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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수 May 10. 2024

C4. 뮤지션이냐, 남편이냐?

  - 브래들리 쿠퍼, 〈마에스트로 번스타인〉(2023)

C4. 뮤지션이냐, 남편이냐? - 브래들리 쿠퍼, 〈마에스트로 번스타인〉(2023)

번스타인이냐, 펠리시아냐?

   이 영화의 우리나라 개봉 제목에는 얼마간 관객을 현혹하는 느낌이 있습니다. 또는, 오해하게 만드는 측면이 있습니다.

   이 영화의 원제는 그냥 ‘마에스트로(Maestro : 거장, 또는 거장 지휘자)’입니다. 한데, 우리나라 개봉 제목은 ‘마에스트로 번스타인’이지요. 우리나라에서 붙인 제목은 ‘마에스트로’의 뒤에 ‘번스타인’이 붙어서 이 마에스트로가, 곧 이 ‘거장(거장 지휘자)’이 바로 번스타인이라고 관객에게 알려주는 구실을 합니다. 그러니까 이 제목은 그 자체로 이 영화가 다름 아닌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에 관한 영화라고 관객을 향해 선언하고 있는 셈입니다.

   달리 말하면, 이 제목은 ‘마에스트로’를 ‘번스타인’으로 한정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이로써 영화에 대한, 또는 영화의 내용에 대한 해석의 폭이 처음부터 얼마간 제한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 ‘마에스트로’가 꼭 번스타인을 가리키는 말일까요? 또는, 꼭 번스타인을 가리키는 말이어야 할까요? 저는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이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를 확인해보면, 맨 위에 놓인 이름이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 역을 맡은 브래들리 쿠퍼가 아니라, 번스타인의 아내인 펠리시아 몬테알레그레 콘 번스타인 역을 맡은 캐리 멀리건입니다. 이걸 꼭 ‘레이디 퍼스트’의 개념으로 볼 이유가 있을까요?

   또, 이 영화의 첫 장면에 나오는 인물은 물론 번스타인이지만, 그 순간 그의 독백에서 거론되는 인물은, 또는 발화되는 이름은 바로 그의 아내 펠리시아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번스타인은, 극 중 인터뷰에서든, 영화 전체에서든, 바야흐로 자기 아내의 이야기를 하려는 참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영화는 번스타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어쩌면 번스타인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자기 아내 펠리시아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뿐만이 아니라, 이 영화의 내용도 번스타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펠리시아의 이야기라고 해야 더 어울리는 느낌이 듭니다. 이야기가 전개되어 가면 갈수록 그렇습니다. 적어도 저한테는 그랬습니다.

   그런데도 굳이 이 영화를 번스타인의 이야기라고 해야 한다면, ‘펠리시아의 시각에서 본 번스타인의 이야기’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한마디로 ‘아내의 눈으로 본 남편의 이야기’인 셈이지요.

   아닌 게 아니라, 이 영화는 번스타인이라는 한 남자가 세계적인 음악가(번스타인은 영화 속에서 스스로 자신을 지휘자도 작곡가도 아닌 ‘뮤지션’이라고 규정합니다)로 성장 또는 출세하는 과정 자체에는 큰 관심이 없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한 셀럽의 입지전이나 성공스토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영화의 이야기도 번스타인이 아니라, 그의 아내 펠리시아가 세상을 떠나면서 끝납니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제1주인공은 번스타인이 아니라 그의 아내 펠리시아입니다. 그래서 엔딩 크레디트의 맨 위에 올라 있는 이름이 브래들리 쿠퍼가 아니라 캐리 멀리건인 것입니다. 물론 이는 저만의 해석입니다.     


남편이냐, 아내냐?

   클래식 음악이나 뮤지컬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번스타인이 지휘해 낸 교향곡을 비롯한 수많은 클래식 관현악 명곡이나, 그가 작곡한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같은 걸작 뮤지컬에 먼저 관심이 가겠지요. 그래서 번스타인은 누가 뭐라고 하든 우선은 음악가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아내에게 번스타인은 음악가인 동시에, 또는 음악가이기 이전에 먼저 남편입니다. 당연히 그러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영화 속에서 번스타인은 음악가로서보다는 아내를 줄곧 속상하게 만드는 양성애자 남편으로 더 많이 묘사되는 느낌입니다.

   물론 번스타인은 기본적으로 아내 펠리시아에게 당연히 사랑하는 남편입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딱 그만큼, 또는 그 이상으로 증오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세상에 양성애자 남편을 전적으로 포용할 수 있는 아내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는 양성애자 아내를 전적으로 포용할 수 있는 남편을 상상하기 힘든 것과 똑같은 사태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심지어 번스타인은 자신의 양성애 성향을 아내에게 숨기려는 노력도 그리 필사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어쩌면 번스타인의 아내는 속이 썩어 문드러졌을지도 모른다’라고 말해도 결코 지나친 과장은 아닐 것입니다. 그 속을 당사자가 아닌 남들이 어찌 알겠습니까.

   그렇다면 영화가 번스타인의 음악보다 이 아내의 심정에 좀 더 관심을 기울이는 듯이 보이는 것은, 그 윤리성의 마땅함을 따지기 이전에, 극적 구성의 차원에서도 지극히 합리적이고 합당한 태도가 아닐까요.

   따라서 그런 남편을 견뎌내면서 끝까지, 그러니까 자신의 생명이 다하기까지 그의 곁에 있어준 아내 펠리시아야말로 ‘마에스트로(물론 이 단어의 여성형은 ‘마에스트라’이지만요. 얼마 전에 배우 이영애 님이 오케스트라 지휘자 역을 맡았던 〈마에스트라〉라는 제목의 드라마도 있었지요?)’라는 칭호를 받을 만하다고 평가해야 맞지 않을까요. 적어도 저는 그러고 싶습니다.     


번스타인과 말러, 또는 번스타인의 말러

   번스타인이 작곡한 음악들을 제외하고 이 영화에 주요하게 나오는 음악은 말러와 베토벤입니다.

   특히 말러가 도드라집니다. 앞에서는 교향곡 제5번의 4악장 ‘아다지에토’가 배경음악으로 나오고, 뒤에는 교향곡 제2번 ‘부활’의 마지막 5악장의 피날레 부분이 실황 연주 장면으로 나옵니다.

   이 ‘아다지에토’는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거장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의 〈베니스에서의 죽음〉(1971)에 가슴이 서늘할 만큼 비장하게 쓰인 뒤로 영화나 드라마의 배경음악으로 숱하게 거듭 선택되어 온 명곡이지요. 최근에는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2022)에도 나왔고요.

   영화 후반부에서 번스타인이 말러의 ‘부활’을 지휘하는 장면은, 실제로 번스타인이 생전에 런던 교향악단과 에든버러 페스티벌 합창단을 지휘한 연주 실황 영상을 화면 비율까지 ‘복붙’ 한 것처럼 그대로 재현한 장면입니다.(이 장면은 유튜브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싱크로율이 감탄스러울 만큼 높습니다.) 이는 이 영화가 음악적으로 가장 힘을 기울인 장면이자, 브래들리 쿠퍼가 지휘자 번스타인을 가장 열정을 기울여 연기해 낸 장면이기도 합니다.

   이야기의 흐름이라는 맥락에서 이에 의미 부여를 한다면, 병이 들어 생명이 하루하루 스러져 가고 있는 아내의 머지않은 죽음과 이 교향곡의 표제인 ‘부활(復活)’의 상관관계가 예사롭지 않은 의미로 읽힙니다.

   아마도 번스타인은 아내가 어서 쾌차하여 훌훌 털고 병상(病床)에서 일어나기를, 그러니까 ‘부활’하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양성애자이기는 하였지만, 어쨌거나 한 여인의 남편으로서 그에게도 그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은 있었을 테니까요.

   말러의 교향곡 ‘부활’을 혼신의 힘을 다하여 지휘하는 번스타인의 땀범벅인 얼굴에서 그 뜨거운 염원을 조금이라도 느끼지 않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적어도 저로서는요.

   영화가 이렇게까지 말러에 힘을 기울이는 것은 번스타인이 말러와 음악적으로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 앞부분에는 스물다섯 살의 젊디젊은 번스타인이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 데뷔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는 원래 지휘를 하기로 예정되어 있던 브루노 발터가 건강상의 문제로 지휘를 못 하게 되어 갑작스레 번스타인에게 기회가 온 덕분입니다. 이런 식의 느닷없는 데뷔가 지휘자 세계에서는 종종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번스타인은 브루노 발터의 제자인 셈인데, 이 브루노 발터가 바로 말러의 제자입니다. 말러도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일하면서 작곡을 했거든요. 그의 밑에 브루노 발터가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니까 구스타프 말러, 브루노 발터, 레너드 번스타인으로 지휘자 계보가 이어지는 셈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는 고스란히 말러 교향곡에 대한 해석의 계보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20세기 중후반에 세계적으로 말러 붐이 일어난 것은 이 계보의 공헌이 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상 처음으로 말러의 교향곡 전곡(미완성인 10번과 ‘대지의 노래’까지 합하면 모두 11개)을 녹음하여 내놓은 지휘자가 바로 번스타인입니다. 그만큼 번스타인에게 말러는 중요한 작곡가였습니다.

   이 번스타인의 제자가 바로 올해 초(2024년 2월 6일)에 타계한 일본의 지휘자 오자와 세이지입니다. 제자 오자와 세이지가 회고하는 스승 번스타인의 또 다른 면모를 우리는 최근에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의 《오자와 세이지씨와 음악을 이야기하다》(비채)라는 책을 통해서 엿볼 수 있습니다.     


그래도 베토벤이지

   하지만 번스타인은 분명 지휘자입니다. 지휘자가 주인공인 영화에서 베토벤이 빠진다면 이상하겠지요.

   저는 영화를 보는 내내 ‘아무리 말러가 중요해도 설마 번스타인이 베토벤을 지휘하는 장면이 안 나올까?’ 하고 계속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나왔지요.(그럼 그렇지!) 영화 후반부에서 번스타인이 제자에게 지휘 레슨을 해주는 장면이 바로 그것입니다.

   한데, 이 대목에서 영화가 선택한 것은 ‘놀랍게도’ 베토벤의 제8번 교향곡이었습니다.

   생전에 베토벤은 제7번 교향곡에 열광하는 사람들을 두고 핀잔하는 투로 실은 8번이 더 훌륭하다는 말을 한 바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베토벤의 아홉 개의 교향곡은 하나같이 걸작이지만, 유독 8번은 그 특유의 밝고 리드미컬하고 청신한 매력에도 불구하고 7번의 그늘에 가려져서 선호도가 조금 떨어지는 느낌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가 ‘하필이면’ 바로 이 교향곡 제8번을 선택했다는 사실이 저한테는 참 귀하게 여겨집니다. 이것이 바로 이 영화의 주연이자 감독인 브래들리 쿠퍼의 클래식 음악에 대한 안목을 제가 마침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 요인이었다고 하면 지나치게 치켜세우는 격이 될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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