부지하며 무사히 도망 다니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앞서도 언급했지만, 비극적인 최후가 머지않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요. 그런데도 방자는 기어코 이기고 싶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여기서 방자는 이런 결론에 도달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꼭 신분제를 척결하고 내가 춘향과 백년해로하는 것만을 승리로 여길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그도 그럴 것이, 그런 승리는 애초에 어불성설임을 방자 스스로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궁리 끝에 방자는 소설을 선택합니다. ‘적는 사람이 살아남는다’라는 뜻의 ‘적자생존’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지만, 글로 된 기록의 한 가지 핵심 가치는 그 생명력이, 영원까지는 몰라도, 무지하게 길 수도 있다는 데 있지 않을까요.

   못된 양반들도 언젠가는 다 죽어 잊힐 것이고, 신분제도 언젠가는 철폐되겠지만, 기록은 오래도록 남아 후세에 전해질 테니까요. 그리고 그 기록으로 말미암아 모두가 ‘기억’할 것이니까요.

   하면, 기록을 남긴 사람이 마지막 승자가 된다는 것은 결코 허언이 아닐 것입니다. 따라서 방자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승리를 위한 최선의 지혜로운 선택을 한 셈이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이 색안경 쓴 소설가는 방자를, 또는 방자의 의도를 오해한 것입니다. 방자는 억울한 사랑 이야기의 당사자가 아니라,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의 창조자가 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패배자가 아니라 승리자가 되려는 것이지요.

   이로 미루어 보면, 이 소설가는 아직 소설의 본질에 대하여 충분히 인식하고 있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어느 쪽이 ‘스토리텔링’ 되었는가?

   이 영화의 이야기 구조가 지닌 논리대로라면, 이 영화는 《춘향전》을 다시 쓴, 곧 스토리텔링을 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이 영화는 《춘향전》을 스토리텔링 한 적이 없습니다. 〈방자전〉은 《춘향전》과는 별개인 또 하나의 독립된 이야기입니다.

   아니, 이 영화의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오히려 《춘향전》이 〈방자전〉을 스토리텔링 하여 다시 쓴 이야기가 되는 셈입니다.

   그러니까 〈방자전〉이라는 영화가 나왔지만, 《춘향전》은 조금도 손상되지 않은 채 고스란히 보존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춘향전》은 스토리텔링으로 명예훼손을 입지 않았습니다. ‘스토리텔링’ 된 것은 〈방자전〉이 아니라 《춘향전》이기 때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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