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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수 May 03. 2024

C3. 이별한다면 이들처럼, 어진 이들의 어진 이별

  - 셀린 송, 〈패스트 라이브즈〉

C3. 이별한다면 이들처럼, 어진 이들의 어진 이별  - 셀린 송, 〈패스트 라이브즈〉(2024)

첫 데이트 또는 첫 이별

   열두 살의 소녀는 동갑내기 학교 친구인 소년과 처음으로 ‘데이트’를 합니다. 소녀의 이름은 나영, 소년의 이름은 해성입니다. 나영의 어머니가 나영에게 “네가 좋아하는 아이가 있느냐?”라고 묻고는, 나영이 ‘해성’이라고 대답하니, 그 아이와 ‘데이트’를 하라고 기회를 만들어 준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영은 이제 곧 부모님을 따라 캐나다로 이민을 가야 하거든요. 따라서 이 느닷없는 데이트는 고국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딸한테 잊지 못할 즐거운 추억 하나를 만들어 주려는 어머니의 배려였던 셈이지요. 나영은 어머니 앞에서 장차 해성과 결혼하겠다고, 꼭 장난기만은 아닌, 나름 진지한 눈빛으로 선언합니다.

   나영과 해성이 즐겁게 어울려 노는(데이트하는) 모습을 멀찍이서 바라보며 해성의 어머니가 나영의 어머니에게 왜 모든 것을 버리고 이 땅을 떠나려느냐고 묻자, 나영의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버리는 게 있으면 얻는 것도 있다고요.

   글쎄요. 나영의 어머니는, 나영은, 그리고 그 가족은 무엇을 얻게 될까요?

   앞서 나영은 학교에서 똑같은 질문을 해온 해성에게 우리나라에 있으면 노벨문학상을 못 받는다고, 꼭 우스갯소리만은 아닌, 나름 진지한 눈빛으로 답한 바 있습니다. 그렇지요. 나영은 장래 희망이 글쟁이입니다.

   이렇게 느닷없는 첫 데이트를 끝으로 나영과 해성은 서로 이별합니다. 그러니까 이 첫 데이트는 둘에게 첫 이별을 위한 일종의 의식(儀式)과도 같은 만남이었던 셈입니다.     


재회 혹은 두 번째 이별

   열두 해가 흐릅니다.

   나영도 해성도 이제 스물네 살의 성인이 되었습니다. 각자의 꿈, 장래 희망을 위해서 이런저런 준비를 맹렬하게 해 나가는 시기지요. 나영은 미국의 뉴욕에서, 해성은 한국의 서울에서요.

   이 둘이 ‘무려’ 열두 해 만에 다시 얼굴을 보게 되는 것은 인터넷을 통해서입니다. 그즈음 해성이 군대에서 문득 생각났던 나영을 제대 이후에 찾고 있었거든요. 그 흔적을 나영이 발견하고 해성한테 연락을 취한 것입니다.

   이제 둘은 노트북을 통하여 서로의 얼굴을 보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동안의 회포를 풉니다. 이제 나영은 자기 이름이 나영이 아니라 ‘노라’라고 알려줍니다. 해성과 노라는 서로에게 고백합니다. 보고 싶었다고요.

   둘 사이에 아무런 접촉 없이 열두 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서로에 대한 감정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로써 증명된 셈이지요. 오히려 그리움으로 그 감정이 더 깊어졌다는 느낌마저 듭니다. 이런 식으로 웹상에서 둘의 만남은 한동안 이어집니다.

   하지만 둘은 지금 각자가 처해 있는 형편상 서로를 만나러, 그러니까 해성이 노라를 만나러 뉴욕으로 갈 수도, 노라가 해성을 만나러 서울로 갈 수도 없는 처지입니다.

   어느 날 노라가 심각한 얼굴로 해성에게 말합니다. 자기를 만나러 뉴욕으로 언제 올 수 있느냐고요. 해성은 두 해 반 정도는 걸릴 거라고 답합니다. 해성은 이제 곧 중국으로 가야 하거든요.

   아마 노라는 그새 좀 지친 모양입니다. 노라는 해성에게 당분간 연락하지 말고 떨어져 있자고 제안합니다. 연인 사이에, 또는 연애 감정이 오가는 관계에서 이런 제안은 대개 헤어지자는 말의 다른 표현이기 십상이지요. 해성도 그걸 느낍니다.

   결국 둘은 노라의 제안을 따르기로 합의를 봅니다. 그리고 둘은 인터넷 연결을 끊습니다. 두 번째 이별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두 번째 이별을 위한 두 번째 만남의 종결입니다.     


세 번째 만남

   다시 열두 해가 지납니다.

   이제 둘은 서른여섯 살의 제법 성숙한 어른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둘은 각자 자기만의 삶을 열심히 살았지요.

   노라는 글쟁이(Writer)라는 같은 업계 종사자인 외국인 남자와 사귀다가 결혼하여 자기만의 경력을 쌓아나가고 있으며, 해성은 그 자신의 표현대로라면 평범한 직장인이 되어 평범한 삶을 살며, 여행길에 우연히 만나 연인 관계가 된 여자와 결혼이라는 문제 앞에서 잠정적으로 만남을 중단한 상태입니다.

   해성은 노라가 결혼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둘은 다시 만납니다. 이번에는 해성이 연락을 취하여 노라를 만나러 뉴욕으로 날아간 것입니다.

   이제 세 번째 이별을 위한 세 번째 만남이 시작됩니다.     


팔천 겁의 인연

   이쯤 되면 우리는 적어도 이 영화에서만큼은 ‘만남’과 ‘이별’이 이음동의어라는 사실을 눈치채야겠지요. 또는, 인정해야겠지요.

   여기서 감독은 ‘인연’이라는 화두를 슬쩍 던져놓고, 이걸 빌미 삼아 두 사람의 만남과 엇갈림, 그리고 결혼이라는 문제에 대하여 관객이 스스로 곱씹어 볼 수 있도록 생각의 여지를 마련해줍니다.

   제 생각에 이 ‘인연’은 이 두 인물, 노라(혹은 나영)와 해성의 이별과 만남(혹은 재회)에 대한 해석의 틀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감독이 관객한테 제시한 해석의 가이드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가이드일 뿐, 가이드 라인은 아닙니다. 꼭 이걸 지키거나, 이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인연의 틀을 벗어나서 이들의 이별을 해석할 길이 딱히 없다는 것 또한 진실입니다.

   전생(前生)에 무려 ‘팔천 겁(劫:천지가 개벽한 때로부터 다음 개벽 때까지의 시간, 곧 아주아주 긴 시간)’의 인연이 쌓여야만 현생(現生)에 부부가 될 수 있다는 것―. 아무리 서로 사랑하고 그리워하더라도 이 질긴 인연의 도움이 없다면 결코 부부가 될 수 없다는 것―.

   아마 감독은, 또는 나영(혹은 노라)과 해성은 그들의 사랑이 끝내 이루어지지 않은 데 대하여, 아니, 그들의 사랑이 부부라는 모양새로 열매 맺지 못한 데 대하여 이 인연이라는 변명이 필요했던 것일까요.

   아니면, 인연이라는 변명이라도 대지 않고는 그들의 이별을 받아들이거나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일까요. 또는, 도저히 그들의 이별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에 인연이라는 변명이라도 끌어다 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일까요.

   하여튼, 그들의 이별에 대하여 감독은, 그리고 나영과 해성은 ‘그것이 인연’이라고 받아들입니다. 아니, 인연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합의합니다. 또는 동의합니다.

   당연히 이 합의나 동의는 결코 합리화가 아닙니다. 동의했다고, 합의했다고 그 이별의 아픔이 없어지거나, 그 강도가 낮아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이 이별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 이별의 아픔이 크지 않거나, 깊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아프지만, 힘들지만, 슬프지만, 적어도 지금은 인연을 변명 삼아, 또는 빌미 삼아 이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들은 서른여섯 살의 연륜으로, 서른여섯 살의 어른스러움으로 ‘어른답게’ 수긍하고 결정합니다. 적어도 지금은요.     


세 번째 이별 또는 어진 이별

   하지만 이 순간 그들이 팔천 겁의 인연에서 딱 한 가닥의 인연이 모자라 헤어지는 것이라면요? 어쩌면 그들의 이 세 번째 만남이 바로 칠천구백구십구 가닥의 실에 마지막 한 가닥의 실이 보태지는 순간이라면요?

   불순한 상상일까요? 서른여섯 살이면 충분한 어른이기도 하지만, 서른여섯은 아직 충분하지 않은 어른의 나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팔천 겁의 인연, 팔천 가닥의 실이 다 채워졌을 때 그들이 장차 어떤 삶으로 인도되어 갈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 아닐까요?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인연의 소관 사항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연의 오묘함이겠지요. 그래서 저는 이 마지막 순간, 그들의 세 번째 이별을 조장한 인연이 마냥 섭섭하거나 원망스럽지 않았습니다.

   맹자(孟子)는 ‘어짊(仁)’을 ‘불인지심(不忍之心)’, 곧 ‘차마 어쩌지 못하는 마음’이라고 참 따뜻하게 정의한 바 있습니다.

   제 생각에 나영과 해성, 해성과 나영은 참 어진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그들은 서로에 대한 마음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차마 어쩌지 못하는 마음’으로 헤어졌으니까요. 그 마지막 세 번째 이별을 어쨌거나 받아들였으니까요. 그리고 다른 그 무엇도 아닌 인연을 변명으로 삼았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그들의 이별을 참 ‘어진’ 이별이었다고 규정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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